배우를 꿈꾸는 대학생 진식이 방에는 전신 거울이 세 개나 있다. 하나는 <소망의 거울>이고 또 하나는 <욕망의 거울>이고 나머지 하나는 <의지의 거울>이다. 작은 아크릴 판에 거울 이름을 새겨 각각의 거울 맨 위에 붙여놓기도 했다.
2.
진식이는 나이가 40이 넘은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고모는 직업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진식이 어머니보다 진식에게 더 많은 잔소리를 한다.
“너 오늘도 그 거울 보며 눈깔 뒤집어 까고 지랄할 거지?”
진식이는 청소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고모를 쳐다보지도 않고 <욕망의 거울> 앞에서 두 눈을 부라린다. 그러다 갑자기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삿대질을 해댄다.
“제발 고모는 시집이나 가라고! 이 조카의 원대한 꿈을 한낱 개꿈으로 쪼그려 버리며 뭉개고 짓밟고 돌팔매질만 그렇게 할 거야?!”
침방울이 튀어 얼룩이 졌던지 진식이는 옷소매로 거울을 쓱쓱 닦는다.
“너는 연기 연습한다는 게 늘 그렇게 악다구니만 쓰는 거냐? 가만히 보니 거울 앞에서 니가 하는 짓을 보면, 술 마시면서 화내고 눈깔에 힘주면서 소리치고, 그러다가 울고불고 던지고 머리를 쥐어뜯고 뭐 그런 거잖아. 고모는 니 꿈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꿈이 현실이 되려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야.”
진식이는 고모의 말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창밖을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소망의 거울> 앞으로 옮겨간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자세로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 자신의 눈을 응시한다. 한참이나 그 자세로 서 있다가 서서히 얼굴을 거울 쪽으로 가까이 들이밀며 단호한 목소리를 내뿜는다.
“권진식, 너는 기어코 배우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너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너 자신과 지켜야 할 약속이다. 어떤 고난이 너를 힘들게 할지라도 파도를 부숴 버리는 바위처럼 굳세게 버텨 내어 끝내 엔딩 크레디트에 너의 이름을 올릴 것이다!”
이번에는 찌푸린 미간을 풀고 애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뒤에서 우두커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고모가 진식이 뒤통수에 대고 또 다른 잔소리를 던진다.
“진식이 너의 연기는 억지 표정만 있고 감정이 들어있지 않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연기가 감정에서 우러나와야 된다고. 어때, 고모가 니 속 좀 더 뒤집어 감정을 불러일으켜줄까?”
진식이는 천장을 보며 긴 숨을 내뿜더니 터덕터덕 <의지의 거울> 쪽으로 걸어간다.
“이 세상이 고수에겐 놀이터고 하수에겐 생지옥이라 했는데, 노처녀 잔소리와 싸워야 하는 나에게는 비정한 전쟁터로구나! 꿈을 포기할 것인가 고모와 의절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근데 진식아, 너의 연기에는 웃는 연기는 없냐? 진식이 어릴 때 방글방글 웃으면 엄청 귀여웠는데. 고모가 시집 안 가고 있는 이유가 그 웃는 얼굴 좀 더 보고 싶어서야. 어디 한번 방글방글 웃어봐!”
“고모님! 그런 것은 개그맨들이나 합니다. 대스타의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않아요! 세상을 들었다 놨다, 엎었다 뒤집었다 해야 할 사람이 펼칠 연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정녕 고모님은 이 조카가 방글방글 웃는 연기나 하면서 삼류 배우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지요?”
“개그맨들은 웃는 연기가 아니라 웃기는 연기를 하는 거 아니냐? 그리고 그 거울에 붙여놓은 이름들 말인데, 소망, 욕망, 의지? 라임이 맞지 않아! 소망, 욕망, 그리고 절망이라고 하면 더 어울리잖아. 게다가 <의지의 거울>보다 <절망의 거울>이 감정을 더 건드릴 것 같고, 그래서 더 절실한 연기가 나올 수 있다 이거야. 그렇다고 우리 진식이가 절망적이라는 것은 아니고.”
방에 들어온 고모를 쳐다보지도 않고 세 개의 거울을 번갈아 보며 연기하듯 말을 이어가던 진식이가 고모를 향해 획 돌아서서 샤우팅을 한다.
“고모! 시집은 대체 언제 갈 거예요! 아유, 정말 미치겠네!”
“야, 바로 그거야! 지금 그게 진짜 연기다!”
3.
고모가 진식이 방에 들어갈 때는 항상 손에 청소기가 들려 있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늘은 고모의 손에 청소기가 보이지 않았다.
“진식아, 나 배우 됐다.”
청소기도 없이 들어와서 생뚱맞은 말을 하는 고모를 멀뚱하게 쳐다보는 진식이,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슨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며 <소망의 거울> 앞으로 돌아선다.
“믿기지 않지? 나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도 긴가민가해. 비록 단역이지만......”
평상시와 다른 고모의 말투에 진식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90도 각도로 돌린다.
“그니까, 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 어떤 카페에 갔었잖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라 수다를 떨며 하하호호 재밌게 놀고 있었거든. 근데 말이야 어떤 젊은 여자가 와서 이러는 거 있지.”
진식이는 뭔가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고모 앞으로 바짝 다가가 주저앉는다.
“글쎄, 나보고 이러는 거 있지. ‘언니, 그 멋진 웃음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요. 너무 자연스럽고 섹시하기까지 해요’ 그러더라고. 나는 그 여자가 블로거나 아니면 유투버라고 생각하고 그냥 한 컷 따가라고 했지. 근데 그 사람 알고 보니 어떤 영화기획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더라고. 나 같은 사람을 찾으러 다녔고 마침내 목표물을 찾았다는 거야.”
진식이는 고개를 돌려 <욕망의 거울>을 본다. 생기 없는 자신의 얼굴과 생기 넘치는 고모의 얼굴이 거울 속에 함께 들어 있다.
“오늘 아침에 그 기획사에 가서 계약을 했고 연기 지도도 받았어. 주로 웃는 연기였는데, 가장 쉬운 것은 박장대소야. 손뼉 치면서 깔깔대는 거. 그다음은 앙천대소, 파안대소 순으로 연습을 했는데, 파안대소 그거 난이도가 좀 있더라. 단순히 웃음소리만 신경 쓸 수 없고 입술 모양, 시선처리, 심지어 눈썹의 움직임까지도 머릿속에 디자인하며 연기해야 돼서 사실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더라. 그래도 뭐 시작한 것이니 해봐야지. 근데 있잖아, 내가 제일 잘한다고 칭찬받은 웃음이 뭔지 아니? 바로 이거야!”
고모는 배를 그러안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흔들고 웃다가, 손바닥으로 벽을 치며 웃다가, 급기야는 방바닥에 누워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