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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타멀스 Sep 26. 2022

메타버스에 추락한 UFO

땅과 하늘이 구별되지 않는 곳에 그들의 광장이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는 홀로그램 영상으로 재현된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영상 위쪽으로 직사각형 채팅 창이 떠 있었고 채팅 창 맨 위에는 관리자 공지가 상시 노출되어 있었다.


☸관리자 공지  아래 영상은 오늘 새벽 태평로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한 남성을 홀로그래픽 디스플레이로 보여 준 것입니다. 꼼꼼히 살펴보시고 각자의 정보와 의견을 올려 주십시오.


워킹맘  안구 홍채를 스치고 지나간 정보를 분석해보면 그는 오랫동안 많은 양의 문자를 읽었습니다. 글자에 긁힌 자국이 그의 홍채에 선명합니다.

기레기자 엄지와 검지의 지문이 닳아져 지문 인식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엄지와 검지로 엄청난 분량의 책장을 넘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정말 종이책을 좋아했는지 아니면 종이책만 읽을 수밖에 없었는지 좀 더 깊이 있는 취재가 필요합니다.

자연인  자세히 보면 검지의 지문이 엄지보다 더 망가졌습니다. 검지에는 지문이라고 할 만한 무늬가 거의 없어요. 그는 종이책을 많이 읽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 글을 쓴 작가였을 겁니다. 컴퓨터 키보드를 검지로만 쳤다는 거죠.   

악다구니  그의 주변 인물을 상대로 탐문 조사를 해봤는데, 그는 가끔 글을 쓰기는 하지만 한 번도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콩깍지Love  글을 쓴다고 다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죠. 시 좀 쓴다고 시인이고 소설 좀 쓴다고 소설가이고 수필 좀 쓴다고 수필가라 하면, 그 어려운 등용문을 통과하여 문단에 등단한 사람들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도, 존중도 하지 않는 거죠.


☸관리자  그는 자기소개서에 자신을 '미니블리스트 양 선생'이라고 써 놨습니다. 'mini''novelist'를 조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시처럼 수필을 쓰고 수필처럼 소설을 쓰고 소설처럼 시를 쓴다고 합니다. minivelist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검색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이구아놔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글을 그는 왜 쓰고 있을 까요? 시와 수필과 소설의 경계를 모른 것일까요, 아니면 그 경계를 자기 맘대로 넘나드는 것일까요?

톡사이다  노력도 하고 싶지 않고 능력도 부족하니까 그냥 두루뭉술하게 되는대로 써대는 것이겠죠. 그야말로 혼을 쏟아야 작품이 나오는데 설렁설렁 글을 쓰려는 태도 아닐까요.

슈퍼초딩 우리 선생님은 설렁설렁 똥 듯 글을 쓰라고 하던데요. 재미로 글을 쓰고 거기에 의미를 담으면 글 쓰는 것이 취미가 되고, 그러면 이미 작가가 다 된 것이라고 하셨어요.

IM5K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똥을 때도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있지요.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싸 놓으면 화장실을 오염시킬 뿐이지. 그리고 사람들은 글을 '쓴다'라고 하는데 사실 작가들은 글을 '짓는' 사람들이야. 아무나 레고를 조립할 수 있지만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어떤 말을 누가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잖아. 수없이 생각하고 다듬고 때로는 비틀고 휘감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신 줄을 팽팽하게 당겨놓아야 하는 거야. 재미로 취미로 쓰는 것과는 다르지.  

메타피쉬  그러고 보니 그의 글은 표현이 단순하고 묘사가 투박합니다. 글의 모양이 잎사귀 없는 앙상한 겨울나무나 살 없는 생선 가시와 같고, 멋을 부리지 않아 맛도 없어 보입니다. 필력은 물론이고 정신 줄을 팽팽하게 당길 기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꼭두새벽닭장수  그래서 그가 생경하기 짝이 없는 국적 불명의 '미니블리스트'는 말을 만들고 작가 대신 선생을 호칭으로 사용하는군요. 선생은 딱히 부를 만한 호칭이 없을 때 누구에게나 붙이는 거잖아요. 블랙리스트도 아니고 미니멀리스트도 아니고, 미니블리스트? 하여튼 그런 사람들은 제발 쓰레기 같은 글 좀 그만 쓰고 새벽부터 생업에 종사하는 우리들처럼 땀 흘려 일 좀 하라고 그래요. 빈둥거리며 헛소리나 지껄이지 말고. 가만히 보니 나이도 많은 것 같은데, 노인네의 고리타분한 상상력에서 나오는 글에 신선한 향기가 있을까요? 노인 내라면 모를까.


☸관리자  인격 모독이나 차별적 표현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삐딱깝쭉  작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글을 쓸 자유가 있습니다. 전문 산악인만이 산에 오르지 않습니다. 배고픈데 요리사가 없다고 굶고 있을 건가요?

어줍잖은작가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솔직히 먹고살려고 글을 씁니다. 글을 써서 번 돈이 지갑에 들어오기도 전에 빠져나가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대작을 써보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나도 아직은 겨울나무나 생선 가시처럼 풍성한 멋과 맛이 없는 글을 쓴다는 비평을 자주 기는 하지만. 제 글이 치장은 없고 속살만 드러나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둥과 뼈대는 살아 있습니다.

참교육선생 선인장은 앙상하지만 조건이 맞고 때가 되면 자기보다 더 크고 고운 꽃을 피웁니다. 어줍잖은작가님도 머지않아 기둥에서 솟아나고 뼈대에서 피어나는 눈부신 꽃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돈도 많이 버세요. 응원합니다.

돈돈돈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뭐 잘못인가요? 글을 쓰는 것도 때로는 밤새우며 꼭두새벽까지 하는 작업인데 일한 만큼 돈도 벌어야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게 알바를 시켜 벌어들인 돈으로 도박을 즐겼던 그분, 대문호였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걸작이며 명작이고요. 다시 말해 돈은 돈이고 작품은 작품입니다.


☸관리자 ► 미니블리스트 양 선생은 글을 써서 벌어들인 돈이 10원도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노숙자라네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글을 시장에 내놓으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수능대박  내 친구 중에 하나는 수능시험도 보지 않을 거고 대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을 거면서 공부는 나 보도 더 많이 해요. 공부는 시험을 보기 위한 것이고 점수를 높이려고 하는 것인데, 헛공부하고 있는 그 친구의 미래가 걱정돼요.

평생알바  글을 쓴다고 다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니까 돈 얘기보다 저 사람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딱서니  혹시 출판업계의 생태계를 흔들어보려는 심산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큰 그림을 갖고 새로운 문예 사조를 이 땅에 심어보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그것도 아니면 인문학에 흙탕물을 뒤집어 씌워 광합성 작용을 막아 고사시킬 작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장 적절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21세기돈키호테  철딱서니님,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새로운 것, 수상한 것, 파격적인 것이 별로 보이지 않아요. 다만 짧은 글 속에 잔잔한 소슬바람 정도를 느낄 수 있지요.

UR더원  그냥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글이더군요. 어렵고 복잡한 글도 아니어서 자투리 시간에 눈요깃감으로 괜찮아요.

겨우일흔살 나도 글을 써볼까 합니다. 내 마음속 한구석을 수십 년 동안 차지하고 들락날락하던 옛이야기들이 마침내 삭고 발효가 되어, 어떻게든 털어내지 않으면 내 몸이 삭아버릴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구수한 향기가 나는 글이 나와야 할 텐데. 누가 읽어주기나 할는지.


☸관리자  미니블리스트 양 선생이 손을 흔들며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별주부  이곳으로 토끼가 도망쳐 와 숨어 있다는 데, 분명 어디선가 낮잠을 퍼질러 자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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