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단둘이 사는 승언의 집에 오늘 아침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사실 한바탕이라고 해봐야 아빠 영준이 큰 소리를 내는 일은 거의 없다. 매번 승언이,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방패 삼아 혼자 발끈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다반사일 뿐.
어려서 엄마를 잃은 아들이 측은하고 안쓰러워 영준은 정성을 다해 승언을 키웠다. 제 엄마의 빈자리까지 채우기 위해 더 살뜰히 헌신을 다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점점 변해가는 승언을 보며 영준은 가슴 한편에 구멍이라도 난 듯 마음이 시렸다.
"그걸 왜 아빠가 신경 쓰냐고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엄마들이 가서 도와주는 거라면서? 네 고모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됐어요, 괜찮아요."
지난주 부자가 밥을 먹다가 승언이 지나가듯 했던 말을 영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 행사 준비에 학모들의 자율적 봉사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영준은 반장인 승언에게 난감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미리 승언의 고모에게 언질을 해두려던 참이었다.
"그러지 말고 네 고모한테 가보라고 할게. 다들 엄마들이 올 텐데..."
"아, 진짜! 제발 쫌!"
승언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의 반응이 지나치게 차가워 영준은 당혹스러웠다.
"아빠, 왜 그 공백을 자꾸 아빠가 채우려고 해? 그냥 둬 달라고 했잖아요!"
영준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 발걸음을 멈춰 섰다. 오늘 아침 승언과의 갈등으로 출근 시간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잰걸음을 옮겨야 간신히 통근 버스를 탈 수 있다.
<왜 그 공백을 자꾸 아빠가 채우려고 해?>
저 비탈길을 어서 내려가야 하는데 영준은 승언의 마지막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하나뿐인 아들내미가 홀아비와 둘이 사는 티가 나, 혹여 무시라도 받을까 너무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인가 싶어서. 어미의 공백을 느끼지 못하도록 정성을 다했을 뿐인데 그것이 오히려 제 어미를 그리워할 틈까지 빼앗아버린 꼴이 된 것일까 싶어서.
영준의 아내는 마음도 몸도 건강한 여자였다. 뱃속 아기도 엄마를 닮아 임신 기간 내내 별일 하나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그런데 Rh- 혈액형인 그녀가 분만 중에 자궁파열로 인해 심각한 출혈을 겪는 일이 발생했다. 병원에서 보유 중인 혈액형이 모자라 응급 수혈 요청을 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있었지만 수혈이 제때 원활히 이루어져 운이 좋게도 산모와 아이는 모두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후 그녀는, 이름도 생소한 루푸스신염이라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게 되었다. 투병 생활은 몇 년간 계속되었지만 신부전으로 인한 패혈증 때문에 결국 그녀는 승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엄마 없이 자라는 아들이 매 순간 안쓰럽고 짠해서 신경을 더 써준다는 것이 승언에게는 오히려 마음의 부담이 되었던 것인가 보다. 영준은 아까 승언이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올라 결국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전화를 받은 승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영준은 아들이 혹시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전화를 무시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승언아, 지금 통근 버스도 놓치면서 전화한 건데 아까 아빠한테 했던 말 말이야..." "됐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다. 아빠가 미안해." "뭐가?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데요?" "아빠는 그냥 네가 엄마 없이 자라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그런다고 죽은 엄마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해?" 영준은 이렇게 내뱉는 승언의 마음이 오죽할까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승언아, 미안하다." "미안, 미안, 미안! 그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하세요. 아빠가 왜 그렇게 매번 미안해야 하는 건데? 아빠 인생은 없어?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 이제 신경 좀 끄세요." 승언은 통화 종료 버튼을 거칠게 눌러버렸다. 아빠 잘못이 아니라고, 사실은 너무 애쓰는 아빠를 보니 마음이 아파서 그랬다고, 승언은 말하지 않았다. 승언모의 부재가 자신의 탓이기라도 한 듯 영준은 승언에 관한 모든 일에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승언이 어렸을 땐 아빠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인가 하고 그의 헌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엄마의 공백 때문에 아들이 행여 마음이라도 다칠까 매사 전전긍긍하는 그가, 시간이 지날수록 승언은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승언이 철이 들면서 보이기 시작한, 고단했을 영준의 삶이 가여워 어느 날엔 화가 나기도 했다. 아빠는 아들이 늘 안쓰러웠다. 아들은 아빠가 늘 안타까웠다. 그들은 모두 표현이 서툴렀다.
영준은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승언이 말은 그렇게 했어도 분명 마음은 그런 게 아닐 것이라고 영준은 먹먹한 마음을 위로해 보았다. 이내 다시 발길을 옮겨 터덜터덜 비탈길을 내려갔다. 오늘따라 이 내리막길이 유난히도 긴 것 같다. 통근 버스를 놓쳤으니 근무지까지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도 15분 이상 더 걸어야 한다. 근속 이래 -아내를 떠나보냈을 때를 제외하고- 처음인 이 지각을 피할 길이 없다. 비탈길을 내려와 좀 더 걸었다. 이제 저 앞에 사거리가 보인다. 횡단보도까지는 아직 얼마를 더 걸어야 하지만 보행자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반대편 저 멀리 영준이 타야 할 버스가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신호만 잘 받으면 바로 그 버스를 탈 수 있을 것이다. 통근 버스도 놓쳤는데 저마저 놓치게 되면 큰일이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이지만 영준은 최대한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그가 횡단보도 앞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보행자 신호의 초록불이 깜박이는 중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곳을 거의 건넌 후였다. 11초, 10초, 9초... 남은 시간 10초 남짓. 서두르면 이 사거리 횡단보도를 다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영준이 횡단보도 위를 날쌘 속도로 달음질했다. 그러다 자신이 타야 할 버스의 위치를확인하기 위해 차선을 살피다 버스 옆으로 심상치 않게 달려오고 있는 트럭을 발견했다. 저쯤에서는 속도를 줄였어야 하는데 트럭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선을 넘나드는 것 같기도 했다. 2차선을 달리던 버스도 심상치 않음을 인지했는지 경적을 길게 울려댔다. 그 순간 영준의 눈에 목발이 들어왔다. 아들 승언을 생각나게 하는 한 학생이 목발을 짚고 힘겨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깜빡이는 초록색 신호를 보며 더 서둘러 건너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툰 목발질은 그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고, 저만치 달려오는 트럭 앞에서 그 학생은 결국 한쪽 목발을 놓치고 말았다. 버스는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대고, 그 트럭은 여전히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었다. 영준은 주저 없이 그에게로 가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아이를 인도 쪽으로 밀쳤다. <끼이익!!!> 마치 영사기 뒤에서 필름을 천천히 돌리듯 영준에겐 시간이 느리게 흐르다 서서히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던 것도 같다. <왜 그 공백을 자꾸 아빠가 채우려고 해? 아빠가 왜...> 영준은 승언의 말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메어졌다.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눈꺼풀이 자꾸 무겁게 내려앉았다. 눈을 감았다.
승언은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넋이 나가 그냥 멍한 상태로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꾹꾹 눌러 디뎠다. 믿을 수 없는 그 소식을 이 무거운 걸음으로 짓이겨 없앨 수만 있다면. 다시없던 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애써 꾸역꾸역 누르며 걸었다. 그러다 불현듯 그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면 승언은 달렸다.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달렸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에 두려움이 사그라들 때까지. 오늘 아침 아빠와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아빠가 통근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면. 승언은 이런 비극적인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
승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디가 응급실인지. 사방에 깔린 표지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 같다. 반쯤 넋이 나가 아무런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응급실은 이 건물이 아니에요." 한 간호사가 승언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작은 건물로 그를 안내했다. 응급실은 생각보다 조용했지만 모든 직원들의 발걸음이 사뭇 바빠 보였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폭풍 전야처럼 불안한 적막이 흘렀다. 승언의 발이 갈 곳을 잃고 멈춰 섰다. 뭘 어찌할 줄 모르겠단 초점 없는 눈빛이, 닿는 곳마다 회한의 흔적을 남겼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부축하듯 그의 어깨를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영준은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절박하게 이승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직은 안된다는 듯. 마침내 저기 문 앞에 그렇게 기다리던 승언이 서 있었다. 실낱 같은 영준의 날숨이 가냘프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비틀어진 어깨보다, 피로 눅진한 머리보다, 완전히 혼자가 될 승언 생각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아들의 삶이 처연해 견딜 수가 없었다. 승언이 영준에게 다가왔다. 땀과 눈물이 범벅된 승언의 얼굴이 햇살을 받아 애처롭게 빛났다. 온 힘을 다해 영준이 입을 벌렸다. 한낱 세풍에도 금새 꺼질 듯한 목소리. 승언이 고개를 숙여 귀를 가까이 댔다. 그가 영준의 손을 꼭 잡아보았다. 영준은 남아있는 힘을 다했지만 아들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가슴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온 응급실에 퍼졌다. 삐. 삐. 삐. "환자 상태는?" "CPR 진행 중이고, 아직 호흡 없습니다." "디핍 준비!!" "준비됐습니다." "200줄!" "물러서! 하나 둘 셋!" "환자 반응 없습니다." "250줄! 하나 둘 셋!" "맥박 없습니다." "에피네프린 1mg 투여하고 CPR 계속해." "준비 완료, 투여하겠습니다." " ROSC*?" "아직 안 됐습니다." "손 바꿔! 모니터링하면서 CPR 계속해."
승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영준의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앞이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악몽에서 그만 깨고 싶었다. "환자 아직 호흡 없습니다." "에피 더 투여하고 모니터링해." 의료진들의 같은 행동이 얼마간 반복되었다. "한 번 더! 최대!" "충전 완료했습니다." "클리어!" " ... " 전공의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끝내 화면 위로 매정한 수평선이 그어졌다. 비정하기도 하지. 단조롭게 이어진 일직선에는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던 둥근 파형은 다시 볼 수 없었다. 의사들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승언은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승언아..." 영준의 끊길 듯 말 듯했던 가느다란 마지막 목소리만이 그의 주변을 가득 메웠다. 응급실이 다시 소연해졌다. 열린 창틈으로 한풍이 불어와 에이듯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