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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Nov 03. 2024

[제28화] 후회 없는 사랑

병원 앞 작은 정원에는 봄을 알리는 꽃들이 벌써 만개했다. 꽃잎들은 제 몸을 펼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 화려함과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병원의 풍경과 대조되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생기 있게 막 피어난 꽃들을 보고 있자니 병운은 저기 병상에 누운 정애가 더없이 가엾고 측은하여 눈물이 났다. 밀려오는 두려움으로 자꾸만 마음이 요동쳤다. 병운은 일부러 정원 한가운데 서서 숨을 골랐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삐 ㅡ

병운에게 가장 두렵고 무서운 소리다. 정애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 매번 그 의지를 꺾는 병운의 마음도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오랜 병시중에 지칠 대로 지친 그이지만 그래도 정애를 보내는 것에는 준비와 용기가 더 필요했다. 첫 번째 청천벽력 같은 그 일이 일어나고, 의사들의 도움으로 정애의 쇠잔한 숨소리나마 다시 듣게 되었을 때 정애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그 눈빛은 원망으로 가득해 보였다. 호흡기 밖으로 정애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을 때 그녀는 애절하게 부탁이라도 하듯 병운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나를 정말 위한다면."

마치 그간의 설움과 고통을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애는 자신보다 항상 병운을 먼저 생각하고 위했다. 아프고 나서도, 오랜 병상 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정애가 이제는 자신을 먼저 위해달라고 말한다. 아직 정애를 보낼 수 없는 병운을 원망하듯.



그런데 오늘 병운은 또 그녀를 보내지 못했다. 그녀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받으세요. 흰색 한 송이가 떨어져 있어서요."

정원에 멍하니 섰는 병운에게 한 간호사가 크로커스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다정하게 말을 걸길래 숱하게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안면을 익힌 간호사겠구나 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다.

"흰색 크로커스의 꽃말은 <후회 없는 청춘>이라고 해요."

"후회 없는 청춘이라... 저는 이미 그런 청춘을 보낸 것 같습니다만."

병운이 꽃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며 말했다.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이 꽃말이 꼭 어울리는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할 일이 생길 거예요."

"선물요? 저는 흰색보다는 보라색이 더 좋은데요."

병운이 무심코 그 흰 꽃을 받아 들며 말했다.

"보라색 크로커스의 꽃말은 후회 없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깊고 진실한 사랑에 관한 꽃말이죠. 여기 옥상이 보라색 크로커스 천지랍니다. 꼭 가 보세요."

이곳 옥상은 이미 병운이 아내와 함께 종종 갔던 곳이다. 그곳엔 정원은커녕 작은 화단도 없다. 병운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읽은 그녀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봉투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빨간 리본이 예쁘게 묶인 카드 봉투였다.

"이게 뭔가요?"

"초대장이에요."

"무슨 초대장이요? 플로라의 호수 끝 카페? 난데없이 카페라니 왜 저한테..."

병운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봉투를 열어보며 말했다.

"꼭 오시게 될 거예요."

간호사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선물, 보라색 크로커스 등을 운운할 때부터 병운은 그녀가 의심쩍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옥상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옥상으로 나가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계단을 한층 올라야 한다. 아내 정애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계단 오르는 것을 점점 더 힘들어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꼭 한 번씩은 이곳에 올라 건너편 불빛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불빛이 하나둘씩 들어올 때마다 희망이 켜지는 것 같다며 그녀는 아이처럼 웃었더랬다.

옥상으로 나가는 철문이 활짝 열려있다. 옥상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그럼 그렇지. 몇 번을 올라왔던 곳인데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어디를 보아도 옥상에 화단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보라색 크로커스도 보이지 않았다.

'속았군. 굳이 왜 그런 거짓말을...'

병운은 손에 쥔 흰색 크로커스 한 송이를 무의미하게 바라보다가 출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으로 막 다시 나가려는데 저 앞 -정애가 하염없이 불빛을 세던 곳- 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고독하고 슬픈 뒷모습이었다. 교복을 입은 것을 보니 학생 같았다. 병운은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록 은퇴는 했으나 전직 교사로서의 정체성 때문인지 일종의 책임감 때문인지 병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로 향했다. 그 학생은 사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저 멀리 시선을 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곳에 서서 건너편 불빛을 세던 정애가 생각났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저 불빛을 좋아했다네."

병운이 아내 생각을 하다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짓 놀라 돌아본 그 학생의 얼굴이 낯익다. 아까 병원 로비로 정신없이 뛰어들어왔던 그 남학생인 것 같다. 응급실 소란 속 비극의 한가운데에 있던 그 아이. 눈물과 땀이 범벅되었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장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던 그의 표정이 자신의 마음과도 같아 보여 병운은 더 신경이 쓰였다. 병운은 그에게 어떻게든 위로를 주고 싶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가끔 여기 올라와 하나씩 밝혀지는 불빛을 세고는 했지. 저 불빛이 마치 희망인 것 같다면서. 곧 어둠이 내릴 테니 더 많은 불들이 들어오겠군."

"이 밤이 끝나면 불빛도 다 꺼질 거예요."

그 아이는 마치 원망이라도 하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불빛 따위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그럼 어떤가, 저 빛들은 내일 또다시 밝혀질 텐데. 희망은 가끔 의기소침해 숨기는 해도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네."

아이의 차가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병운이 그를 다독이며 덧붙였다.

"내 아내가 여기서 저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거든, 학생처럼."

"말씀이 계속 과거형이시네요. 그럼 아내분은..."

"지금은 저 아래 병상에 있지. 입원실에."

아이가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보러 올 수가 없어. 그때부터 나도 이곳에 오지 않았지. 누가 가보래서 올라왔는데 학생 뒷모습이 하도 슬퍼 보여서, 내 모습 같기도 하고. 그냥 돌아서 갈 수가 있어야지."

병운이 손에 든 흰 꽃을 내려다보다 말을 이었다.

"왜 나에게 보라색이 아니라 이 흰색 꽃을 주고, 옥상으로 가보라 했는지 이제 알겠군."

아이가 다시 병운을 쳐다보았다.

"이건 아무래도 학생 것인 것 같은데? 자, 받게나. 이 꽃을 혹시 아나?"

"아니요, 처음 보는 꽃이에요."

"크로커스라는 꽃인데 이 흰색의 꽃말이 후회 없는 청춘이라더군."

아이는 슬픔을 감추며 말없이 병운을 바라보았다.

"그 꽃은 누군가의 간절함이 담긴 선물인 것 같네, 학생이 흰색 크로커스의 꽃말처럼 후회 없는 청춘을 보낼 수 있길 바라는 누군가."

느닷없이 나타난 이 늙은 남자를 경계하는 것도 잠시 아이는 병운 앞에서 결국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라도 아이의 마음이 잠시나마 편해질 수 있다면...

수십 년간 학생들과 함께 해 왔던 병운의 경험이 다행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꽃을 받았으니 이제 그 꽃말처럼 앞으로도 후회 없이 열심히 청춘을 살아내야지. 학생에게는 이미 그만한 가치가 더해졌으니."

아이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했을까 싶어 몇 마디 덧붙이려다, 이 와중에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겠나 싶어 병운은 더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이것도 오랜 교사 생활에서 얻은 지혜라면 지혜다. 병운은 몇 마디 말 대신 그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여 주었다.


옥상 저편에 불빛이 몇 개 더 밝혀졌다.

병운은 어서 아내에게 다시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에 빨간 리본 초대장을 꼭 쥐고 그는 서둘러 옥상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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