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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Nov 17. 2024

[제30화] 세상에 없는 카페_에필로그

끝, 그리고 시작

에필로그 1


- 민서 -

민서는 집에서 나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까운 친척과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특히 그녀의 엄마로부터 자립해 민서는 비로소 혼자 섰다. 여전히 자기소개서를 수정하고 채용 사이트를 전전하고 있지만 더 이상 후회 속에 머물지 않는다. 좀 더 현실과 미래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할 용기가 생겼다.

이제는 단골 떡볶이집 창가 자리에 다시 앉기도 한다. 민석과의 추억이 생각나 일부러 피했던 그 자리. 주인아주머니가 낡고 바랜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익숙한 필체와 이름. 떡볶이집 창가 한쪽 귀퉁이를 장식했던 민석이 써 붙였던 포스트잇이다.

"내가 일부러 떼어놨었어. 창가 자리 언제든 앉으라고, 그 말을 하고 싶었지."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에 민서는 감사했다.



- 도훈 -

도훈은 다이어리에 조 과장의 부정적인 면을 적어 보았다. 하나하나 적다 보니 조 과장의 부정적인 모습이, 자신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단 많지 않음에 좀 놀랐다. 그런 마음으로 또 하나씩 적다 보니 한편으로 그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도훈은 적었던 문장들을 볼펜으로 힘주어 모두 지웠다. 자신이 그를 용서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얼마간 잃었던 자존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도훈은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서영과 자주 밖에서 만난다. 더 이상 그때처럼 무심하거나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 사심 가득한 눈빛이다, 이제는.

도훈은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났던 그 눈 오던 날, 차질 없이 그가 교육 일정을 소화해 낼 수 있도록 -우연이긴 했지만- 그를 도운 미지의 조력자가 서영인 줄 아직도 모른다. 서영도 역시 마찬가지다.



- 서영 -

서영은, 카페에서 만난 그 곱슬머리 여자와 친구처럼 지낸다. 서영에게 있어 평생 잊히지 않을 그 누군가와 꼭 닮은 그녀와. 오래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주 오랜 친구처럼.

그리고 서영은 금요일마다 동료들의 책상 위에 밖에서 사 온 고급 커피를 놓아둔다. 더 이상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다.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 섞인 눈빛이 지금은 호기심과 의문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가끔 따뜻하고 호의적인 눈길을 건네기도 하니 이만하면 되었다. 그리고 서영에겐 긍정의 롤모델로 삼을 만한 영업부 곽 팀장이 있다.

아직도 가끔은 병원의 힘을 빌릴 때도 있지만 요즘 들어 자주 만나는 도훈의 사심 섞인 따뜻한 시선이 위로에 꽤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 혜주 -

혜주는 기쁜 소식이 두 개나 있다. 드디어 임신 테스트기에 선명한 두 줄을 보았고, 산부인과에서 건강한 임신이란 결과도 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악몽은 끝났다. 그리고 그렇게 고대하던 메일도 드디어 받았다.


<숲의 서재님의 원고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중략) 작가님의 원고를 출판하고 싶습니다.-임서영 팀장 드림->


익숙한 이름에 혜주의 기쁨은 훨씬 더 커졌다. 이제는 또 다른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 진희 -

진희는 이제 준우에게 어느 정도 자율성을 주고, 그의 말을 경청한다. 까칠한 사춘기 아들이지만 남편 상훈과 전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며 나름 지혜롭게 이 시기를 헤쳐 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진희는 승언을 꾸준하게 들여다보며 학교 행사나 다른 도움이 필요할 때 그의 고모 대신 그를 돕기도 한다. 승언이 처음엔 부담이 되는지 많이 불편해 보였지만 지금은 좀 나아진 것 같다. 진희는 이제 한시름 놓았다.



- 승언 -

승언은 아빠가 준 마지막 선물 덕에 마음을 다독이며 잘 지내는 중이다. 아직도 가끔 아빠와 함께했던 추억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한없이 먹먹해지기도 하지만 절망만 가득했던 그의 눈에 이젠 새롭게 펼쳐질 앞날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다.

진희 아줌마가 자꾸 연락하고 찾아와 이것저것 챙겨 준다. 어색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너무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부담도 되었는데 그럴수록 진희 아줌마가 더 미안해하는 것 같아 그녀 앞에서 불편한 기색은 최대한 감추는 중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승언은 그녀가 참 고맙다.



- 병운 -

병운은 이제 비로소 편해진 아내에게 종종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하지만 이젠 그의 얼굴에 눈물 자국보다는 부드럽고 따스한 미소가 먼저 번진다. 가끔 어디에서 크로커스 꽃을 볼 때면 그날의 신비로운 카페를 떠올리기도 한다. 묘령의 여인, 그 카페의 주인도.

병운이 플로라의 호수 끝 카페를 다시 찾았지만 카페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날의 환상이었던 것일까. 그러기엔 그의 눈앞에 지금 펼쳐진 이 보라색 천지의 크로커스 꽃들이 너무 현실적이다. 보라색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마치 그날처럼.

"여보, 거기서 잘 지내고 있는가?"

바람이 다시 한번 살랑 불어와 병운을 감쌌다.

그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정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잘 지낸다고.

이제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에필로그 2


- 18년 전 OO 병원 -


8살 민서가 엄마 손에 이끌려 병원에 들어섰다. 세상이 무너진 듯 민서의 표정에 공포가 가득하다. 가슴에 꼭 안은 애착 인형도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맥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울다 지친 제 주인의 모습과 영락없이 닮았다.

"민서야, 괜찮아. 주사 안 맞을 거야. 오빠가 옆에 있을게."

옆에 선 민석이 그녀를 다독였다. 집 앞 개인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았지만 2주 동안 기침이 떨어지지 않아 엄마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큰 병원을 찾았다. 민서와 민석이 태어난 이곳은 항상 인산인해라 접수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 빈 대기석에 아이들을 앉혀두고 한참을 기다려 접수를 했다. 접수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소아과 진료실 앞 상황은 더 심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여기서 오빠랑 놀고 있다가 차례 오면 엄마가 데리러 올게. 민석이 동생 잘 볼 수 있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 민서를 위해 진료실 근처 놀이방에 데려다주며 엄마가 말했다. 그곳 역시 진료를 기다리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약 없이 급하게 대학 병원에 오면 각오해야 할 일. 기다림의 시작이다. 그나마 소아과 옆엔 이런 놀이방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서영은, 놀이방에 들어와서도 서러워 울음을 반복하는 아이를 보았다. 다른 장소였다면 세상 즐거웠을 이 놀이방이 대학 병원 안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그것은 서영도 마찬가지. 눈앞의 이 흥미로운 모든 것들을 제치고 공포에 눌린 민서의 표정이 꼭 제 마음 같아 서영도 따라 울고 싶었다.

서영의 그렁그렁한 눈이 햇살을 받은 이슬처럼 반짝였다. 민석은 자꾸만 그 큰 눈이 신경 쓰였다. 결국 그가 민서의 손을 잡고 서영에게로 갔다.

"너도 주사 무서워하는구나? 괜찮아, 우리랑 같이 놀자."

서영과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민석이 꼭 어른처럼 말했다. 자신처럼 눈물이 주렁주렁 달린 서영을 보며 동질감에선지 연민 때문인지 민서는 눈물을 멈추고 서영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민석이 자신의 옷소매로 민서와 서영의 눈가를 차례로 닦아주었다. 햇살 아래 눈부시게 일어난, 민석과 민서의 저 곱슬머리가 서영은 오래도록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서영의 엄마가 그녀를 데리러 올 때까지 셋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울음기 사라졌던 민서와 서영의 얼굴에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서렸다. 금방이라도 다시 꺼억꺼억 울음을 토할 것만 같다. 제 엄마 손에 이끌려 놀이방을 나서는 서영이 서운함을 달래지 못하고 눈물이 글썽하여 다시 민석을 돌아보았다. 민석도 그 시간이 못내 아쉬워 서영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번엔 민석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그냥 발목을 삐끗했을 뿐인데 동네 작은 정형외과를 가도 될 걸 이렇게 큰 병원에 데려온 엄마가 도훈은 참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집 근처 병원에 갔으면 벌써 끝났을 일인데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겨우 이제 첫 진료를 마친 참이다. 사진 찍고 뭐 하고 또 기다림의 연속일 것 같아 그는 짜증이 났다.

"지금 시간엔 동네 병원에 갔어도 사람 많아. 거기도 밀리면 한 시간은 기본이야."

도훈의 엄마가 아들의 불편한 표정을 읽었는지 변명처럼 내뱉었다. 발목 촬영을 위해 그녀가 다시 접수, 수납을 하는 동안 도훈은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땅에 떨어진 낡은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낡고 볼품없는 인형이었지만 분명 버리고 간 것은 아니라 확신했다.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인형을 주워 들었다. 어떻게 주인을 찾아주어야 할지, 구체적인 생각도 없었다.

"도훈아, 가자. 빨리 움직여야 돼."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도훈은 무작정 인형을 들고 화장실을 먼저 찾았다. 화장실까지 꽤 먼 거리를 걸었던 것 같은데 도착 훨씬 전부터 어디선가 계속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는 화장실이 가까워 올수록 점점 더 커졌다. 화장실 앞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민서가 제 엄마와 오빠의 달래는 말에도 꿈쩍하지 않고 세찬 울음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내 인형 줘, 내 인형, 내 바니 어디 있는데? 내 바니 찾아 주라고!"

"저, 혹시 얘 이름이 바니일까? 찾고 있는 게 이 인형이니?"

맥락을 듣자 하니 혹시 자신이 들고 있는 이 낡은 인형이 아이가 잃어버린 바니가 아닐까 싶어 도훈이 물었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학생, 정말 고마워요."

민서 엄마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도훈이 환히 웃으며 목례를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밖으로 나온 도훈의 손을 민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살포시 잡았다.

"내 바니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일부러 기다렸다 인사를 건네는 어린 민서 덕에 그는 아까의 짜증스러운 마음이 말끔히 가시는 듯싶었다. 맑은 눈으로 도훈을 올려다보며 제 진심을 전하는 이 꼬마 아가씨가 그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대기 번호 147번.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며 혜주는, 이 바늘이란 것에는 평생 적응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는 중이다. 특히 피검사 때 사용하는 저 바늘은 일반 주사 바늘보다 육안으로만 봐도 확연히 더 두껍다. 두렵다.

"피검사라는 게 참 해도 해도 그때마다 새롭죠. 적응이 안 돼요, 적응이. 그렇죠?"

147번. 초조한 나머지 대기 번호표를 떨어뜨린 줄도 모른 혜주에 병운이 번호표를 주워 주며 말을 건넸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아내가 아파서 수술을 몇 번 했거든요. 그때 사용되는 바늘은 이것보다 더 굵더라고요. 그렇게 아파지기 전에 미리 병을 예방하는 차원이라 생각하면 이 피검사 정도는 견딜 만해질 거예요. 눈 한 번 딱 감으면 별것 아니잖아요, 이까짓 바늘쯤이야. 그만 어깨 펴요, 세상이 망한 것도 아닌데."

말하는 이의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혜주의 나대던 심장이 얼마간 제 패턴을 찾는 것도 같았다.

"147번 환자분 들어오세요."

올 것이 왔다. 혜주가 벌떡 일어나 검사실 안으로 들어가다 병운을 돌아보았다. 따뜻하지만 서글픈 그의 미소가 애잔했다.



퇴원 수속을 마친 병운이, 힘든 검사와 치료를 마친 아내와 함께 병원 지하 카페에 들렀다. 정애는 에스프레소 함량이 높은 진한 라테를 먹고 싶어 했지만 병운은 그녀를 위해 저당 곡물 라테를 주문했다.

"저기, 잠깐만요!"

주문한 곡물 라테를 받아 들고 얼마쯤 걸어가는데 뒤에서 다급히 뛰어오며 부르는 소리가 난다. 혜주가 숨을 고르며 병운에게 테이크아웃 컵을 하나 내밀었다.

"아까 검사실 앞에서 감사했습니다. 보니까 하나만 주문하시길래 가시면서 드시라고 하나 더 주문했어요."

병운은 무심결에 손을 내밀어 컵을 받아 들었다. 트인 공간을 비집고 달콤 새콤한 향이 소르르 새어 나왔다. 당근이 섞인 과일 주스인 것 같다.

"아니, 괜찮은데. 운전하면서는 잘 먹지 않아서요."

병운은 무심코 받아 든 컵을 보며 머쓱해져 말했다.

"아내분과 같이 고생하셨을 텐데 천천히 에너지 보충하시면서 안전 운전하세요."


병운이 주행 중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까 혜주가 건네준 과일 주스를 먹다 흘리는 바람에 나온 조건 반사적 행동이었다. 심한 급브레이크도 아니고, 살짝 밟았다 만 것이었는데 뒤따르던 흰색 차량이 상향등을 깜박이고 경적을 울리며 위협했다. 병운이 그 차를 피해 가장자리 차선으로 이동했다. 비상등을 켜고 잠깐 차를 세웠다. 정애의 상태를 살피고, 흘린 주스를 물티슈로 닦았다.

"몇 모금 안 남았죠? 이왕 섰으니 그냥 다 마시고 운전해요."

"그게 좋겠지? 얼마 안 남았어."

그렇게 병운은 잠시 앉아 남은 과일 주스를 다 마셨다. 그리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뒤이어 곧 경찰차도 병운의 차 옆을 쌩 지나쳐 갔다. 바쁘게 점멸하는 경광등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병운이 조심스럽게 다시 액셀을 밟았다. 얼마쯤 갔을까. 앞쪽 도로가 어수선했다. 병운은 경찰의 안내에 따라 1차선으로 조심히 서행했다. 사이렌 소리는 꺼졌으나 여전히 깜빡이는 경광등 너머로 꽤 여러 대의 차량이 서로 엉켜 있었다. 차량은 심하게 파손되었고, 그 잔해들은 사고의 심각성을 보여주듯 사방에 널브러졌다. 병운은 똑똑히 보았다. 좀 전에 그를 위협했던 그 흰색 차량이 트럭과 SUV 사이에 끼어 처참히 망가진 모습을. 병운은 놀란 정애를 다독이며 그곳을 지났다.

"천만다행이에요, 여보. 이 주스를 흘린 게 오히려 다행가 싶네요. 저기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야 할 텐데요."

정애가 안도와 우려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병운은 한 손으로 비어있는 그 컵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굳이 뛰어와 그에게 과일 주스를 건넨 혜주를 생각했다. 정애를 보니 혜주가 고마워 병운은 눈물이 핑 돌았다.



진희는 진료실을 나와 대기석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비임신입니다. 아직 젊으니 꼭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다음 시술 다시 상의해 봅시다."

Rh-O형인 진희는, 그것과 상관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첫 번째 유산 후, 면역글로불린 주사를 제때 맞지 못한 것이 내내 걸렸다. 동네 작은 산부인과의 무지한 의사를 탓하면 무엇하랴.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진희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애타게 아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도. 바로 그때 긴급한 방송이 울렸다. 병원 내 사용할 수 있는 Rh- 혈액이 부족하니 긴급 헌혈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Rh-라는 소리에 잠시 정신이 들었지만 이기적이게도, 실의에 빠진 제 상황이 낙담스러워 다른 사람을 도울 생각은 선뜻 들지 않았다.

2분여 만에 Rh- 관련 응급 방송이 다시 한번 온 병원에 울려 퍼졌다. 혈액이 부족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인 것 같았다. 진희는 정신을 가다듬고 벌떡 일어섰다.

"응급 수혈실은 본관 2층이에요. 저쪽 코너 돌아서 한 층만 내려가시면 됩니다."

진희가 가려는 곳을 어찌 알고 한 간호사가 긴박함 속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은 어조로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진희가 그녀에게 목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진희가 뛰다시피 해 저쪽 코너로 사라질 때까지 지운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철에 피곤한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대했던 임신 소식도 없었고, 예상에 없던 헌혈까지 한 상황이라 진희는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다. 하지만 한 간호사의 말이 떠올라 이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큰일 하셨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살리셨으니까요, 그것도 둘이나요."

이번에도 기다리던 임신 소식은 없었지만 오늘 자신이, 한 엄마와 아기의 생명을 살렸다고 하니 진희는 마음이 벅찼다. 다음번에는 분명 좋은 소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좀 더 선명한 예감이 들었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릴 때마다 수술실 안팎으로 분주한 의료진들을 보며 영준은 가슴이 뻐근해졌다. 저 안에 만삭인 아내가 누워있다.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이 도무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끝내 영준은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긴급 방송을 들어야 했다. 절대 아니길 바라면서도 저 Rh- 혈액이 분명 자신의 아내에게 필요한 것임을 영준은 비통한 심정으로 직감했다. 몇 번의 방송이 더 이어졌다. 아직 헌혈을 해 준 이가 없다는 뜻이다. 다급한 상황에 반해 상대적으로 침착한 방송 목소리가 원망스러워 영준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위급한 상황을 알리며 소리라도 양껏 질러주어야 하지 않는가.

이후 한 차례 더 들렸고 더 이상의 방송은 없었다. 헌혈자가 나타났거나, 아니면...

얼마 후 수술실 문이 열릴 때까지 영준은 영겁의 시간을 견딘 것 같다. 의사인지 간호사인지 한 의료인이, 아내가 다행히 제때 수혈을 받아 안정적으로 수술을 마쳐간다는 소식을 영준에게 전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두려움에 초조해하던 그를 생각해 미리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영준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 후 영준은 수술실 밖에서 무사히 아내와 승언을 만났다.



아주 사소한 인연에서 깊은 인연까지 사람들은 모두 크고 작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연의 끈이 얇아져 흔적만 남는다 해도 언젠가는 그 인연이 운명처럼 그들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지 모른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살 만해질 것을.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들과의 만남, 그들 사이의 모든 관계는 그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소중한 것이다.





에필로그 3


- 1804년, 순조 4년. 4월, 강원도 삼척 -


그날은 달빛도 별빛도 하나 없는 흑암의 밤이었다.

사사삭...

사르르르...

모두 잠든 고요한 밤, 세찬 바람에 마른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와 풀숲 벌레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적막을 깼다. 강풍이 산과 마을을 훑는 소리가 스산하고 으스스하기가 이를 데 없다.


민가 너머 저쪽 산 어귀에서 자그마하게 반짝이던 것이 용의 불길에 휩싸인 듯 순식간에 산을 집어삼켰다. 화염이 창천하니 그 칠흑 같던 밤이 일순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고독한 정적을 깨고 마을 안팎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사방팔방 동분서주 아무리 애를 써도 화마를 이길 재주가 없으니 이곳이 흡사 전쟁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시무시한 불길이 민가를 덮친 것도 찰나였다. 짚으로 엮어진 지붕에 불똥이 튀었을 뿐인데 집 전체가 삽시간에 다 타버리니 물을 길어 불을 끄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 그나마 불길을 막겠다고 지붕의 짚을 뜯어내 보아도 다가온 화마 속에 세간살이가 남아날 리 없다. 인근 농경지와 가축의 해 또한 심중했으나 그래도 일가족 질긴 목숨 지켜 낸 가호가 있다면 크나큰 행운인 것을.

밤이 이슥하여 깨어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인명 손실도 면할 수 없었으니 저기 산자락 아래 유독 더 남루한 저 초가집이 그 집인가 보구나. 지붕을 타고 내려온 불길이 문을 막고 섰으니 저 안에 일곱 명의 일가에게 닥친 비운을 어찌하란 말인가.



그 집 부부가 쿨럭쿨럭 기침을 내며 잠든 노모를 깨우고, 옆 칸에 자고 있던 장녀가 잠결에 숨이 막혀 컥컥하다가 그 어미, 아비의 외침에 깨어 보니 온 세상이 시뻘건 빛이로구나. 이곳이 지옥도인가. 스멀스멀 자꾸만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붙잡고 옆에 자던 동생들을 깨우는데 둘은 이미 서쪽 강을 건너 미동이 없고, 나머지 하나는 가늘게나마 아직 숨이 붙어 있다. 그 하나라도 깨워 함께 벗어나려는데 이미 정신 놓은 누이동생의 몸이 하도 무거워 데리고 나갈 길이 막막하구나.

그 사이, 옆 칸에서 들리던 어미, 아비의 외침은 잦아들고, 장녀마저 이제 더는 검붉은 연기에 숨 들이켤 방도가 없는데 이게 마지막인가 싶어도 제 혼자 나갈 생각은 않는다. 제 살 타는 줄도 모르고, 간신히 숨이 붙어 있던 동생을 안고서 저고리 소매를 끌어다 그 입과 코를 막아주니, 심성이 제 아비를 똑 닮아 부처님 마음이라.

일가족이 처참히 타 죽는데 밖에서도 도와줄 재간이 없어 꺼억꺼억 애간장 끓는 소리만 요란하다. 평소 일가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벗과 같던 주변 초목마저 애통함에 겨운 듯 제 몸을 활활 태우니 그 슬픔이 천붕지통이라 지나던 새들도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검은 연기 속 괴로운 날갯짓을 해대는구나.





플로라의 카페는 사라졌지만 인연이 운명처럼 만날 때 또 다른 이름으로 다시 찾아올지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그곳에 가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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