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의 마지막 말을 승언은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어쩌면 앞으로 승언이 살아갈 힘을 그 말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내 잘못이 아니야.'
그날 아침 영준과 승언의 갈등이 없었더라도, 영준이 통근 버스를 놓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야. 맞아, 내 잘못이야...'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승언은 영준이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았다. 거칠고 마른 목소리로 영준의 마지막 말을 되뇌고 또 되뇌어 보았다. 그런다고 침통한 마음이 위로될 리 없었다.
승언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병원 옥상 저편, 하나둘씩 불을 밝히는 저곳은 승언의 마음과는 달리 고요하고 따스해 보였다.
휙ㅡ
승언의 가슴을 후벼 파듯 소소리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가슴속 회한도 이 바람에 실어 다음 계절로 보내버릴 수 있다면. 좀 더 묵혀 둔 회한은 그 비통함도 무뎌져 퇴색될 수 있을까. 그럼 승언도 조금 평안해질 수 있을까.
"이곳에서 바라보는 저 불빛을 좋아했다네."
홀연히 들려온 목소리에 짐짓 놀란 승언이 뒤를 돌아보았다. 60대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소 가쁜 숨을 고르며 승언에게로 왔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가끔 여기 올라와 하나씩 밝혀지는 불빛을 세고는 했지. 저 불빛이 마치 희망인 것 같다면서. 곧 어둠이 내릴 테니 더 많은 불들이 들어오겠군."
난데없이 나타나 주어도 빠지고, 맥락도 무시한 이런 말들을 쏟아 놓는 이 늙은 남자가 승언은 못마땅했다. 제 마음이 지금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속인데 무슨 불빛 타령인가.
"이 밤이 끝나면 불빛도 다 꺼질 거예요."
순간 못된 마음이 들어 승언은 속엣말을 내뱉고 말았다. 암울한 제 마음을 그에게 쏘아붙이기라도 하는 듯.
"그럼 어떤가, 저 빛들은 내일 또다시 밝혀질 텐데. 희망은 가끔 의기소침해 숨기는 해도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네."
제 슬픔에 못 이겨 순간 뱉어낸 말에 승언은 마음이 불편하고 언짢았다. 남자는 괜찮다는 듯 온화한 목소리로 승언을 다독였다.
"아, 내 아내 이야기일세. 내 아내가 여기서 저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거든, 학생처럼."
승언의 복잡한 표정을 보고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남자가 덧붙였다.
"말씀이 계속 과거형이시네요. 그럼 아내분은..."
"지금은 저 아래 병상에 있지. 입원실에."
승언은 어두워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불빛 속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보러 올 수가 없어. 그때부터 나도 이곳에 오지 않았지. 누가 가보래서 올라왔는데 학생 뒷모습이 하도 슬퍼 보여서, 내 모습 같기도 하고. 그냥 돌아서 갈 수가 있어야지."
남자가 손에 든 흰 꽃을 내려다보다 말을 이었다.
"왜 나에게 보라색이 아니라 이 흰색 꽃을 주고, 옥상으로 가보라 했는지 이제 알겠군."
"네?"
제 슬픔이 너무 커 대화를 이어갈 기력조차 없던 승언이 남자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가 인자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건 아무래도 학생 것인 것 같은데? 자, 받게나."
승언은 얼결에 꽃을 받아 들고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 꽃을 혹시 아나?"
"아니요, 처음 보는 꽃이에요."
"크로커스라는 꽃인데 이 흰색의 꽃말이 후회 없는 청춘이라더군."
"... "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따스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승언은 울음을 삼켰다.
"그 꽃은 누군가의 간절함이 담긴 선물인 것 같네, 학생이 흰색 크로커스의 꽃말처럼 후회 없는 청춘을 보낼 수 있길 바라는 누군가."
그의 말을 듣고 승언은 그 누군가가 마치 영준처럼 느껴져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참지 말고 다 쏟아내게."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승언은 낯선 사람 앞에서 실컷 목놓아 울었다. 남자의 말대로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잠시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꽃을 받았으니 이제 그 꽃말처럼 앞으로도 후회 없이 열심히 청춘을 살아내야지. 학생에게는 이미 그만한 가치가 더해졌으니."
남자는 승언의 어깨를 감싸듯 토닥여 주었다.
승언이 벌게진 눈을 다시 한번 쓱 훔쳤다.
승언은, 심신이 녹초가 되어 주저앉아 있는 동안 내내 그의 옆을 떠나지 못했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절대 좁혀지지 않을 딱 그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림자처럼 있어 주었던 그녀. 목발 짚은 남학생의 엄마. 그녀는 승언에게 와서 괜찮냐는 말 한마디 감히 건네지 못했다. 어깨 한 번,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했다. 승언의 주변에서 죄인처럼 무거운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때때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남몰래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승언은, 영준이 목발 짚은 남학생을 구하다 희생된 것을 알고 난 직후 그녀도, 그녀의 아들도 지독히 원망스러웠다.
그날 아빠가 한 말에 그냥 수긍했다면 아빠는 제시간에 그 길을 내려가 통근 버스를 탔을까, 그랬다면 승언에게 전화를 거느라 멈춰 서지 않아도 되었을까. 승언은 이런 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다가 종국엔 목발 짚은 아이에게로 화살을 돌리고 만다. 그 아이를 희생양 삼아 책임을 전가하면 그나마 숨이 좀 쉬어질 만했던 것이었나. 하지만 이것이 괜한 사람을 트집 잡아 비난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승언은 알고 있다. 단지 남에게로 탓을 돌리는 것이 그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는 비겁한 방법이었다는 것도.
승언은 영준의 장례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이 오르막길을 다 오르고 나면 승언의 집이 나온다. 항상 걷던 길인 것을, 오늘은 이 길이 유난히도 험하게 느껴져 승언은 눈물이 났다. 오늘따라 유별나게 다리가 더 아픈 것 같아 또 눈물이 났다. 허전하고 쓸쓸하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공허함이 그를 괴롭혔다.
공동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려다 승언은 습관적으로 우편함에 손을 뻗었다. 가득한 종이 뭉치들.
<박. 영. 준.>
영준의 이름이 적힌 우편물들을 보며 승언은 또 한 번 오열했다. 깨려야 깰 수 없는 악몽인 것 같았다. 그렇게 주저앉아 끔찍한 꿈속을 헤매다 그 종이 뭉치들 사이에서 승언의 이름이 적힌 빨간 리본 봉투를 발견했다. 보내는 사람 정보도 없고, 소인도 찍히지 않은 이상한 우편물.
<당신의 후회 없는 청춘을 위해 플로라의 카페로 초대합니다. 종로구 숲 속길 플로라의 호수 끝으로 오세요. 당신을 꼭 기다리겠습니다.>
보낸 사람의 정보가 없는 우편물이라 그냥 반송함에 넣으려다 자신의 이름이 정확하게 적힌 것을 보고 승언은 고민했다. 아까 병원 옥상에서도 그렇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니 진짜 꿈속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정말 꿈이라면, 깨고 나면 영준이 옆에 있지 않을까.
승언은 다시 아빠 생각에 목이 메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간 리본 봉투를 반송함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혹시 아빠가...'
승언은 오늘 있었던 뭔가 부조화한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문득 이 모든 것이 영준이 승언에게 보내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빠...
승언이 플로라의 호수에 다다랐다. 그의 손에는 빨간 리본 봉투가 들려있다. 승언은 이 초대장이 아빠의 선물인 것만 같아 좁은 오솔길을 걷는 내내 심장이 요동쳤다. 마치 아빠를 다시 만나러 가는 것처럼.
저 멀리 빨간색 문을 가진 자그마한 카페가 보였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걸음에 도착한 카페 정원에는 아주 익숙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크,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꽃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면 어떠하랴, 흰색의 저 소담스러운 꽃들의 꽃말이 후회 없는 청춘이라 했던가.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모두 승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영준이 주는 선물인 것 같아 승언은 이 모든 것이 소중히 여겨졌다.
따뜻해 보이는 빨간색 문을 열었다. 돌연 소슬한 바람이 불어왔다. 묵직한 풍경 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운이 반갑게 승언을 맞았다.
"아, 그때 응급실에서..."
"이렇게 얼굴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마음의 문 걸어 잠그고 안 오면 어쩌나 했어요."
지운이 비어있는 자리로 승언을 안내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간호사가-그 때는 그녀가 간호사라 확신했다- 지금은 카페 주인의 모습으로 승언의 눈앞에 서 있다.
"승언 학생, 오느라 고생했는데 기분 전환이 될 메뉴 어때요?"
지운이 메뉴판을 승언에게 내밀었다. 승언은 그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은근한 긴장감과 부담감이 느껴져 얼른 메뉴판을 받아 들고 고르는 척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메뉴판이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메뉴판 위 메뉴는 달랑 하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럴 거면 메뉴판은 굳이 뭐 하러 건넸는지 모르겠다
"승언 학생을 위한 디저트, 메모리얼 마카롱 금방 가져올게요. 따뜻하게 데운 우유 괜찮죠?"
"네."
지운의 포근한 미소에 승언의 얼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낯선 시선에 부담을 느낀 승언을 인식해서인지 먼저 온 다른 손님들이 시선을 거두고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운이 승언의 맞춤 디저트를 가지고 나왔다. 예쁜 파스텔 톤의 그림 같은 마카롱이 승언의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마치 색색의 호빵 같아서 만지면 폭신폭신, 반을 가르면 달콤한 팥 냄새와 함께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것 같다. 승언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마카롱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승언이 먹어보았던 그 어떤 마카롱보다 부드럽고 쫀득했다. 영준은 마카롱 같은 디저트보다는 약과를 더 좋아했고, 호빵을 더 즐겨 찾았는데 이 마카롱을 한 입 베어무니 이상하게도 승언은 아빠 생각이 났다.
"메뉴판에 메뉴가 달랑 하나여도 후회 없는 선택이죠?"
승언의 표정을 읽은 지운이, 디저트에 대한 평가는 이미 보장받았다는 듯 여유 있게 물었다.
"메모리얼 마카롱이라 했었나요? 이 디저트 이름이?"
"맞아요.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뜻이죠. 추모의 의미도 담고 있답니다."
이 신기한 마카롱은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아빠와의 행복했던 기억이 한 움큼씩 떠올랐다. 이젠 함께 할 수 없다는 슬픔보다는 그 두터운 추억이 따스한 위로가 되어 마음 깊숙이 자리했다. 그 소중한 기억들을 되새기며 천천히 먹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승언은 마카롱 하나를 벌써 다 먹어버렸다.
"마카롱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이 카페를 나서는 순간, 이 마카롱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겠지만요."
지운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승언에게 또 다른 마카롱을 권했다. 승언이 두 번째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너무 놀라 승언은 손에 든 마카롱을 놓칠 뻔했다. 마치 구름 같은 옅은 연기 속에서 오래전 여의었던 엄마를 보았던 것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분명 엄마였다. 하도 오래전이라 승언은 엄마의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기 속의 그녀가 엄마임을 확신했다. 그녀는 승언이 어렸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말없이 승언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승언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에게 안기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행여 흩어지는 연기와 함께 그녀가 사라질까 두려웠다. 어렸을 때의 일이라 막연한 그리움일 뿐, 엄마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었는데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승언은 소중한 시간 속에서 그녀와 함께 했다.
승언의 마음을 차갑게 얼렸던 응어리들이 거짓말처럼 녹기 시작했다. 막막하고 암울하기만 할 것 같던 앞으로의 삶에 조금씩 빛이 드는 것 같았다.
참 신비로운 곳이구나, 여기는.
"당신만을 위한 디저트는 마음에 드셨나요?"
옅은 연기가 사라지고 눈앞에 다시 지운이 서 있다.
"제가 먹어 본 디저트 중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디저트입니다."
승언이 전보다 밝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손님은 또 어떤 아픔으로, 어떤 인연으로 이 카페에 초대된 것인지 은근히 궁금해하는 다른 손님들 사이로 아까부터 무거운 시선이 하나 느껴졌다. 승언은 그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응급실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승언의 곁에 죄인처럼 머물던 그녀. 승언이 카페에 들어왔을 때 진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져 보이는 아이에게 이젠 괜찮냐고 물어야 하나,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뒤늦게나마 손이라도 잡아주어야 하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의미도 흔적도 없이 이내 사라져 버릴, 힘내라는 말을 이제라도 해 주어야 하나. 승언을 보는 진희의 마음은 아직도 어둡기만 했다.
"장례식장에 오셨었죠?"
진희의 암울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승언이 진희에게 먼저 말을 건네었다. 진희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죄인처럼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알아요."
"미안해, 학생. 그래도 내가 너무 미안해요. 내가 그날 우리 애를 차로 태워다만 줬어도..."
승언의 말에 진희가 울음을 삼키며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날 제가 아빠랑 통화만 하지 않았더라도 아빠는 통근 버스를 타셨을 텐데 그럼 제 잘못인 거죠. 아빠의 마지막 유언이 제 잘못이 아니라는 말씀이었어요. 평생 가슴에 시커먼 멍울을 떠안고 살아갈 저를 위해 남긴 귀중한 유산이었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나이에 맞지 않게 많은 것을 꿰뚫는 듯한 그의 말에 카페 손님들도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저 이제 괜찮아요. 괜찮냐고 묻고 싶으셨던 것 아니에요?"
승언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원망도 했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원망하지 않으니 용서할 것도 없어요. 이제 죄인처럼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아빠도 그걸 원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