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이 다시 고요해졌다. 진희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진희의 간절한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준우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지만 의사는 증상 관찰을 위해 병원에 좀 더 머물라고 했다. "초기 검사에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증상이 후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볼게요." 준우는 빨리 병원을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의사의 말에 토를 달진 않았다. "몇 시간 더 지켜보다가 오후에 퇴원하시면 됩니다. 집에 돌아가서도 계속 유심히 관찰해 주세요. 혹시라도 두통이 지속되거나 이유 없이 구토 증상이 생기면 바로 내원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의사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상훈은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진희를 다그쳤다. "당신 기분 나쁘다고 목발 짚는 애를 그냥 혼자 보냈어? 제정신이야?" 그럼 그렇지. 왜 한소리 안 하나 했다. 아들의 상태가 양호한 것을 확인했으니 그다음은 진희를 탓할 차례였다.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자책하며 이미 충분히 스스로를 비난하고 원망했건만 그것으로는 부족한 것일 테지. 평소 같으면 맞받아치며 쏘아붙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희는 그의 말을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벌을 받듯. 그렇게라도 면죄부를 살 수 있다면야.
준우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버거운 무언가를 놓아버리듯 묵직한 한숨을 한 번씩 내뱉기도 했다. 진희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굵은 물방울을 몰래 훔쳐내기도 했으니까. 준우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워진 저쪽 침대를 보고 있자니 그녀는 가슴 한편이 시큰거려 왔다. 쉬이 나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울다 지친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감히 다가가 위로조차 해줄 수 없었다, 진희는. 상훈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사강역 사거리에서 트럭사고가 있었고, 그 한복판에 준우가 있었다는 사실 말고는. 긴박하고 소요스러웠던 응급실이 다시 조용해지고 나서야 그는 여기 도착했다.
속이 꽉 막힌 듯하여 한 손으로 가슴을 툭툭 치며 진희는 밖으로 나왔다. 그 꽃이 다시 보고 싶었다. 꽃들 앞에서 간호사가 했던 그 마지막 말이 거듭 간절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봄꽃이 화려한 그 정원 앞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진희는 무엇에 끌리듯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시 오실 줄 알았어요." 그때 그 친절한 간호사가 웃으며 진희를 반겼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유가 없어 대답도 않고 그냥 들어갔었네요." "정신없으셨잖아요, 괜찮습니다." 간호사가 친근한 미소로 답했다.
"아까 하신 말씀..." 진희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망설이다 다시 물었다. "아참, 응급실 간호사이시죠? 바쁘지 않으세요? 제가 괜히 바쁜 시간을..." "전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인 걸요." "네?"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어요." 간호사가 의아해하는 진희를 보며 온화한 얼굴로 답했다. "준우가 응급실에 있다고 전화해 주신 분도 간호사님이죠?" "네. 놀라실까 봐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급히 전화를 끊으셨어요." "그때는 뒷말을 듣기가 아마 두려웠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까 저한테 하신 말씀 있잖아요." "진희 씨 잘못이 아니라는 말요?" "아까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는데 제 이름을 어떻게...?" "남편 분이 하시는 말씀 중에 듣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당신의 존재가 그만큼 특별하거나요." 진희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돌이켜 보니 이 간호사는 준우 이름도 알고 전화를 했다. 준우 이름이야 가방 안에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있었다 치더라도 진희의 이름은? 남편은 진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진희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별거 아니에요." "저는 이제 가봐야 해서요." "아, 제가 간호사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죠? 죄송해요." 간호사는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진희 씨 잘못이 아니었어요." 멀어져 가던 간호사의 목소리가 크로커스 향을 타고 부드럽게 날아들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아 진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 몇 마리가 일렬로 구름 사이를 날고 있었다. 날개를 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진희는 눈을 떼지 못했다. 날갯짓 한 번 없이 바람을 타고 활공하는 그 모습을 좇다가 진희도 잠시 그 자유로움에 무거운 마음을 맡겼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더 덜어내려는 듯 깊은 한숨도 함께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녀 바로 앞쪽 크로커스 꽃들 사이로 보이는 빨간색 리본 봉투. 진희는 뭔가에 끌리듯 망설임 없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우. 진. 희.> 진희의 이름이 정확하게 적힌 봉투를 열어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그녀는 그 안의 초대장을 가슴에 안고 간호사가 사라진 쪽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진희는 응급실 앞 정원에서 빨간 리본 봉투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뭔가에 홀리듯 작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그 길에 발자국들이 없었다면 그것이 길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진희는 누가 준 것인지 모르는 초대장에 망설임 없이 응한 자신이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플로라의 호수 끝 오솔길로 접어들고 오래지 않아서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먼발치에 정말 카페가 있었다. 그 앞에는 작은 정원도 있었는데 숲과 연결되어 마치 거대한 수목원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정원에 가득한 꽃들의 화려한 색채와 바람에 살랑이는 우아한 몸짓에 진희는 넋을 놓았다
빨간색 문을 열자 풍경이 잔잔하게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찰랑찰랑 넘치듯 차올랐던 마음의 짐이 얼마간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카페이니 으레 그러려니 하고 들어섰는데 커피향보다 과일향이 나는 것 같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카페에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한쪽 벽 책장의 잘 정리된 책들이 찬찬한 진희 감성에 딱 들어맞았다. "어서 오세요, 진희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카페 주인 지운이 따뜻하게 진희를 환영했다. "어머, 간호사님?" 진희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우선 이쪽으로 앉으세요." 지운이 차분한 미소로 그녀를 자리로 안내하며 메뉴판을 건네었다. "아, 메뉴부터 시켜야 하는군요. 그런데..." 진희가 멋쩍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메뉴가 하나뿐인 것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지운을 올려다보았다. "왜 메뉴가 달랑 하나냐고요? 오직 당신만을 위한 메뉴이니까요." "사프란 크로커스 티? 그럼 이 차가 저를 위한 메뉴인 거예요?" "그럼요. 한번 맛보시겠어요?" "네, 카페에 왔으니 주문은 해야죠." 진희가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지운이 환한 웃음으로 답하며 카페 안쪽 문으로 들어갔다. 지운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진희가 다시 한 번 찬찬히 카페를 둘러보았다.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은 모두 남남인 듯했는데 -심지어 한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그렇다고 또 완전히 서로 모르는 사이 같지는 않았다. 말로는 뭐라 다 표현하기 어려운, 낯설지만 친숙한 이 느낌이 진희는 싫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아주 오랜만에 우연히 다시 꺼내보는 느낌이랄까. 제목도 내용도 읽었던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꼭 처음 접하는 것 같은데 여기저기 붙은 메모지와 밑줄, 거기에 익숙한 글씨체까지, 생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친숙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다 카페 손님 중 한 젊은 여자(민서)와 눈이 마추졌다. 그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따뜻하게 진희에게 눈인사를 전했다. "사프란을 이용해 만든 차예요. 향기가 꽤 괜찮죠?" 그때 지운이 진희가 주문한 차를 들고 와 말을 건넸다.
"향기가 정말 좋네요. 그럼 이 차가 그때 병원 앞에서 본 그 크로커스 꽃으로 만든 차인가요?" "아, 그건 일반 크로커스 꽃이라 거의 관상용이고, 이건 사프란 크로커스를 이용한 차예요. 같은 과 꽃이지만 피는 계절, 꽃말 모두 다르답니다. 이 사프란 크로커스는 주로 가을에 피어요. 꽃의 암술대를 건조해서 만든 향신료를 넣은 차인데 천천히 음미해 보세요." 가지고 나온 차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로 지운이 말했다. "일반 크로커스가 은은하고 감미롭다면 사프란 크로커스의 향기는 훨씬 진하고 깊죠. 그래서 향신료로 만들어 쓰기도 하는데 이게 상당히 고가입니다. 오늘은 제가 진희 씨께 선물하는 거예요." "어머, 정말요? 감사합니다. 간호사님, 아니..." "지운이에요. 제 이름이요. 플로라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지운이 싱긋 웃어 보였다. "사프란 크로커스의 꽃말은 기쁨과 행복을 담고 있어요. 비싼 향신료를 넣었다는 것보다 오늘 진희 씨께 제가 꼭 선물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꽃말이었답니다." "고마워요, 플로라님." "사프란 크로커스는 항산화 효과도 있고, 우울한 기분을 완화시킬 수 있는 성분도 들어있어요. 아, 그리고 포만감을 증가시켜서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겠죠?" "어머, 그럼 그분이 아니라 그 차는 제가 먹어야 했던 건데요, 바꿔주세요." 이때 갑자기 손님 중 명이 끼어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지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혜주였다. 지운의 따뜻한 배려에 눈가가 촉촉해졌던 진희가 눈물을 걷어내며 그들과 함께 웃었다. "선물이 또 하나 있어요. 여기요." 언제 들고 왔는지 지운의 손에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어? 휴남동 서점이네요." 진희가 반갑게 말했다. "이 책을 아세요?" "제가 읽은 건 아니고 지인한테 잠깐 들었던 적이 있어요." "다른 책을 찾아드려야 하나 했는데 아직 읽기 전이시라니 다행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 책 속에 다 들어있네요. 커피, 카페, 동네 서점, 책, 그리고 사람들." 진희가 책을 받아 들고 뒤쪽 책 소개를 꼼꼼히 읽고 말했다. "한 동네 서점에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요. 서로 다른 이유의 아픔이 있지만 그 상처들이 결국 하나로 모여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며 회복하게 된다는 내용이에요. 이 휴남동 동네 책방처럼 이곳이 여러분께 그런 힐링 공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책, 서점이라는 말에 손님 중 한 명(서영)이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다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고가의 향신료 차에 이어 책 선물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진희가 지운을 향해 환히 웃었다.
그때 카페 문이 조금 열리는가 싶더니 무거운 바람을 타고 침울한 종소리가 울렸다. 분명 아까는 밝고 청아한 풍경 소리였던 것 같은데... 열린 문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일순간 진희의 얼굴에 슬픈 어둠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