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운은 자신에게 흰색 크로커스 꽃을 건네준 이름 모를 그 간호사를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보라색 크로커스를 보니 그때의 일이 떠올라서이다. 초대장을 받고 반신반의하며 찾아온 카페 앞에는 크로커스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었다. 그날 병원에서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는 듯 온통 보라색 천지인 정원이 오직 그만을 위한 선물인 것 같아 병운은 벅찼다.
흐드러진 보라색 꽃들이 바람을 타고 살랑댔다. 아직 찬 기운이 역력했지만 바람에 실린 꽃내음은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한 송이만 있을 땐 잘 몰랐는데 이렇게 정원 앞에 서 보니 그 향기가 훨씬 깊이 느껴졌다. 봄의 햇살을 타고 은은한 향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주변 숲 내음과 꽃향기가 어우러져 한층 더 넉넉하고 풍성한 느낌이었다.
'보라색 꽃말이 후회 없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살랑이며 귓가를 맴도는 것이 마치 아내가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아 한참을 서 온몸으로 이 보라색 바람을 맞았다.
'잘 가시구려, 그동안 고생 많았네.'
병운의 예상과 달리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으며 고요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카페 문이 열리자 그들의 시선이 병운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병운은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원은 마음에 드셨나요?"
올 줄 알았다는 듯 확신에 찬 미소로 지운이 물었다. 유니폼을 입고 병원에 있어야 할 간호사가 앞치마를 두르고 카페 주인으로 지금 병운의 눈앞에 서 있다. 병운이 놀라 말을 잇지 못하자 지운이 이해한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전에 병원에서는 죄송했어요. 악의가 있어했던 거짓말은 아니었답니다."
"네? 아, 그 거짓말요?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옥상에 가 보고 금방 이해했어요."
병운은 아까부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강한 시선이 느껴져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학생은 그때 병원 옥상에서... "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도 여기 오셨네요.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승언이 그때 하지 못했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 꽃도 다 이 간호사님, 아니 이 카페 사장님이 주신 것이었네."
"저는 그냥 떨어져 있던 꽃 한 송이를 주워드렸을 뿐 그다음은 모두 병운 님이 하신 거지요."
지운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이렇게 또 만나다니 정말 신기해요."
병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또 하나의 시선, 혜주가 신기한 듯 말했다. 이제 알겠다는 듯 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전에 병원 엘리베이터, 맞으시죠? 다음 거 타려고 일부러 걸어갔는데 오래 잡아주셨잖아요."
혜주는 그 메너 있는 노인의 쓸쓸한 미소를 기억했다. 온화한 얼굴 뒤에 드리워졌던 깊은 슬픔도.
"아, 제가 글 쓰는 사람이라 관찰력이 좀 남다릅니다. 뭐 아직 작가 지망생에 불과하긴 하지만요."
혜주가 의아해하는 병운의 표정을 읽고 변명하듯 덧붙여 말했다.
"익숙한 얼굴이 저분뿐이 아닐 텐데요."
지운이 카페 안에 있던 손님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눈썹을 잠깐 실그러뜨리더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병운에게 말했다.
"병운 님만을 위한 메뉴를 추천합니다. 이거 어떠세요?"
"힐링 카카오 라떼라... 이름이 마음에 드네요."
병운이 지운이 내민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지운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메뉴판을 들고 카페 안쪽으로 잠시 사라졌다 얼마 안 있어 하얗고 말끔한 잔을 들고 다시 그에게 왔다. 카페 안에 은은하게 돌던 꽃향기가 진하고 묵직한 카카오 향에 일순간 묻혔다.
"주문하신 힐링 카카오 라테입니다, 손님."
병운은 잔을 들어 깊은 카카오 향을 한 번 음미하고 천천히 한 모금 들이켰다.
"카카오 라테면 우유 베이스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원래는 그렇지만 병운 님을 위한 이 메뉴는 에스프레소가 베이스입니다. 거기에 스티밍 한 부드러운 우유 거품과 풍부한 카카오 가루를 넣어 제가 직접 제조한 것이랍니다."
다소 의기소침해진 그의 목소리에 지운이 일부러 좀 더 명랑하게 대답했다.
"아내는 평소 커피가 진하게 든 라테를 참 좋아했습니다. 아내에겐 커피가 좋지 않은 음식이라 그렇게 먹고 싶다는 걸 제가 못 먹게 했던 것만 생각이 나네요"
"그래서 병운 님도 일부러 안 드셨던 거죠? 원래 좋아하시잖아요."
지운을 바라보는 병운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좀 편하게 드서도 됩니다. 아내분도 함께 드신다고 생각하시면서요."
병운이 라테를 한 모금 더 깊게 들이켰다. 편안한 따스함이 병운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카카오의 풍부한 향과 커피의 깊고 진한 향이 잘 어우러져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카카오는 기운이 없을 때 에너지를 보충해 주지요."
"깊은 향과 달콤한 끝맛이 나쁘진 않네요."
"그래요? 그렇다면 반은 성공했네요."
지운이 다행인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카오에 들어있는 여러 성분이 엔도르핀이나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시켜 줍니다. 그래서 기분이 안정되면서 긍정적인 감정이 되살아나기도 하고요. 우린 이를 행복 호르몬이라 부르죠."
"행복 호르몬이라... 좋네요. 그 시절의 아내와도 마음껏 함께 맛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지나고 나니 다 후회가 되네요."
병운의 말에 카페 안의 공기가 각각의 애달픈 사연들을 머금고 촉촉해졌다. 창가에 앉아 있던 도훈이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고, 서영과 혜주는 아련한 슬픔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져 애꿎은 찻잔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희가 안타까운 마음에 깊은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승언이 일어나 병운에게로 가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의 마음을 저 또한 이해한다는 듯. 병원 옥상에서 병운이 승언에게 해 준 것처럼 진심으로 위로를 전했다. 병운이 다시 한 손을 승언의 손 위에 포개며 토닥였다. 플로라의 카페에 처음으로 도착했던 민서가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 결국 읽고 있던 책을 가만히 덮었다. 그리고는 그 책을 들고 병운에게로 갔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요. 후회의 삶을 살고 있는 저에게 카페 사장님이 권해주신 책인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그리고 민서는 지운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책 이분께 드려도 되죠?"
"그 책은 민서 님 정서에 딱 맞춘 책이에요. 물론 그 책도 좋지만 병운 님께는 그보다 더 추천하고픈 책이 있답니다."
"그럼 그 책 제가 읽어봐도 될까요?"
승언이 민서와 지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지운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걸음에 책장으로 가더니 망설임 없이 책을 한 권 꺼내 들고 병운에게 왔다.
"혹시 이 책 읽어보셨나요?"
"그리스인 조르바, 유명한 고전이네요. 부끄럽게도 전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
자신 때문에 카페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에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병운이 아까보다는 좀 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이에요. 자유로운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입니다. 두려움, 슬픔, 어떤 괴로움에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은 반드시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요. 상남자 스타일의 책이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병운 님 평생 체육 교사로서 한 시절 역동적인 삶을 사셨으니 잘 맞을 것 같은데요."
지운이 이렇게 말하고는 웃으며 그에게 책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여기 계신 분들, 책을 읽고 계셨군요. 다 사장님이 여기서 추천해 주신 책인가요?"
"네. 병운 님께는 이 책을 꼭 권해드리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한 번 읽어 볼게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책 한 권이 텅 빈 사람의 마음을 과연 얼마나 채워줄 수 있으려나 싶어 병운의 얼굴에 잠시 회의의 눈빛이 스쳐갔다.
"당장은 아닐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삶을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눈빛을 읽은 듯 지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곤람함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충분히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앞으로는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실 수 있기를요."
한동안 카페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와 간혹 찻잔 부딪는 소리만 있을 뿐 고요했다. 하지만 공기는 처음보다 훨씬 유연해졌다. 더욱 포근해졌다.
"아직도 후회 속에 머물고 있나요?"
지운이 정적을 깼다. 언제 왔는지 그녀는 민서 앞에 서 있다.
"그렇진 않아요. 아직도 오빠를 생각하면 마음은 아프지만요."
민석만 생각하면 모든 것이 후회가 되어 돌아와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이 식지 않는 차 때문인지, 신비한 카페의 분위기 때문인지 민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후회라는 말을 빼고도 민석을 기억할 수 있음이 놀랍고 신기했다.
"아직도가 아니라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오빠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질 거예요. 소중한 가족이 곁을 떠났으니까요. 그 마음까지 애써 부정하지는 마세요, 민서 씨."
지운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분과 함께한 시간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후회로 가득한 마음보다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추억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병운이 민서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던 듯.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저는 아내를 보낼 때까지 긴 시간이 허락되었음에도 이별은 쉽지 않았어요. 방금 한 말은 사실 제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아빠 때문이었어요.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지 모를 저를 위해서 아빠가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역시 그 선물이 맞는 것 같아요."
병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승언이 용기 내어 말했다. 병운이 그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여 주었다.
"이별은 회한을 낳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내가 그런 어두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내가 원치 않을 것 같아요."
병운의 말에 카페 안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깊은 공감을 표했다. 누군가는 읽고 있던 책을 가슴에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며 따뜻한 눈빛으로 병운을 바라봐 주었으며, 또 누군가는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애꿎은 바닥만 쳐다보며 주억였다.
"안타깝지만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어요. 현재의 이 시간이 앞날에 또 후회의 기억이 되지 않도록 지금부터 조금씩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지운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실천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알고 있지만 잘 바뀌지가 않아요. 저도 병원에서 공황장애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제 강박에 대해 생각해 봤거든요. 그게 다 후회와 불안에서 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알면서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니 증상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요. 제게 권해주신 이 책 속에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위로와 안정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주긴 했지만 저의 일상도 그렇게 될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요."
그동안 조용히 있던 서영이 토로하듯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속에 든 얘기를 꺼내 놓고 보니 그것만으로도 서영은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듯했다. 서영의 말을 경청하던 지운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씀이에요. 여기 계신 모두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죠?"
지운의 물음에 사람들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말없이 미소로 답하기도 했다. 지운이 따뜻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여러분들이 당장 바꿀 수 있는, 좀 더 현실적인 제안을 해 볼까요? 일단 긍정적인 환경을 조성해 보세요. 예를 들면 깨끗하고 정돈된 방 만들기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생활하는 곳의 조명을 아주 밝게 바꿔볼 수도 있고요. 혹은 반려 식물이나 반려동물을 키우며 규칙적으로 관련 글을 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이런 예들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죠? 그러니 본인에게 맞게 직접 써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냥 생각만 하는 것 말고 직접 종이에 적어 보는 게 중요해요."
"그럼 평소 먹고 싶은 음식을 매일 하나씩 적어보는 것도 괜찮을까요? 아빠와 함께 즐겨 먹던 음식이나 종종 가던 음식점에서 먹던 그런 메뉴들이요."
지운의 말을 듣고 승언이 물었다.
"그것도 괜찮겠는데요. 좋아하는 명소나 가보고 싶은 맛집을 적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승언의 말에 혜주도 한 마디 거들었다.
"승언 씨와 혜주 씨 의견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키우는 데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긍정적인 환경 조성은 말 그대로 내가 속한 환경을 바꿔본다는 데 의의가 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보자면, 매일 앉는 식탁 위에 내가 좋아하는 꽃을 올려놓는다거나 책상 위 물건들의 위치를 바꿔 좀 색다른 기분이 들게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이런 아주 사소한 환경 변화도 낙관적인 생각을 유도할 수 있답니다. 긍정적인 마인드가 잘 생기지 않을 때에는 이렇게 환경을 먼저 바꿔보면 전향적 사고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아, 이해했어요. 저의 경우 퇴근 후 소파에 앉아 TV 스포츠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때 꼭 쿠션을 안고 있거든요. 오래된 쿠션을 바꿔보는 것도 그에 해당하는 거죠?"
"네, 맞아요."
도훈의 물음에 지운이 환히 웃으며 답했다.
"오랜 시간 요양원과 병원을 오갔던 터라 아내와 함께 썼던 방이 엉망입니다. 오늘 돌아가면 그것부터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해 봐야겠습니다."
병운이 아까보다 훨씬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나 당장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행동이 희망적 사고를 불러올 수 있다는 말에 카페 안 손님들의 얼굴 표정이 전보다 밝아진 듯했다.
"저의 경우는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지만 아직 한 번도 집안일을 시켜본 적이 없습니다. 설거지는 물론 식사 때 수저 놓는 것도 한 번 시켜본 적이 없어요. 과자를 먹더라도 다 먹은 빈 봉투를 그대로 식탁에 놓고 일어납니다. 앞으로 아이에게 이런 것들을 하나씩 시켜보는 것도 지운님이 말씀하신 긍정적 환경 조성에 해당하는 걸까요?"
진희가 뭔가 다짐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요. 그렇게 함으로써 진희 씨가 속한 환경이 바뀌는 것이니까요. 그건 진희 씨뿐만 아니라 분명 아드님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습니다."
지운이 흐뭇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말없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던 민서와 서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일단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주 사소한 것이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이번엔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한 번 적어 보세요. 이는 실제로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인지행동치료의 한 방법이기도 한데요, 부정적인 생각을 적어보면서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자주 드는지 파악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적어 본 부정적인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그 생각을 반대로 긍정적으로 바꿔 써보는 방법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바꿔 쓴다고 해서 바로 내 사고방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런 식의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부정적 사고에서 왜곡된 부분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는 때가 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연히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럼 저는 일단 부정적인 생각부터 한 번 써봐야겠어요. 부정적인 것을 별 고민 없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게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네요."
서영이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만큼 긍정적인 생각도 많이 써볼 수 있다는 말인데요? 적어 본 부정적인 생각들을 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꿔야 하는 게 규칙이니까요. 부정적인 것을 많이 쓰면 쓸수록 긍정적인 것도 많이 써보게 됩니다."
지운이 의기소침한 서영을 위로하듯 말했다. 그리고 확신에 찬 얼굴로 다시 덧붙였다.
"그도 저도 안 된다, 힘들다 싶을 땐 주변에서 긍정의 롤모델을 한 번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롤모델을 그대로 따라 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거든요."
"오, 저 있어요. 평소 닮고 싶은 사람요. 다른 부서에 있는 동기인데 성격이 활달하고 뒤끝도 없고 희망적인 사고를 많이 하는 친구예요."
서영의 목소리가 한껏 밝아졌다.
"세상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롤모델로 삼고 그 사람과 반대로 행동해 보는 것도 혹시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도훈이 조 과장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 그런 사람이라면 저도 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어요. 저희 남편이라고는 말 못 합니다."
진희의 말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마음인 듯 모두 함께 웃었다. 불안과 스트레스와 후회가 섞여 꽉 막힌 듯 무겁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서영도 미소를 머금고 카페 안을 유심히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 출판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변화와 성장의 이야기를 담은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받고 있거든요. 그중 <작은 북카페, 숲의 서재>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온 그 카페가 꼭 여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지가 정말 비슷해요. 그래서 지금 소설 속 카페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
서영의 말에 혜주가 갑자기 놀라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을 막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그 북카페 주인이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죠?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카페를 찾아와 카페 주인의 북큐레이팅과 심리적 조언을 통해 위로와 치유를 받는다는..."
"어머, 이거 비공개인데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인 걸 아시는 거죠? 아, 혹시 그럼..."
혜주의 말에 당황한 서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 맞아요. 제가 그 글을 응모한 사람입니다."
"아, 정말요? 그 닉네임 숲의 서재님이요? 이럴 수가..."
혜주와 서영의 대화에 카페 손님들이 신기하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당연히 있지요. 이보다 더한 인연도 있을 수 있고요. 사람들은 다 크고 작은 인연들로 이어져 있답니다. 사소할지언정 누군가에게 다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말이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지운이 말했다. 그리고는 오늘 플로라의 카페에 찾아온 손님 모두를 하나하나 돌아보며 온화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인생이 참 만만치가 않아요. 때로는 우리가 감당해 내기 어려운 과제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턱 내놓기도 하죠. 다행인 것은, 고통도 슬픔도 결국은 다 과거의 역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쯤 살다 보니 그래요."
"아니, 여기 나 같은 늙은이도 있는데 젊은 아가씨가 무슨 인생 2회 차 같은 말을 하나요?"
지운의 말을 듣던 병운은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글쎄요,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니까요."
지운이 병운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모두와 다시 한번 찬찬히 눈을 맞추고는 덧붙여 말했다.
"살다 보면 정말 지치고 다 그만두고 싶은 날이 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날들도 결국 끝은 반드시 있답니다. 이 말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냥 오늘만 잘 살아보세요. 그리고 내일이 되면? 그럼 또 '그 오늘'을 살아보는 거지요. 그렇게 살아내는 오늘이 쌓이면 지금 제가 한 이 말의 뜻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을 살아라>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인데 오늘처럼 이렇게 와닿은 적이 있었던가. 카페 안에 있던 손님들은 그것이 카페에서 먹은 음식 때문인지, 그 속을 가늠하기 어려운 묘령의 카페 주인장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일반 카페와 달리 어딘가 독특한 모습을 간직한 이 숲 속 카페의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인지, 그들은 확신할 수 없었다. 빨간 리본 봉투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부터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훨씬 이전부터.
-민서: 오빠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련한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이제는 오빠에 대한 기억을 애써 지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이 나면 나는대로 오빠와의 시간을 회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도훈: 조 과장의 마음에 안 드는 점을 한 번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와 반대가 되도록 행동하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조 과장 같은 인성의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통쾌함이 느껴졌다.
-서영: 증세가 점점 심해져 병원에 찾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는 아직 이렇다 할 어떤 치료도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카페에 오기 전날 정말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그것도 지운의 능력이었을까. 나는 아마 앞으로도 매년 그맘때쯤이 되면 더 열심히 일하며 괜히 더 바쁘게 살려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때의 아픔을 잊으려 나 자신을 혹사시키기 위함은 더 이상 아닐 것이다. 나를 구하다 희생된 그 곱슬머리 남자애의 몫까지 내가 더 성실히 살아내기 위함에서 일 것이다.
-혜주: 우리 부부에게 크리스마스가 사라졌던 날들. 분명히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지운의 말을 듣고 가만히 지난날을 되새겨 보았다. 찬찬히 떠올려 보니 그일 이전의 크리스마스엔 언제나 즐거운 기억뿐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사라졌던 시간보다 그 이전의 행복했던 크리스마스의 시간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그걸 모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는 남편에게 선물을 하나 할 예정이다. 어쩌면 크리스마스에 소중한 아기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진희: 음악은 뭐 아무나 하냐,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그런 핑계를 대더라,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교과서나 한 장 더 봐라. 목발 짚는 준우를 혼자 학교에 보내고 사고 전화를 받은 날, 병원까지 가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말이다. 깊은 후회와 한탄이 앞서던 날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준우의 말을 경청해 줄 참이다. 귀한 누군가의 희생이 더해졌으니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죄스럽고 감사한 마음만큼.
-승언: 오늘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라고 아빠가 주신 선물임이 확실하다. 특별하고 신비한 마카롱 덕분에 부모님과의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게 된 것도 값으로는 도저히 매길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이었다. 앞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것 같다. 아빠, 보고 싶어요.
-병운: 어쩌면 사랑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미련이었을지 모른다. 아내가 그토록 원하고 있음에도 눈 감고, 귀 막고 내가 생각한 대로만 믿으려 했던, 일종의 아집이었을지 모른다. 정애는, 내가 이런 식이면 죽어서도 제 갈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라 말하곤 했다. 이제는 아내를 좀 편히 보내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 둘이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을 이제는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자, 카페는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외벽을 타고 알알이 빛나는 따스한 전등빛이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별빛이 내린 정원에서, 그들은 각자의 아픔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스트레스와 불안과 두려움과 가슴 깊숙이 박혀있던 후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