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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Jun 21. 2024

엄마도 떠날 수 있지

혼자하는 여행이 좋더라

  지난 한 해는 올해만 버티면 휴직이라는 생각으로 기계처럼 일했다. 학생들이 서운하게 해도, 난 내년에 잠깐 없을 거니까. 직장 동료들에게 실망을 해도 다행인지 무엇인지 감정이 쌓이지 않았다. 그냥 휴직만 하면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휴직을 하고 난 직후는 휴직 전만큼 바빴다. 아이를 학교와 학원에 적응시키느라 하루에도 6번씩 아이를 데리러, 혹은 데려다주러 나갔고 학교와 학원 사이의 시간에 간식을 챙겨주고 숙제를 봐주었다. 확실히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다양한 학교 행사가 있었고 전보다 챙겨야 할 것이 훨씬 많았다. 새삼 여태껏 한나절의 육아를 책임져 주었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절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휴직을 하면 나를 위해 시간을 쏟고 싶다고 다짐했었기에 좀 더 바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운동을 하고 놓았던 일본어를 공부하고 누추하지만 짧게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틈틈이 아이의 학교 행사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육아휴직’이라는 묵직한 단어에 기가 눌리고는 했다. 내 휴직은 명목상 육아를 위한 것임에도 왜 이렇게 육아는 점점 힘에 부칠까. 아이가 이제는 말도 잘 알아듣고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는데 왜 이렇게 육아라는 단어가 꼴도 보기 싫을까.


  휴직 전에도 주말에 짬을 내서 자주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했었다. 주말에 집에서 아이와 복닥거리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가는 편이 훨씬 좋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는 아이가 잘 잤기 때문에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바깥 경치를 구경했고, 밖으로 나오면 다행히 남편이 주로 아이 밥을 먹이기 때문에 음식 맛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외식을 하면 내가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되니 제일 좋았다. 이래서 ‘엄마들이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는구나!’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달까. 무엇보다 사람들 속에 있는 내가 좋았다. 집 안에서 나 혼자만 이렇게 씨름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틈에서 나도 그들처럼 시끌벅적하게 섞여 살아가고 있다는 묘한 연대감이 좋았다.


  그래도 가끔은 미치도록 혼자이고 싶었다. 남편이 1월에 친구들과 베트남을 간다기에 나는 후딱 ‘혼여’를 통보했다. 오히려 좋아. 니가 가야 나도 간다. 남편이야 말릴 구실도 없겠다 나는 들떠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운전에는 자신도 없는 데다가 언제 혼술을 하게 될지 몰라 서울로 목적지를 정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였지만 혼자 서울을 여행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마치 가까운 해외라도 나가는 양 긴장되었다.

 

  인사동은 친구들이랑 종종 가던 곳이었다. 거리도 구경하고 술도 자주 마셨는데 익선동 골목골목이 그렇게 예쁜지는 몰랐다. 오랜만에 은을 만나 낙원상가에서 아귀찜을 먹고 익선동 예쁜 골목들을 지나 수제 맥주가게에서 실컷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타인이 없는 인사동의 한 숙소로 돌아왔다. 티브이를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같이 숙소에 들어가면 항상 티브이를 틀었는데 오늘은 한 번도 티브이를 틀지 않았다. 숙소 안은 조용했고 침대는 아무도 망쳐 놓지 않아 넓고도 폭신했다. 독서등을 켜고 가지고 온 책을 읽었다. 은과 술을 많이 마신 터라 취기가 있었지만 책의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했다. 아! 이 얼마나 호사인가! 잠들고 싶지 않아 12시가 넘도록 책을 읽다가 티브이를 켰다. 채널을 돌려 NHK에 맞췄더니 더더욱 일본으로 여행을 온 것 같았다. 잠깐씩 들리는 일본어 단어들과 대부분 모르는 일본어 문장을 들으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엔 보란 듯이 늦잠을 잤다. 아이의 아침을 챙겨주지 않아도 되고,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었다. 정해진 아침식사 시간도 없어 아침을 쿨하게 거르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문득 그들은 잘 일어났는지 궁금해져서 카톡을 켰다.


- 동동이 일어났어?

- 어 오늘 일찍 일어나서 지금 밥 먹이고 있지. 혼자 있어서 좋냐?

- 좋지. 당연히. 큭큭

- 오늘은 뭐 할 거야?

- 이따 혼자 대학로 가서 연극 보고 카페에 가서 책 읽을 거야. 완전 한량한량하게.

- 그래 잘 즐겨. 동동이 데리고 이따 갈게 ㅋㅋㅋ 


  2박 3일 중 1박은 같이 하고 싶다며, 주말에 심심하다고 따라오겠다는 남편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고 수락했었는데 막상 온다니까 또 심란해진다. 아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데 미안하게도 오늘 난 괜찮았다. 아이에겐 아빠가 있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은 짧은 시간이라도 즐겨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옷을 주워 입고 무작정 나가 걸었다. 토요일 아침의 익선동에서 종로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서울 공기가 좋을 리 만무한데도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청량하고 쌀쌀한 공기가 상쾌했다. 사람이 없는 터널길마저 운치 있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맛있게 생긴 국숫집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 먹었다. 배가 차면 이따 다른 군것질을 못하니 반 그릇만 잽싸게 비우고 따뜻해진 배를 두드리며 걷고 또 걸었다.


  소극장 연극 무대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았다. 이른 기대감에 워낙 빨리 예매하다 보니 두 번째 줄 가장 가운데였다. 덕분에 배우들이 나를 지목해 연극에 조금 참여시키는 귀한 경험도 했다. 내 옆에 줄줄이 앉은 사람들과 일행인 양 자연스럽게 섞여 평소보다 더 크게 웃으며 리액션을 했다. 연극이 끝난 뒤에는 당당하게 먼저 줄을 서 혼자 배우들과 사진을 찍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나와 근처에 분위기 좋은 카페를 검색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책을 읽고 있는데 슬슬 불안해진다. 


‘나 이렇게 한량한량해도 되는 건가?’


  마음 한구석에 자꾸 아이 생각이 나서 다시 톡을 했다.


- 어디까지 왔어?

- 이제 영풍문고에서 책 구경하고 있어. 동동이가 사달라는 책 한 권 사줬어.

- 그래 그럼 이제 만나. 여기 다 왔다고 하니까 책에도 집중이 안되네.

- 그래 그럼. 택시 타고 쌈지길로 와.


  남편이 만나자는 내 말을 잽싸게 받았다. 나의 혼자 여행은 쌈지길에 도착하면서 끝났지만 1박 2일로 잠시라도 느꼈던 그 설렘이 참 귀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경험을 한 직후라도 아이에게 관대해지지는 않는다는 것. 아이가 말을 안 듣고 숙제를 미루니 또 짜증이 밀려왔다. 이렇게 좋은 설렘을 느꼈음에도 똑같이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옹졸하다고 느끼면서 아이를 처연하게 바라봤다.


‘너는 도대체 어디서 왔니? 너는 무슨 생각을 하니? 너는 어떤 기분이니? 너는 내가 어떻니? 넌 무엇이 하고 싶니? 너는 어떤 존재니..?’


  수많은 물음표 끝에 내가 낳았음에도 전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한 생명체가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농락한다. 매일매일 다른 까불이 버전으로 가끔은 내 속을 벅벅 긁기도 하고 가끔은 묘하게 내 마음을 쥐어짜는 요 가느다랗고 꼬장꼬장한 생명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아이가 흰자위를 보이며 입술 양꼬리를 삐쭉하게 내렸으므로 또다시 실수처럼 ‘풋’ 웃음이 새어 나와 버렸다.     


“어! 웃었죠?! 엄마 방금 웃은 거 맞죠? 아싸! 내가 이김!!”

 

  도대체 뭘 이겼다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오늘은 기분 좋으니까 내가 순순히 진 것으로 하고 여느 때처럼 밥을 먹기 위해 아이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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