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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은 홍시가 된다 Feb 06. 2024

일본에서 일한 지 3개월 만에 얻은 장기 휴가

3개월 만에 온 우리 집, 그리고 코로나

첫 휴가는 우리 동네의 우리 집에서


금요일 아침의 한적한 나리타 공항  


 몇몇 일본 회사에는 리프레쉬 휴가라고 있다. 1년에 단 두 번, 여름과 겨울에 주는 약 10일간의 장기 휴가다. 나는 입사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첫 리프레쉬 휴가는 짧지만 6일. 일본에 남아 혼자 자아성찰과 수련을 할지, 한국에 와 나를 걱정하실 부모님도 뵙고 효자 노릇을 할지 고민을 거듭하다, 지금 아니면 한참 한국에 못 간다는 생각에 티켓을 과감히 샀다.


 나리타에서 김해까지 왕복 60만 원.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당장의 자아실현 및 성장보다 우선 심리적 안정을 택한 셈이다. 고민 많이 했지만 막상 한국에 갈 날이 다가오니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휴가 전날까지 3박 4일 간 회사 합숙 연수가 있었는데, 여기서 동기들 간 코로나 전염이 발생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날 자가 키트에서 코로나 양성이 뜬 친구가 그날 연수를 하차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연수에서 이후 서너 명의 동기들이 컨디션 난조로 도중 하차했는데, 병원에 가면 코로나가 아닌 인플루엔자라고 하는지 하나같이 인플루엔자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내 룸메이트(2인 1실이었다)도 갑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방에서 하루종일 기침을 하는데(여기서 아차 싶었다), 나도 왠지 목이 따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또 괜찮아지기도 해서, 그럭저럭 마지막 날인 4일째의 연수를 끝마쳤다. 그렇게 살아남은(?) 동기들끼리 돌아와 같이 밥을 먹고, 기차를 타고 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새벽에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던 나는 그냥 기절하듯 쓰러져 잤다.


일본에 살다 오니 한국의 아파트 단지가 정말 신기하게 보인다.


 공항에서의 출국과 입국은 굉장히 순조로웠고, 체감상 출입국 과정이 총 합쳐 5분도 채 안 걸린 것 같았다. 마스크를 단단히 낀 채로 그렇게 한국 집에 왔다. 오자마자 우선 절대 격리를 했다. 부모님께는 직업상 감기도, 코로나도 옮기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타지에서 자취 중인 형제의 방을 빌렸다. 나름 효도의 차원에서 집에 왔는데 마치 집 앞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딸랑방구 취급을 받았다.


 다음 날 아침, 목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고, 다음 날 코로나 자가키트로 검사해 보니 완전히 선명한 두 줄이 생겨 있었다. 연수를 끝까지 함께 한 동기들도 하나 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소식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의 첫 코로나와 첫 장기 휴가의 붕괴는 망할(!) 회사 합숙 연수 때문이라며 괜히 탓해본다. 방 안에서 휴가 일수는 속절없이 흘렀고, 3일 동안 방에 갇혀 의미 없이 유튜브 숏폼만 내리며 아침과 낮과 밤을 지냈다.


목이 아프다고 하니 방에 놓여있던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보리차.


 좋다, 원래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집에 와서 이렇게 혼자 뒹굴거릴 계획이었으니까.

 그런데 3일 동안 유튜브로 짧은 영상만 스크롤하다 보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뇌가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는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좋아하는 책도 못 읽는 나를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이런 과정이 있었다. 육체만 편하고, 정신은 더 이상 인간의 정신이 아니게 되는 때가.


엄마가 동네 칼국수집에서 포장해 왔다.

 잠깐 약국에서 약을 사 오려고 밖에 나갔는데, 어린 여자 아이들이 춤을 추며 영상을 찍고 있었다. 아파트 관리자는 전기 자동차 충전기 앞에서 업자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몸을 부딪혀가며 놀이를 하고 있었고, 부모들은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나름대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밖에만 나오면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럴 때마다 혼자 스마트폰을 의미 없이 뒤적거리고 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동시에 앞으로 무언가를 할 에너지도 얻게 된다.


 휴가 동안 집에 있다 보니 더욱 회사에 갈 힘이 생기지 않았다. 결국 돌아가는 티켓은 최대한 늦게 도착하는 것으로 사고, 일단 출근을 제시간에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공부나, 업무 준비나 다른 거 다 상관없이 말이다. 우선 출근만을 목표로 삼으니 다른 것들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의 목표도 거창한 거 없이 '일단 나가는 것'으로 삼기로 했다. 휴일에는 늘 침대에서 유튜브만 보다 하루가 다 가버리기 때문이다. 정말로 일단 나가는 것은 의식 환기에 큰 도움이 돼서, 그냥 현관문을 열고 복도에서 잠시 풍경을 바라보다 들어가도 좋다.



 일본에는 딸기가 유독 비싸다. 한국의 딸기 물가는 어떤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본은 딸기 12개에 만 원 정도 하는 느낌. 귤 5개에 400엔인 것도 못 사서 100엔짜리 바나나 한 송이를 앞에 두고 갈팡질팡하는데, 딸기를 쉽게 살 리 만무하다. 집에 가서 냉장고를 열었더니 뜯지 않은 딸기 한 바구니가 떡하니 있었다. 도쿄에 있던 어느 날 엄마에게 일본 딸기 비싸다고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나면서 "감동이야~"를 외쳤다.


혼자서 깻잎 약 20장을 한 끼에 먹기는 무리예요, 엄마. 알지만 일단 푸짐하게 덜어주는 엄마 마음.


"둘이 있을 때는 이런 거 없는데, 딸내미 왔다고 소고기도 먹고, 이야."

엄마, 아빠는 성인이 된 후의 나에게 독립심을 키워주려고 집에서 쫓아내면서도, 막상 나가 있으면 내가 없어 심심하다느니, 내가 없어 치킨 먹을 명분이 마땅치 않다느니, 하신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아마 엄마랑 아빠랑 동네 카페라도 갔을지 모른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이를 안타까워해주었다.


엄마의 보양 요리는 단연 전복죽. 나의 수능도 전복죽과 함께였다.


 혼자 살 때 오는 그 특유의 우울감은 아픈 외로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외로우면 나만의 세계에 갇히기 쉬웠다. 타지에서 보낸 대학 시절도 외로움과 권태가 8할이었을 것이다.


격리된 방에서 먹는 엄마표 진수성찬. 내 입에 가장 익숙한 밥상.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반찬이 없다.


 리프레쉬 휴가로 나는 리프레쉬가 되었을까? 왠지 오랜만에 나를 찾은 기분은 든다.

 조금은 긍정적인 태도로 나의 회사와 일에 임할 수 있을까. 다시 외로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다시 나는 회사에서 버거운 업무에 조금 숨이 가빠올 수도 있겠고, 언어의 장벽에 잠시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고, 수없이 많이도 머리는 새하얗게 될지 모르겠다.

 내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돌아간다. 일상에서 비일상이 된 한국에서, 판타지에서 현실이 된 일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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