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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pd 알멋 정기조 Jun 03. 2024

해발 1,700m에 있는 고상화원, 한라산 '윗세오름'

수 km, 수십만 평에 걸친 거대한 평원, '가장 높고 아름다운 산책로'


#제주여행 #한라산 #윗세오름 #철쭉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산이 바위산인 것과 달리, 백두산과 한라산은 화산으로서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까닭에 지형이 많이 다릅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평원입니다. 용암이 굳어 생긴 소위 '용암대지'인데, 한라산의 경우 정상인 백록담 서쪽에 있는 윗세오름 주변으로 해발 1,500m 이상의 고도에 길이 수 km, 넓이로는 수십만 평 이상의 거대한 평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영실 코스로 올라와 윗세오름 근처에 이르면 '선작지왓'이라 하는 대평원에 닿는데, 매년 6월 초에는 이곳에 분홍색 철쭉이 넓게 핍니다. 백두산 고산화원에 견줄만한 '고상(高上)화원'으로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산책로라 불립니다.



'나현아,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아빠, 산에 안 가면 안 돼요?ㅠ'

'안돼, 너 여기 데려가려고 제주도에 온 건데. 어서 옷 입고 준비해.'


부녀가 일어난 알람 시간은 무려 새벽 '5시 40분'입니다. 이렇게 서둘러야 되나 싶겠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입산에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라산 영실 방면에 있는 주차장은 두 곳이 있는데, 위쪽(1주차장)에 주차하면 해발 1,280m 지점에서 바로 시작하지만 아래쪽(2주차장)에 대면 1주차장까지 높이로는 280m, 길이로는 무려 2.5km를 걸어오든 택시를 타든 해야 합니다. 당연히 산속에서 택시를 타는 것도 힘들고요. 이 고생을 안 하려면 일찍 가서 주차면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숙소에서 기다릴 엄마와 보현이도 생각해 줘야 합니다. 이렇게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도 내려오면 1~2시입니다. 늦게라도 같이 점심 먹으려면 일찍 출발해야 됩니다.


참고로 한라산은 입산 통제시간도 있습니다. 5~8월 기준으로 오후 3시가 지나면 입산부터 할 수 없으며(영실통제소 기준), 백록담 남벽 코스까지 가고 싶다면 윗세오름에 오후 2시 전에는 올라가 있어야 하므로(14시부터 통제) 넉넉잡고 정오에는 입구를 통과하여야 합니다.


저희가 영실통제소를 통과하여 입산을 시작한 시간은 6시 49분입니다. 그런데 벌써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춥지? 나중에 벗더라도 지금은 겉옷 지퍼까지 채워.'

'휴대폰은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손 시리니까 장갑도 끼고.'

'못해도 5~6시간은 걸어야 하니까 절대 뛰지 말고 천천히 걸어.'


아빠도 한라산이 처음인데 나현이는 오죽할까요. 걱정되는 마음에 이것저것 챙길 수밖에 없습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추위입니다. 5월 말이지만 한라산은 상당히 춥습니다. 1km 올라가면 6.5℃씩 추워진다고 하는데, 여기는 입구부터 고도가 1,300m이니 적어도 지표보다는 8℃는 추운 셈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아직 오전 7시도 안된 이른 시간이고요. 혹시 자녀를 데려오려면 추위 대비를 하셔야 됩니다.


5~6시간 산행을 하다 보면 휴대폰 배터리 관리도 해줘야 되는데, 그러려면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야 합니다. 괜히 산속에서 통화하고 카톡하고 했다가는 배터리가 없어서 그 멋진 경치를 사진 찍지도 못하는 불상사에 놓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비행기 모드로 했는데도 하산하니까 배터리가 20% 밖에 없더라고요. 사진을 너무 많이 찍었나 봅니다.


뭐 그래도 막상 올라가 보니 나현이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문제였습니다. 항상 나현이가 저보다 앞에 올라가고 저는 따라가기에 바빴습니다. 요즘 사전 훈련 삼아 산에 가끔씩 다니곤 했는데 그래도 나현이에게 완패당하고 말았습니다.


안내에 따르면 영실통제소부터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왕복 7.4km / 3시간, 남벽분기점 왕복 4.2km / 2시간 코스라고 합니다. 모두 합치면 11.6km / 5시간인데, 이보다는 훨씬 여유 있게 시간을 잡으셔야 합니다. 참고로 저희는 중간에 자주 쉬고, 사진도 많이 찍고, 윗세족은오름 전망대도 가 보고, 대피소에서도 좀 쉬고 했더니 6시간 20분 정도 걸렸습니다.





좀 오르다 보니 영실(靈室)에 다다랐습니다. 전후좌우가 탁 트인 멋진 풍광입니다. 부처가 설법하던 영산(靈山)에 비견될만하다는 의미로 붙은 지명이라는데, 영산은 모르겠지만 여기가 진짜 신령이 살만한 곳 같습니다.


오른쪽에는 '영실기암' 또는 '병풍바위오백나한'이라고 하는 절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오른쪽에 정확히 역광이 걸려서 사진이 좀 아쉬웠는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면 정말 멋진 사진이 되었을 터입니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 한라산 자락의 오름들과 서귀포 시내, 그리고 멀리 제주 남쪽 바다까지 거침없이 시야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절경은 모르겠고 힘들어 숨 고르기에 바빴습니다. 자주 걸음을 멈추고 쉴 겸해서 사진을 계속 찍지 않았다면 저 풍광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1,400m, 1,500m 표지석도 있었을 터인데, 그것들은 다 보지도 못하고 거의 다 올라와서 1,600m 표지석을 발견하고 말았네요.


 *주) 사실 평소에 산행을 좀 하시는 분들은 결코 힘들다고 볼 코스는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입구에서부터 1,600m 고지까지 320m를 올라올 정도의 평이한 코스입니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오르막 계단이어서 힘들 뿐입니다. 시간 여유를 잡고 쉬면서 올라가면 충분히 갈만한 코스입니다.





백록담 화구벽이 보이는가 싶더니 드디어 드넓은 평원, 선작지왓에 다다랐습니다. 선작지왓은 제주도 사투리로 '작은 돌들이 널려있는(또는 서 있는) 밭'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벌판에는 군데군데 분홍색의 철쭉들이 피어 있습니다. 바로 이걸 보려고 일부러 때 맞춰 제주도에 온 거였습니다. 아직 1주일 정도 빠른 듯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도 충분합니다. 여기는 해발 1,600m가 넘는 고지입니다. 이곳에 이렇게 너른 평원과 분홍빛 철쭉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거의 '인생 절경'입니다.


중간에 왼편으로 있는 윗세족은오름에도 올랐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족은'은 '작은'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윗세오름은 윗세족은오름(1,699m), 윗세누운오름(1,711m), 그리고 대장인 윗세붉은오름(1,741m)의 3형제를 통칭한 이름입니다.


이 3형제 중 정확하게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족은오름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통제된 등산로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오를 수는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시야에는 백록담 다음으로 높다는 장구목오름(1,813m)과 삼각봉(1,697m)도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윗방아오름(1,747m), 방아오름(1,700m)도 있지만 이들 모두 통제되어 있습니다. 바로 눈앞에 평이하게 보이는 정상을 오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웠네요.


'나현아, 잠깐 와봐. 이 물은 먹고 가야 돼.'


이 높은 곳에 약수가 있습니다. 노루샘이라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있는 샘물입니다. 근처 남벽 쪽으로 가다 보면 백록샘이라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1,655m)에 있는 샘물이 있다는데, 허용된 등산로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1차 목적지인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달했습니다. 밖에 앉을 공간도 있지만 아직 날씨가 쌀쌀해 대피소 안에 들어와서 좀 쉬었습니다.


'애기야, 배고플 텐데 이 떡 좀 먹어봐. 아니면 이 소시지 먹을래?'

'아니에요. 저 떡은 잘 안 먹어요.'

'아, 그래...'


확실히 알파 세대라 그런지 기호가 확실합니다. 호의를 베풀어주시려던 아주머니가 머쓱해하셔서 저도 민망했습니다. 아직 나현이가 인심 좋은 K-산행의 관행을 이해하지 못하네요. 대신 제가 정중히 고맙다고 하고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어떤 외국인 유튜버가 K-산행의 매력은 인심이라고 했던 게 기억나네요. 옆에는 보온병에 물 담아와 컵라면을 드시는 분들도 꽤 되었습니다.


너무 쉬엄쉬엄 다녔더니 벌써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해발 1,700m 인증샷을 찍고 바로 2차 목적지인 남벽분기점으로 향합니다. 한라산 고상화원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많은 분들이 체력과 시간문제 등으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만 올라갔다 내려갑니다만 너무 아쉬운 일입니다. 최대한 아이를 설득해서 남벽분기점까지, 아니면 그 중간까지라도 다녀오시길 추천드립니다.


우선 ▲한라산 철쭉은 이쪽이 더 훨씬 많이 피어 있고, ▲거대한 백록담 화구벽을 훨씬 더 가까이에서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으며, ▲저 멀리 제주 바다까지 같이 보이는 진짜 절경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방아오름웃방아오름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쪽 남벽분기점 코스가 어리목 쪽의 만세·사제비동산보다 100배는 나은 것 같습니다.


'아빠, 이제 그만 가요. 너무 힘들어요.'

'응, 이제 다 왔어. 조금만 가면 더 가고 싶어도 못 가.'


물론 그러려면 조금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합니다.





다시 윗세오름 대피소로 돌아왔습니다. 나현이는 아예 바닥에 누워 버렸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벌써 시간은 정오가 되어 가고 있고 이미 산행은 5시간을 꼬박 채워 갑니다.


'나현이 오늘 최고! 나현이 덕분에 아빠도 한라산 구경하고 왔다.'

'이제 빨리 내려가서 엄마랑 동생이랑 밥 먹자.'


내려오는 길은 일부러 다른 코스인 어리목 코스로 했습니다. 이곳의 만세동산사제비동산도 구경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비추입니다. 저 멀리 해안까지 보이는 만세동산은 좀 볼만했지만, 그 이후는 별로 볼것 없이 더 힘들고 긴 하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실 코스에 비해 거리도 1km 길고 고도 차이도 300m나 더 나고, ▲영실기암 같은 볼거리도 없이 초목으로 둘러싸인 길을 내려가야 하며, ▲돌길이 많아 내려가는데 더 힘이 듭니다. 더구나 ▲입산과 하산 지점이 다르면 내차를 찾으러 택시도 불러 타고 가야 하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쪽의 장점은 입구의 넓은 주차장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웬만하면 영실 코스 왕복을 추천드립니다.





'원래는 그쪽(영실)으로도 백록담까지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등산객 때문에 자연이 망가져서 지금은 통제되고 있죠.'

'그걸 복원하려고 제주도에서도 돈 많이 썼는데 복원이 잘 안 돼요.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한번 망가진 자연을 되돌리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죠.'


어리목으로 내려와서 주차되어 있는 영실 쪽으로 가는 도중에 택시 기사님께서 말해 주십니다. 원래는 남벽분기점을 거쳐서 백록담까지 갈 수도 있었다고 말이지요. 기사님 말대로 등산객들이 자연을 훼손했을 수도 있고, 또 알려진 대로 조릿대 같은 식물이 한라산 생태계를 파괴하는 바람에 이를 복원하려고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통제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지금 이 멋진 한라산의 인생 절경이 얼마 후에는 통제되어 못 가는 코스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한라산이든 어디든 당연한 길인 것처럼 막 다니지 말고 소중하고 겸허하게 다녀야겠다는 걸 배우고 갑니다. 더불어 지금 진행하고 있다는 한라산 생태계 복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이번에 못 가본 백록담이나 장구목오름도 가보겠다는 생각으로 말이지요.


물론 다음에는 보현이도 데리고 올 겁니다.



[연계 여행 정보]

- 최적 시즌 : 5월 말~6월 초(철쭉), 10월(단풍)

- 연계 여행지 : (제주 서부) 수월봉, 신창풍차해안, 제주항공우주박물관

                     (제주 서남부) 마라도, 가파도, 용머리해안, 송악산 올레길, 쇠소깍, 소천지


- 교통 : (영실통제소) 제주공항에서 31km, 제주터미널 또는 한라병원에서 240번(5,60분 간격, 편도 45분)

            *버스 편 문의 : 삼화여객(240) / 064-753-1621


- 먹거리 : 흑돼지, 옥돔구이, 몸국, 고사리육개장, 물회 (향토 음식), 해안가 카페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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