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배추 절이기, 김태정
<배추 절이기>
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
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
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다
소금을 덜 뿌렸나
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
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
점심 먹고 한번
빨래하며 한번
화장실 가며 오며 또 한 번
골고루 뒤집어도 주고
소금도 가뜩 뿌려주었는데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김태정 -
시인 김태정(1963~2011)
그녀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우수(雨水)’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생전 시집 한 권을 남겨놓고 짧은 생을 마감한 주목받지 못한 시인이었다.
글로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출세하고 싶은 욕망도 없었던 그녀는 홀로 전남 해남에서 조용히 살다가 암투병 중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김태정의 유해는 미황사에서 가장 빨리 피는 동백나무 아래 뿌렸다.
그녀는 ’ 시가 나를 숨 쉬게 하는 유일한 통로‘라며 시 쓰기 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장철,
사람 이름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11월 중순경부터~ 12월 중순까지가 ‘김장철’로 적당한 시기다.
김치는 너무 따뜻하면 쉽게 무르고, 너무 추우면 발효가 멈추므로
초겨울의 차갑고 일정한 기온이 김치 숙성에 가장 적합하다.
12월 초,
그러니까 지금이 바로 시기적절한 ‘김장철’인 것이다.
(보아라 딸, 김장철은 사람 이름이 아니란다. 알간?)
김장에서 가장 힘든 건 ‘배추 절이기’다.
처음 시집와서 맞은 김장은 1박 2일 코스로 이루어졌고, 그 이유가 바로 배추 절이기 때문이었다.
옥상에서 밤새 배추를 절여두고, 새벽녘에 자다 말고 일어나 배추를 뒤집어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고무장갑을 낀 손이 얼얼해질 정도로 배추를 뒤집었다.
절임배추를 사면 그만일 텐데, 어머님은 왜 손수 배추를 절이려 하셨을까?
생각해 보면, 그만큼 김장의 맛을 결정짓는 데 있어 ‘배추 절이기’가 핵심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소금이 얼마나 스며들었는지, 배추가 얼마나 숨을 죽였는지에 따라 김치의 향과 식감까지 달라진다.
그러므로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년 그 과정을 다시 밟곤 했다.
나에게도 절여지지 않은 뻣뻣한 배춧잎 같던 시절이 있었다.
왕소금을 뿌려도 쉽게 숨이 죽지 않는 시퍼런 배추처럼, 삭이지 못할 상처들이 많았던 탓이다.
그러나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과 빈틈없던 결혼생활로 절여지고 절여져 나는 비로소 늘어진 배춧잎처럼 되었다.
겨울 내 숙성되어 맛있는 김치로 다시 태어나는 배춧잎처럼 나 또한 그 시간을 지나 조금씩 제 맛을 찾아간다.
쓴맛은 빠지고, 짠맛은 눅어 들고, 남에게 한 포기 내어줄 수 있는 감칠맛 하나쯤은 생겨나지 않았을까?
김태정 시인은 그녀답게 조용한 죽음을 선택했다.
TV대신 라디오를 벗 삼아, 작은 마당에 채소를 일구며, 어느 문화재단에서 꽤 큰 금액의 기부금을 보낸다 했지만,
그녀는 나에게는 필요 없는 돈이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시인을 추모하는 시 중, 김사인의 <김태정>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한 사람이 ‘삶의 소금’에 오래 절여져 마침내 자기 고유의 맛을 지닌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고요하고 단단한지 새삼 깨닫는다.
시 속의 김태정처럼,
나 또한 버텨낸 시간만큼 더 깊어지고, 더 단순해지고, 삶 앞에서 조금은 겸손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언젠가 내 글도 누군가의 삶을 데워줄 한 조각의 맛이 될 수 있겠지.
‘한국인의 밥상’에 김치는 필수다.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다.
외국에서는 눈치를 보며 먹어야 했던 김치가 이제 어엿한 ‘수출 우수 음식 상품’이 되고 전 세계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김치독립을 한지도 어언 5년.
(김치독립 만세!)
나는 ‘배추 절이기’라는 김장의 핵심 노동을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했다.
그리고 김장의 양은 딱 우리 식구들이 먹을 수 있을 만큼으로 조정했다.
딸아이는 김장하는 날을 수육 먹는 날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건 언제나 딸과 남편이다.
오로지 이 맛을 위한 노동
수고했다 애미야.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 세상의 불빛 한 점 中, 김태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