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영순 Nov 18. 2021

14. 청심환을 먹었다

 아롱이 남매 때는 겨울이 그렇게 냥이들에게 혹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알아서 잘 지내려니 생각했다. 그걸 당연한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투는 사람만 벌이는 게 아니었다. 비비비의 여름이 지나가고 눈눈눈이 계속되는 겨울이 제대로 왔기 때문이다.

눈 덮인 아이들의 집. 
눈 내린 날은 이렇게 밥을 먹였다. 아로와 아미가 상자 위에서 밥을 먹고 있다.

 12월이 되자마자 날이 바짝 추워졌다. 은토끼님은 10월 말부터 집에 핫팩까지 넣어주셨다. 자꾸 누군가 집을 가져다 버려 스티로폼 아이스박스를 구해 집을 만드신 뒤 거기에 따뜻한 이불까지 사서 깔아주셨다. 정성이??? 나는 겨우 스티로폼 아이스박스 몇 개 구해다 드린 게 한 일의 전부였다. 집이 멀어 스티로폼 아이스박스를 구해 들고 오시기 힘들게 뻔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이 드나들만한 구멍을 뚫고 두터운 검정 비닐을 씌워 집을 만드셨다. 그렇게 만들어준 집안에서 냥이들은 추위를 잘 견디는 모양새였다. 특히 고등어는 추위를 심하게 탔다. 내가 가서 밥을 주면 집 밖을 나섰다가도 바로 돌아서 들어가 버렸다. 추워서 밥도 먹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할 수 없이 집안에 밥그릇을 넣어줘야 했다.

 온갖 정성이 든 수제 집들을 가진 냥이들이 전국에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나름 아롱이 새끼들은 자유와 함께 따뜻한 겨울나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은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면서 낮에 잠시 따뜻해지는 것 같더니 오후부터 강풍이 몰아친다는 뉴스가 있었다. 바람이 조금씩 거세게 느껴졌다. 이삼일 전부터 아미가 잘 먹지 않아 나는 약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미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았다. 항상 뭘 줘도 묵묵히 먹어 일부러 더 챙기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추운 겨울에 먹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건 사람이나 냥이들이나 마찬가지다. 오전에 눈이 온 데다 날이 춥다고 집 안에다 밥을 나눠서 넣어주고 돌아온 얼마 후였다. 아미의 상태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게 문제였다.

 

 은토끼님이 다급하게 전화를 하셨다. 보통 우리들은 밥을 먹이거나 그날의 특이한 일을 카톡으로 주고받는다. 그러니 직접 하신 전화는 급한 연락이 분명했다. 

 겨울이 다가올 무렵부터 수컷 냥이들이 아이들 집 주변을 기웃거리는 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아로는 턱시도 무늬의 수컷 냥이를 따라 하늘공원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가끔 보였다. 우리가 불러도 잠시 멈추었다 그냥 가 버렸다.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아로의 행동을 사람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 것 같다. 마치 딸의 행동이 조신하지 못하다고 느끼면 화를 내는 엄마들처럼?


 아로와 아미는 태어난 지 이미 9개월. 발정의 시기가 왔을 것이다. 그날 은토끼님은 밥을 주시다 아미의 엉덩이 주변에서 상처를 발견하셨다. 심하게 물렸는지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걸 보시고 놀라서 하신 연락이었다.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내가 사진을 찍어 동물병원을 갔다. 수의사 선생님은 털 때문에 사진상으로는 알아보기 힘들다며 직접 데려오라고 하셨다. 동물병원에서 급한 대로 이동장을 빌렸다. 어렸을 때 아미는 유별나게 겁이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게 사람들을 잘 따랐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머리를 쓰다듬어도 가만히 앉아 있어 나를 기겁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미는 우리가 잡는 대로 순순히 이동장에 들어갔다. 공원 대로 건널목을 건너 골목길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어디론가 자기를 데려간다는 공포심에 아미는 몸부림을 치더니 이동장의 헐거운 작은 틈 사이로 탈출했다. 정말 작은 틈이었다. 그러더니 건물 주차장에 주차된 차들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다. 뛰어오신 은토끼님까지 피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잘못하면 아미가 생판 모르는 곳에서 헤멜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속으로 가방 좀 좋은 거 주지 이렇게 낡은 걸 줬나 원망도 들었지만 병원 데려가는 걸 쉽게 생각한 내 탓이 더 컸다. 30분 정도는 이리저리 차 아래를 빙빙 돌았던 것 같다.

 "아미야. 병원 안 가고 공원에 다시 데려다줄 테니 제발 이리 와 줘. 응!"  

 애원을 했지만 이미 나는 아미에게 믿을 수 없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고양이들이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알고는 있었다. 순식간에 아미가 주차장을 벗어나 대로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바람같이 공원을 향해 내달린 것이다. 정말정말 아찔했다. 비호처럼 날아 공원을 향해 뛰는 아미를 본 순간 나와 은토끼님은 말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아미가 무사히 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천만다행으로 아미가 뛰던 그 순간 건널목 신호등은 초록색 보행신호였다. 차량이 모두 신호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하늘이 돕는다는 말을 나는 그날 실감했다. 

 공원으로 돌아간 아미를 확인하고 약만 지어다 은토끼님에게 맡긴 뒤 집에 돌아왔다. 사정을 설명하고 상처에 먹일 약만 받고 이동장을 돌려준 뒤였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청심환을 찾았다. 유통기한이 언제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물과 함께 그걸 삼켰다. 침대에 가서 누웠다. 나보다 더 놀라셨을 은토끼님에게 청심환 하나를 가져다 드려야지 하면서도 더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전 13화 13. 빈 둥지 증후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