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에게 매일 30분만 악기 연습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할 때가 있다. 아이도 돌봐야 하고 긴 시간을 연습하기 어려우니 최소한 음정과 박자만이라도 연습하자고 한다.
음악을 잘 모르시는 분이라면 내가 아내에게 그렇게 조언할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다른 연주 동료들이 들으면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것도 같다. 아내는 악기로 대학을 전공했고 유학을 다녀왔으며 직업이 오케스트라 연주 단원이다. 매일 출근해서 연습하고, 매주 청중을 대상으로 연주회를 한다. 초견(sight-reading, 初見, 악보를 처음 보고도 바로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15년 이상을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해왔기 때문에 웬만한 곡들은 이미 연주해본 경험 많은 전문가다.
나는 왜 그런 조언을 하는 사람이 됐을까?
이번 글은 무언가를 잘한다거나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슬그머니 찾아오는 위기'를 넘기기 위한 노력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개구리와 비커 얘기를 다시 해보자.
개구리를 뜨거운 물이 담겨있는 비커에 넣으면 깜짝 놀라 뛰쳐나간다. 제목처럼 '조종사의 위기'라고 하면 공중에서의 위기를 떠올리기 쉽다. 특히나 이미 뜨거운 물에 놓이는 개구리의 처지처럼 아주 급박한 위기 말이다.
개구리를 적정한 온도의 물이 담긴 비커에 넣었고 얌전히 앉아있다고 하자. 그러고는 밑에서 약불로 서서히 비커를 가열한다. 천천히 올라가는 온도 속에서 개구리는 뛰쳐나오지 않고 그대로 익는다.
'코로나'를 위기라는 단어와 함께 쓰기도 한다. 조종사의 직업적 관점에서 보건대, 비교적 서서히 데워지는 물이 담긴 비커 안의 개구리가 겪을 위기와 유사하다. 비행 횟수가 줄어 수입이 낮아진 것은 둘째 치고, 가끔 하게 된 비행은 조종사로서의 실력 유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번 편에서는 여러분이 제목을 보고 직관적(이후 '직관적' 단어 빈번 출현 주의)으로 생각했을 급박한 위기가 아닌 조금 다른 위기를 언급해 보고자 한다.
안티프래질(Antifragile)
어떤 과목은 시험 점수가 좋아도 나중에 그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재무관리가 그랬다.
대학 졸업 후 뜻밖에 '재무관리'하면 연결되어 생각나는 책이 생겼다. 2013년 MBA를 전공했는데 담당 교수님이 '안티프래질'이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다. 그해 10월에 출판되었으니 따끈따끈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를 알게 된 계기다.
프래질(fragile)이라는 단어는 초등학생이던 시절 배송 상자에서 처음 만났다. "프래자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애매했던 이 단어는 항상 함께 있는 그림 덕분에 '깨지기 쉬운’이란 뜻으로 기억하기 쉬웠다.
안티프래질은 나심 탈레브가 반대의 접두사 anti를 fragile에 붙여 만든 단어로, “경제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비슷해서 평소 작은 실패를 통해 스트레스를 받아야 큰 위기가 왔을 때 견딜 수 있는 강한 체질(Antifragile)로 진화한다”라고 설명하며 사용했다.
경제를 거론하는 뭔가 거대한 것 같은 이 이론을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나의 인생에 적용하게 된다.
조종사의 기량 점검과 안티프래질
2018년의 일이다. 그즈음 어떤 사고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중국민용항공총국(中国民用航空总局, 우리나라의 국토교통부에 해당)은 중국 내 모든 조종사의 기량을 가늠하기로 한다. 시뮬레이션에서 체크해보는 방식이었다. 하필 나는 다른 외국인 기장과 함께 우리 회사에서 첫 번째로 체크받는 1번 조가 됐다.
2013년 어느 봄날, 예술의 전당 IBK챔버홀에서 아내가 개인 독주회를 한 적이 있는데, 앙코르까지 총 여섯 곡을 두 달여간 준비 했다. 우리는 김포공항에 가까운 인천에 살고 있었고 아내는 서초동에 있는 스튜디오를 대여해 연습했다. 나는 아내가 요구하지 않았지만 되도록 매 끼니를 직접 준비하려 노력했고 비행이 없는 날은 운전해서 연습실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기 때문이다. 교향악단에 소속돼 있기 때문에 평소에도 연주를 계속해오고 있었지만 독주회는 또 다른 이야기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하는 연주는 One of them일 뿐이지만, 독주회는 홀로 주목 받아야 한다. 손가락의 굳은 살이 평소보다 더 두꺼워지도록 연습하게 만든다
조종사들도 늘 하는 업무가 비행하는 것이지만 시뮬레이션 훈련은 또 다른 세상이다. 시뮬레이션은 비행기에서 각종 비정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조종사가 잘 해결해내도록 훈련하고 평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 비행기로 엔진 하나 끄고 비행하는 등의 비정상 상황을 일부러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에게는 개인 악기가 있어 미리 솔로곡을 연습할 수 있지만 조종사에게는 개인 비행기나 시뮬레이터가 없다. 시뮬레이션 훈련이 다가와도 이론 공부 외에 마땅히 준비할 게 없는데 훈련 첫날은 대부분 미숙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루, 이틀 훈련을 반복하며 적응하고, 마지막 날 체크 때 비정상 상황을 극복하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 항공사는 시뮬레이션 훈련 때, 훈련 하루, 체크 하루로 총 이틀간 한다. 우리 회사를 포함한 중국 항공사의 경우 훈련 3일에 체크 1일을 더하여 총 4일간 한다. 최근에는 개인 기량 향상이라는 명분으로 훈련을 하루 더 해서 총 5일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훈련을 많이 할수록 체크 보기가 편하다.
앞서 중국 정부의 조종사 기량 검사는 단 하루의 훈련도 없이 바로 체크를 봐야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는 목청을 채 가다듬지도 못했는데 대중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하는 가수나, 연습 투구를 제대로 못했는데 마운드에 서야 하는 투수의 입장과 비슷하다.
이전 편에서 블랙스완을 언급한 바 있다. 시뮬레이션 체크 또한 불합격(Fail)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한 번 불합격하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치명적이다. 나는 정부의 체크를 처음부터 잘 타야만 하는 블랙스완으로 여겼다. 체크 며칠 전, 동료 기장님이 "식사 같이 하시죠~"라고 했을 때, "이번 체크는 블랙스완과 같아요. 평소보다 준비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식사는 다음에 하시죠"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
보통은 시뮬레이션 2~3일 전부터 공부를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무려 열흘 전부터 시작했다. 비행을 마치고 집에 왔던 날에도 그동안 했던 비정상 과목들을 정리하며 공부했다. 몸은 무겁고 정신은 지쳐서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맥주 한 잔 하며 드라마 보는 것이 무척이나 당겼지만 억지로 엉덩이를 책상 의자에 붙였다.
체크의 결과가 어땠을 것 같은가? 이 정도까지 언급했으므로 소용이 없었다거나 불합격했다는 전개가 예상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흘씩 하는 정기 훈련으로 치자면 나는 첫날부터 비정상 상황에서 비행기 조작을 잘 해냈고 그렇게 통과했다.
같은 장소에 있던 모두에게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나와 파트너였던 기장이 불합격했다. 시뮬레이션 조작은 항상 2인 1조로 한다. 내가 체크일 때는 파트너 기장이 부기장 역할을 하고, 그 기장이 피시험자인 경우 내가 부기장 역할을 해준다.
그는 시뮬레이션 훈련 첫날에 했을 법한 정도의 실수를 했다. 지상충돌, 활주로 이탈 등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민용항공총국의 검열관은 불합격을 줬다.
수반된 조치는 30일간 비행 정지였다. 이는 생각보다 가혹한 불이익이었는데, 그전까지는 바로 재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그만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이번 시뮬레이션 체크는 사전 훈련 없이 단번에 비정상 상황에 대한 체크를 봐야 했고, 그것은 피시험자로서 준비가 덜 된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불합격 기준이 평소보다 엄격했다.
무엇보다, 불합격에 수반된 불이익이 예상보다 컸다.
이때 했던 경험은 앞으로의 시뮬레이션 훈련과 체크를 더욱 안티프래질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훈련을 며칠씩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정기 시물레이션 때도 항상 첫날부터 잘 탈 수 있게 최소 1주일 전부터 아래와 같이 준비하고 가는 것을 일반화했다.
나만의 시뮬레이션 센터
항상 비행 관련 설명 앞에서 작아진다. 조종사가 아닌 이가 읽으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대략 훑어본다고 여기면 좋을 것 같다
정부의 시뮬레이션 체크 직전에, 이론 공부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비행 조작 연습을 함께 했었다.
랜딩은 정면보다 옆에서 바람이 심하게 불 때 더 어렵다. 시뮬레이션에서 하는 어려운 과목 중 하나는 최대 옆바람(측풍, 測風)이 부는 상황에서, 엔진 하나를 끈 채, 공항 접근 시설 도움 없이 시각으로 높낮이를 측정하며 내려야 하는 것이다(Max cross wind single engine raw data). 까다로운 만큼 체크 때 항상 하기 때문에 특히 이 상황을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연습했다.
마지막 랜딩을 위한 당김(Flare) 때 다음과 같은 조작이 망설임 없이 나와야 한다.
꼬리 날개에 수직으로 붙어 있는 방향 조절 장치(방향타, 러더 Rudder, 발로 차게 되어 있음)를 어느 쪽으로 차야 하는지(바람 방향에 의한 영향)
그러면서 조종간은 어느 쪽으로 꺾어 줘야 하는지(바람 방향에 의한 영향)
착륙 직후 엔진을 역추진 하게 만들어 속도를 급하게 줄여주는 리버서(Reverser)는 어느 쪽을 써야 하는지(작동 중인 엔진에 의한 영향)
착륙 후 활주로에서 속도를 줄이면서는 어느 쪽 러더를 차 줘야 하는지(작동 중인 엔진에 의한 영향)
실제로는 굳이 미리 정하지 않아도 밖에 활주로가 보이는 상황에 따라 마지막에 손을 어느 쪽으로 기울이고 어느 발을 차 줘야 할지 판단한다.
왼쪽에서 바람이 심하게 불 경우 조종실에서 활주로를 보는 상황은 위의 그림과 같다. 바람에 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행기의 머리(기수, 機首)가 바람 방향을 향하면서 접근한다. 그래서 활주로는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비행기는 여전히 활주로 중심으로부터 길게 연장한 선의 중심에 있다.
외부에서 비행기를 바라볼 경우의 모습이다. 이 경우, '활주로가 오른편에 보이니 오른발을 차면서 왼 손은 왼쪽으로 꺾어주면 되겠구나'라고 판단하게 된다.
여러분은 수도꼭지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물이 나오는지 아는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물이 나오고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물이 잠긴다. 내가 질문해보는 이유는 나는 '물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 수도꼭지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지~'라고 생각하며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돌려본다. 만약 잠긴 상태에서 잘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반대로 돌려 결국엔 물이 나오도록 한다. 대개는 과거 자주 사용했던 익숙함이 처음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려보게 만든다.
랜딩 마지막 순간, 비행기의 머리를 활주로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러더를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차 줘야 하는데 수도꼭지 열 듯해서는 열 번을 제대로 차 줘도 한 번은 반대쪽으로 차게 되기 마련이다.
나는 보잉 737 비행기를 탄다. 7,000여 시간을 비행하는 동안 3,600여 회를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이륙했고, 2,150 회를 내가 직접 랜딩 했다. 시뮬레이터에서가 아닌 실제 상황에서 최대 옆바람을 받으며 내려본 것은 직접 랜딩 했던 횟수의 0.5%인 10회 정도다.
최대 옆바람 랜딩은 난이도가 어려운 반면 실제 경험은 드물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다.
따라서 위의 조종실 상황만으로 직관적인 행동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활주로가 오른편에 있으니 어느 발을 차야 하더라? 기수가 왼 편을 향하는 것이니 오른발을 차면서 왼 손은 왼쪽으로 기울여야겠지?'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문제는 바람이 심하게 불 경우 비행기 또한 심하게 흔들려 조작에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이 비행기로 내릴 수 있는 최대 옆바람 풍속은 초속 15미터(15m/s, 30노트)다. 중심 부근의 최대 풍속이 17.2m/s 이상인 경우 태풍이라고 하니, 15m/s만 해도 어마어마한 바람이다.
낮은 확률로 수도꼭지를 처음부터 잠그는 방향으로 돌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듯, 러더를 반대로 차게 되면 바람에 의해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좀 더 직관적으로, 단 한 번의 틀림이 없는 행동이 나오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위 사진은 돌리는 형태의 수도꼭지보다 직관적이다. 위로 올리면 물이 나오고 내리면 잠긴다. 잠긴 상태에서 이미 내려져 있으므로 올리면 나온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옆에서 바람이 심하게 불 때 착륙 직전 어느 쪽 러더를 차 줘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어떤 한 가지만 보면 직관적으로 손과 발의 방향이 나오도록 한 것인데, 위 그림 중 비행기 계기에서 보여주는 빨간 동그라미 안의 바람 방향이다. 비행기를 수동 조작하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마지막 순간 화살표를 보면 몸이 반응할 수 있게 나만의 Cue(신호, 여기서는 인지 신호)를 만들었다.
Cue를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손과 발이 또한 즉각 반응하도록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연습했다. 바람 방향이 좌측인지 우측인지, 엔진은 왼편과 오른편 중 어느 쪽이 살아있는지 등을 미리 정하고 그에 맞게 했다. 다음은 왼쪽에서 바람이 부는데 오른편 엔진만 사용이 가능한 상태라고 가정한 상황의 연습이다.
기본자세는 책상 앞 의자에 앉는 것이다. 눈을 감은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양팔을 들어 올려 왼 손은 조종간을, 오른손은 엔진 출력 장치를 잡고 있다고 상상한다.
시작은 머릿속으로 50부터 10 단위로 숫자를 줄여가며 센다. 비행기가 지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자동으로 고도를 불러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40이 되면 왼손을 당기고(flare), 30이 되면 오른손은 팔꿈치를 몸 쪽으로 당기면서 파워를 줄인다.
10이 되면 왼손을 바람이 불어오는 쪽인 왼쪽으로 돌리고 동시에 오른발을 밀어준다.
비행기가 접지되는 순간, 중지를 오므리며 손목을 꺾어 젖혀 올리고, 이번에는 발을 바꾸어 오른발을 밀어주는 모습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왜 저렇게 허우적 대는지 궁금하면서도 우스운 모양으로 보일 것 같다.
시뮬레이션에서 바람 방향과 작동하는 엔진만 보고도 마지막 순간에 별도의 고민이나 혼란 없이 즉각적으로 손과 발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향으로 조화롭게 반응되도록 하기 위한 연습이었다.
하나의 예를 설명한 것인데 이렇게 허우적 연습하는 동작이 더 있다. 모든 동작들을 열흘간 매일, 몇 시간씩 했다.
나의 시뮬레이션 센터는 아무 계기도 없는 책상 앞에서 이미지로 그려낸 공간이었다.
지금, 시뮬레이션 체크에 대한 나만의 노하우를 언급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좋은 아이디어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벽보고 앉아서 이미지로 그려가며 실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체크 전 며칠간 하는 시뮬레이션 훈련 동안 연습으로 적응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필요 없기도 하다. 따라서 그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연습을 해본 적이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장이 이런 연습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
중국 항공사에서 일하는 게 왜 힘드냐고요?
중국 항공사에서는 시뮬레이션 훈련 말고도 조종사들을 괴롭히는 것이 있다. 비행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동안 기록되는 데이터를 QAR(Quick Access Recorder)이라고 하는데 회사는 이 수치를 기반으로 조종사가 적절히 비행했는지 평가한다. 지상이동, 이륙, 공중 비행, 착륙 등의 단계에서 표준 범위를 벗어났는지 확인한다. 예를 들어 지상이동 때, 60도 이상으로 회전하는 경우 속도가 11노트(20.4km/h)를 넘으면 안 된다. 넘길 경우 QAR에서 비정상 데이터로 인식하고 시스템은 자동으로 해당 조종사에게 QAR이 1건 발생했다고 알려준다.
중국으로 이직한 몇 개월밖에 안 된 때였다. 휴가로 한국에서 아내와 단둘이 점심식사를 하는 중에 있던 일이다. 참고로 코로나가 없었다면, 중국 항공사에서의 근무 조건은 매달 중국에서 20여 일간 머물며 비행하고 연속 11일을 한국으로 휴가 가는 것이다.
식사 중, 뜬금없이 중국의 담당 여직원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 보통은 문자로 메시지를 보내기 마련인데 직접 전화가 왔으므로 응답하기도 전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앞에 앉은 아내도 덩달아 긴장했다.
여직원은 나의 QAR 수 즉, 비행 중 정상 범위가 넘어간 건의 수가 많으니 주의하라고 알리기 위해 전화했다고 말했다. 모든 조종사의 개인별 QAR 수를 합산해 숫자가 높은 기준으로 순위를 매겼는데 내가 TOP 10 안에 들었다고 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한국에서 문제없이 비행했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중국 이직까지 성공했던 터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QAR이 많기 때문에 문제 있는 조종사 취급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무슨 일이에요?'라고 무언의 궁금함을 보이는 아내에게 내용을 설명했다.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다. 똑같이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평소 기술에 대해 평가받는 일이 부담되는 것이란 걸 알기에 그게 감정을 북받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때, 우리 회사에 외국인 기장은, 아직은 나와 함께 합격한 두 명을 포함하여 한국인 세 명뿐이었다. 비행을 시작하고 몇 달 후, 우리 모두는 QAR에서 기준 데이터를 초과한 건이 많은 조종사 TOP 10 안에 들었다.
더 심각했던 건, 우리는 그 해 6월부터 비행을 시작했는데 단 몇 개월 만에 우리보다 6개월 더 비행한 조종사들의 기록을 앞선 것이다. 더 적게 비행하고도 더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는 얘기다.
지금 와서 아내가 울었던 생각을 하면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데, 어찌 보면 이직한 초기였기에 생긴 해프닝이기도 했다. 중국 항공사에는 한국에서의 비행 스타일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아무도 직접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고 다만, QAR이 나온 결과를 보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긴 시간 동안 적응해 나가야 했다.
우리는 특히 랜딩 중에 활주로에 길게 접지(接地) 한 경우가 많아 상위에 랭크됐다. 보통 착륙하려는 비행기가 지상으로부터 50피트(15.2미터) 위에 위치할 때가 활주로의 시작점이다. 여기에서 시작해 활주로의 750미터 이내에 지상에 닿아야 QAR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길게 내리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한국 항공사가 취항하는 공항들은 대부분 활주로가 길어서(3,000미터 이상), 길게 내리더라도 사뿐히 내리는 데에 더 신경 쓰는 편인데, 중국은 소도시 공항의 활주로가 짧은 경우(2,400미터)가 많아 QAR 조건이 더 까다롭다.
이 일이 해프닝(여기서는 '생각지 못하게 일어난 일이지만 해결이 가능했던 일'의 의미)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교관들이 길게 랜딩 해서 나오는 QAR은 회사에서 신경 쓰지 않으니 무시해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갑자기 회사가 모든 QAR을 합산하고는 우리에게 경고를 주었다.
QAR 중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비행기가 지상에 닿는 하중이 비행기 무게의 1.6배를 넘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랜딩에서 활주로에 길게 접지하는 문제와 함께 두 가지 QAR을 종합해 간단히 표현하자면 짧게 내려야 하는 것과 부드럽게 내려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가 상반된다는 점이다. 짧게 내리면 비행기의 에너지가 많은 상태로 접지하게 되고 접지 하중이 높아지기 쉽다. 엔진의 힘을 줄인 상태에서 공중에 오래 머무르게 되면 에너지가 적어져 하중 부담이 줄지만 접지 거리가 길어진다. 하중은 에너지와 비례한다.
승객도 모르게 내리면 1.1G(Gravity, 하중)에서 1.2G 정도 사이 값이 나온다. 비행기 무게의 1.1배 하중이라는 뜻이다. 중국 항공사에서는 때로 1.5G가 나오더라도 어쨌든 750m 이내에 내려야 한다. 1.5G는 꾸벅꾸벅 졸던 승객이 깜짝 놀라 "무슨 일이야?" 싶을 정도의 충격이 비행기에 가해진다.
이것은 랜딩 때 하중 평균이 1.3G이지만 표준편차가 0.2G여서 제한치인 1.6G를 가끔 넘어서는 것보다, 평균은 1.4G지만 편차가 0.1G여서 제한치를 넘지 않는 랜딩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기계적으로 일관된 랜딩 스타일이 요구된다.
중국 항공사에서 일하는 게 왜 힘드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중국은 한국에 비해 QAR을 체크하는 가짓수가 많고 조건이 까다롭다. 중국에서는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3~4년 단위 계약의 용병 신분이므로 시뮬레이션이나 QAR로 평가받는 것에 대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로 비행 편이 현저하게 줄었다. 이것은 조종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아지게 됐다는 것이기도 하다. 외국인이 시뮬레이션 체크에서 불합격했을 때, 처음에는 얼마 후 다시 체크를 보고 합격하면 그만이었다. 중국 정부 체크 때는 30일 비행 정지를 줬다. 코로나 이후, 계약을 해지했다.
모든 비행을 안티프래질 하게...
중국 항공사로 이직한 지 6년 차인 지금은 입사 초기에 비해 QAR 숫자가 현저히 낮아졌는데, 한국에서 랜딩 할 때와 비교해 스타일을 바꿨기 때문이다. 표준편차를 줄이기 위해 랜딩 직전 자동으로 외치는 기계 음성이 40피트라고 하면 당김(Flare)을 시작하고, 20피트라고 외치면 파워를 빼기 시작하는 것으로 단순화했다.
여전히 QAR에 스트레스받으며 늘 신경 쓰는데, 최근의 문제는 코로나 이후 비행 횟수가 적어지면서 다음에 비행하는 시간차가 길어졌다는 것이다. 마지막 비행 이후 4~5개월 만에 비행 스케줄이 나오기도 했다. 40피트에 당김(Flare)을, 20피트에 파워를 빼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해도 이론대로 몸이 반응하는 감각이 떨어지기 충분한 시간차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간헐적 비행임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인 신체 반응이 가능하도록 연습하기에 이르렀다. 시뮬레이터 때와 마찬가지로 보통의 상황에서 랜딩 하는 연습을 벽보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20일 이상 비행기 운항 간격이 발생할 경우, 승객 탑승 때부터 랜딩 후 시동을 끌 때까지의 절차에 대해 미리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시뮬레이션해보고 간다. 이것은, 정말 귀찮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의 직업적 안티프래질화(化)의 부작용이 아내에게 불똥이 되어 튀었다. 아내에게 매일 30분만 악기 연습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아내는 "나한테 왜 그래?"라고 대꾸한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내가 아내에게 음악과 관련해 조언한다는 것이, 한 편으로는 개인의 능력을 무시한다고 받아들이게 된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따금씩 연습 얘기를 꺼낸다. 아내의 이름에 '수'가 있어 애칭을 '슈'라고 부르는데, 아내에 대한 나의 조언을 우리는 '슈불똥'이라고 부른다.
앞서 작은 실패를 통해 스트레스를 받아야 큰 위기가 왔을 때 견딜 수 있는 강한 체질(Antifragile)로 진화한다고 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시뮬레이션 체크 경험, QAR, 코로나로 인한 간헐적 비행 등은 작은 실패를 통해 받는 스트레스 또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이다. 나를 안티프래질 하게 만드는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중국 조종사로서의 직업적 안티프래질... 정말 귀찮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위기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