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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원 Apr 02. 2024

Simple days

Simple days #02

우리 집 작은 남자는 요즘 자주 그림을 그려온다. 하얀 종이에 휘리릭 2분 정도 그려서 5분은 설명하는 듯하다. 매번 그려오는 그림이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으나, 늘 새로운 그림 해석을 내어 놓는다. 우선 그 그림의 공통점은 면이 없는 선으로 된 사람들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소위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졸라맨"이라고 부르지.
그 그림들을 설명할 때 아이는 엄청난 에너지를 눈으로 쏟아낸다. 그리고는 내 눈을 맞췄다가 시선을 내 입으로 내리고 잠시 정적을 유지한다. 나는 알고 있다. 아이는 나의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 세상 엄마들은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리액션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그랬듯 적당한 칭찬과 공감 리액션을 반사적으로 내뱉는다.
사실 한 달 전, 일주일 전, 어제 그려온 그림들과 도대체 뭐가 다른 거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걸로 내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에 뭔가 한 스푼 더 하지 말자고 스스로 제동을 건다. 평소의 아이는 그런 공허한 이야기라도 괜찮다는 듯 돌아가곤 했다.  
(마치 기대한 게 없었다는 듯 그 역시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 방으로, 제 갈길로 휘리릭 돌아간다.)


  

오늘 나는 리조트 룸에 앉아 창 밖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1월 발리의 우기로 더더욱 짙은 초록이 끝없이 펼쳐진 우붓이다.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서 아이패드를 꺼내서 이렇게 저렇게 긁적여 본다. 한동안 펜드로잉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머릿속으로는 벌써 엄청난 드로잉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20여 분 동안 나는 점만 찍었다 지우고, 선만 그었다가 지우고 반복이다. 결국 나는 오늘 아무것도 완성한 것 없이 아이패드를 닫았다.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그림으로 무엇을 남기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완성하지 못한 그림에 아무것도 못하고 흘러간 나의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면서 괜히 우울해졌다.

그즈음 작은 남자가 큰 남자와 함께 룸으로 들어왔다. 리조트 풀에서 한참을 놀다가 배고파져서 잠시 들어왔다고 한다.


 " 엄마 뭐 하고 있어? 그림 그려? "


물기도 닦지 않고서 옆에 붙어 앉아서는 내가 덮어둔 아이패드를 연다.

그리고는 내가 그렸다, 지웠다 한 그 페이지에 거침없이 선을 그어댄다.

평소 같았음 관심 없었을 텐데, 지금은 그 선 하나가 뻗어가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엄마 숲 그리고 있었어?"


한번 묻고는 뭔가 페이지를 가득 채워간다. 2분 정도만에 그 페이지가 선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는 다 그렸다면 나에게 그림 설명을 한다.


" 엄마! 이건 나무야. 이 선들 보이지? 나뭇잎들이 너무 많아서 이 선들이 겹쳐져 보이는 거야. 그리고 이건 구름이야. 구름이 있어야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알겠지? 그리고 여기 사람 보이지?(졸라맨) 이건 엄마랑 나야.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지?
이건 페이크야 페이크!
(요즘 이 단어를 게임에서 배우더니
여기저기 써먹고 있다. 이런 말을 쓰면
스스로가 좀 멋지다고 여기는 듯하다.)

여기 창문에 엄마랑 내가 비치잖아.
꼭 저 숲 속에 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이게 거울효과지!
(그냥 로블룩스 거울미로 게임에서
또 가져온 단어다. )


아이가 하는 설명을 경청했다. 이건 진심이다 맹세코 단 한순간도 다른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아이의 눈과 입과 그림만 오갔다. 너무 멋졌다! 그 순간은 아이가 엄청나게 유명한 화가 같았고, 도슨트 같았다.  반나절 간 채우지 못한 나의 공백 위로 새로 생긴 수많은 선들은 내가 오늘 내내 바라보고 있던 그 우붓의 숲뷰였다.


난 왜 시작도 않고 수많은 계획만 세우고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걸까.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일들을 아래에 깔고서 또 내일의 일들도 해결 못하고 쌓아 가겠지. 그렇게 쌓고, 또 쌓아온 일들에 파묻혀 나를 가두고 쌓인 일들의 몇 배가되는 걱정을 가지치기해 나가며 스스로를 괴롭혀 왔다.


나는 괜찮은척했고, 안 아픈척했고, 완성되고 완벽한 것만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나무줄기 하나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새삼 아이가 멋져 보이고 존경스러워 보였다. 졸라맨이라고, 그림의 변화가 없다고 무시하던 내가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아이는 그 선 하나로 자기의 생각을 그렇게 펼쳐 보여왔던 것이다. 오늘의 선이 내일의 선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어졌어도 이건 이미 아이에게 다른 이야기였던 것이다. 난 선만 바라보느라 아이의 마음을 못 들여다보았다. 이런 바보 같은 엄마가 또 있을까?


' 그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여 줄걸. '


우붓에서 한 달 살기 중 오늘은 아주 단순한 하루였다. 일부러 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고, 애써 나는 쉬고 있는 중임을 표출하려는 의도된 날이기도 했다. 아침을 먹었고, 모두 수영장으로 보낸 뒤 혼자 숲멍을 했다. 점심을 먹었고 오후에는 쏟아져 내리는 굵은 빗줄기를 한참 바라봤다. 저녁을 먹었고, 잠들었다.


두줄이면 정리되는 단순한 나의 하루에도 새로운 내가 깨알같이 박혀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오늘은 단순하기만 하지 않았고, 내일과 같지 않을 것을 안다. 조금씩 길을 찾아가는 듯했고, 선 하나를 그어 놓은 것 같았다. 나의 여행이 단순하면 단순해질수록 더 많은 나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 바투르 산 지프 투어를 할 예정이다. 별과, 일출을 다 볼 수 있는 투어인데 여기서 또 어떤 나를 찾을 수 있을지.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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