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문화를 넘어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감동을 주며, 인간의 품위와 가치를 깊이 있게 사유할 기회를 주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 지식을 단지 사회적 지위를 높이거나 경제적 부를 늘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며 읽기 어려운 책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에게 고전은 지혜의 보고이자 삶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인생의 푯대이다. 고전을 읽으면 우리가 겪었던 과거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고, 현재의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며, 다가올 미래의 문제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 이렇게 인생의 가장 고귀한 것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월든』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 안에는 가장 현대적인 질문에 대하여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의 신탁이나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 신의 신탁도 밝히지 못한 해답들이 들어있다."라고 했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다.
『데미안』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청소년 교양을 함양하기 위한 추천 도서라는 명목으로 숙제처럼 읽었던 그 책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 그저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수능을 앞둔 고3 시절에 만난 『데미안』은 조금 달랐다. 공부가 하기 싫어 반항의 의미로 읽었던 그 책은 이상하게도 나에게 위로를 건넸다. 싱클레어의 고민이 남 일 같지 않았고, '껍질의 파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방황하는 주인공을 보며 막연하게나마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은 또다시 흘러 군대를 제대하고 하루하루 별생각 없이 보내던 때, 우연히 독서실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헤르만 헤세의 지적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싱클레어 내면의 변화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데미안의 의미심장한 대사는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처음으로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다른 사람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처음 발견했다. 이후 헤르만 헤세가 이 작품을 저술한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고 그의 다른 작품을 읽음으로써 『데미안』을 보는 관점은 다시 변했다. 최근에 읽었을 때는 그 책을 읽었던 추억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고전 문학, 특히 서양의 고전 문학들의 상당수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그러한 책들이 기독교인들의 교과서로 활용되었던 덕분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이전의 고전들을 정부 관직에 들어가기 위한 기본 지식으로 여기고 학습했다. 인문학을 오래 공부해왔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곧 인재로 여겨졌다. 고전을 인재 등용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동양의 고전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혁명이 있었던 18세기를 기준으로 이전을 인문학의 시대로 이후를 과학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시대를 이끌었던 명사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시대 구분은 더욱 명확해진다. 왕, 군주, 철학자, 종교인이 이끌었던 시대에서 과학자, 기업가, 환경전문가 등이 이끄는 시대로 변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바뀌어도 고전은 여전히 존재한다.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과학, 경제, 응용과학 등과 관련된 고전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지중해 너머의 세계를 꿈꾸던 젊은이들이 『코스모스』를 읽으며 우주의 탄생을 사유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변하지만, 고전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독서를 즐기는 사람에게 커다란 축복이다. 내가 그 책을 집어 들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오직 나만을 위해 기다려준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있는 고전, 베스트 프렌드는 물론 영혼의 동반자라도 하기 힘든 일이다. 내가 아무리 많이 변했어도 고전은 아무런 말 없이 나의 추억과 함께 그저 따뜻한 미소를 건넬 뿐이다. 고전은 저명한 작가가 저술했기 때문에 고전인 것은 아니다. 누구나 나만의 고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 전환점을 만들어준 책,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희망 손을 내밀었던 책, 힘들고 지친 나를 위로했던 책 모두 고전이다. 결국 고전의 판단은 시간과 독자의 몫이다. 겨울의 끝자락, 오랫동안 책장에 묵혀 두었던 고전을 다시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