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습 만화책만 읽는 아이

by 책선생

# 이 주제의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몇의 사례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된 것을 각색하여 재구성한 인물임을 알려드립니다#


윤정이는 초2 여름 때 처음 수업을 시작했다. 윤정이는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을 하셔서 어릴 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주로 그 시간을 학습만화와 흥미위주의 가벼운 책들을 보면서 지냈다. 사회, 정서 발달과 언어 발달이 빨랐던 탓에 말도 무척 잘해서 겉보기에 무척 똑똑해 보이던 아이였다. 주로 학습만화만 보다 보니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아 보였지만 통독하는 습관이 지나쳐 그대로 두면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 그것을 느끼신 어머니께서 아이의 몸에 밴 통독습관과 학습만화만 보는 것을 고쳐보고자 수업을 시작하였다.


처음 상담 때 아이에게 어머니와 상담을 할 동안 100쪽짜리 책을 읽으라고 주었다. 그런데 앉은자리에서 10분 만에 읽고는 천진하게 '재밌어요'라고 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빠르게 통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줄거리를 물어보면 대략 중요한 부분도 잘 기억하고 이야기를 한다. 언어 발달이 빠른 여자 아이들 경우에는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그럴듯하게 말을 잘해서 부모님 입장에서는 통독이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너무 빨리 읽는데도 내용을 술술 이야기하니 그 책을 읽지 않은 부모 입장에서는 오히려 아이를 의심한 자신을 탓하며 넘어가기 쉽다. 뭔가 수상은 한데, 뭐가 수상한지 모르는 것이다.


수업을 시작하면서 그런 윤정이에게 오히려 재미난 웹툰을 엮은 책이나 순수 만화책을 책 숙제로 권했다. 죄책감 없이 그냥 재밌는 만화책을 보게 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는 줄글로 된 책을 소리 내서 음독하게 했다. 처음엔 내가 읽어주었더니, 내 소리를 듣지 않고 저 혼자 눈으로 옆 페이지를 읽고 있길래 윤정이에게 직접 소리 내서 모두 읽게 했다. 통독하는 것이 몸에 배어 소리 내서 천천히 읽는 게 고역이었겠지만 참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힘든 마음은 이해가지만 왜 고생스럽게 소리 내어 읽기를 시키는지 꾸준히 설득하면서. 힘들 때는 중간중간 책과 관련된 이야기나 아이가 책을 읽다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통독하는 것이 나아졌을 때는 같이 소리 내어 번갈아 읽기도 하고 눈으로 읽는 묵독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차례가 되어 읽을 때는 어김없이 내 소리를 듣지 않고, 눈으로 먼저 옆 페이지를 읽고 있는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지고 줄거리만 잡아채는 습관은 방심할 때마다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멈춰 천천히 책을 읽는 이유를 설명을 해주고 집중해서 소리 내서 읽기를 했다. 그만큼 한번 몸에 밴 통독 습관은 고질병에 가까워 고치기 어렵다. 그래서 가끔은 꼼꼼히 읽어야 이해가 되는 책을 주고는 잘 읽었나 확인해 볼 거니까 천천히 읽어오라고 당부를 하고 보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집에서도 정독을 했는지 확인 작업을 하곤 했다.


이것이 순수한 만화책은 많이 사서 내 아이들에게나 학생들에게는 권하면서도 학습만화는 권하지도 더더구나 사지 않는 이유다. 뭔가 유용한 지식을 얻는 것 같지만 읽기 습관만 망가지기 딱 좋은 게 학습만화 읽기다. 그리고 윤정이는 그 통독습관의 폐해를 보여주는 표본과도 같았다.


이런 윤정이는 5학년 2학기쯤 되었을 때부터 정독하는 습관을 잡아갔다. 그래도 책의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그 책들을 통독을 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반복 읽기를 시켰다. 의식하지 못하고 버릇이 튀어나왔으니 혼내기보다는 한번 더 읽으라고 권한다. 두께가 두꺼워 그 책들을 다 소리 내서 읽으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처음에는 줄거리를 파악하면서 읽었을 테니 두 번째 읽을 때는 놓치고 읽은 것들을 찾아보고, 놓치고 읽었을 의미들을 발견해 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자신도 조금의 반성을 하며 묵묵히 반복해서 읽어왔고, 다시 읽으니 더 재밌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윤정이의 경우는 오래 수업을 한 아이라 이미 책을 충분히 읽은 상태여서 글쓰기를 병행했다. 글쓰기를 하면 통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훑어 읽어봤자 책과 관련된 글쓰기를 할 수 없으니 저절로 꼼꼼히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윤정이는 어느 덧 6학년이 되었고, '히로시마 레이코'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런 윤정이에게 꼰대스럽게 잔소리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호? 그래~ 그럼 작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책을 꼼꼼하게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면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 가겠네?" 아이들을 오래 가르칠수록 프로 잔소리꾼이 되어간다. 흐흐





통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훑어 읽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의 통독 경우에는 빠르게 인물의 대사에만 집중하여 주요 사건만 잡아채서 읽는 방식으로 학습만화를 보던 아이들에게 흔히 생긴다. 만화는 글과 그림을 동시에 보게 된다. 학습만화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목적이겠지만 글보다는 그림이 많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습 만화를 그림 위주로 보고, 그나마 있는 적은 양의 글도 소홀히 읽는다. 만화는 사실 그림에 가깝고, 캡처된 종이로 된 영상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특히 학습만화는 실제 정체가 오묘한 장르다. 그냥 만화보다는 글도 많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어려운 내용을 만화로 전달하면 아이들이 쉽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책을 팔기 위한 출판사와 똑똑한 아이를 만들고 싶은 부모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콜라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아이들이 학습만화를 유독 많이 보는 이유는 2가지다. 순수한 만화책보다는 학습만화가 초등학생 용으로 많이 만들어져 있고, 도서관에 많이 비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 또한 그냥 만화만 볼 때보다는 학습만화를 볼 때 부모의 눈치를 덜 보게 된다. 그냥 만화책을 보고 있으면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가 날아올게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저 만화를 재밌게 보고 싶은데, 만화만 보면 잔소리를 듣고 그냥 책을 읽자니 힘이 드니 절충해서 학습만화를 보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학습만화를 읽는 것을 추천하지 않지만 굳이 아이 스스로 찾아 읽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는다.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그건 그 아이의 자유다. 즐거우니 읽는 것인데, 그것을 말리면서 다른 책을 권하면 반발심이 생긴다. 그리고 권하는 책이 학습만화에서 느끼는 즐거움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설득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학습만화만 읽는 아이에게 서사가 긴 책을 읽히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유튜브나 만화를 보고 싶은 아이들이 부모가 권하는 지루한 책 대신 도피처로 숨는 것이 실은 학습만화다. 부모 입장에서 살펴봐도 학습만화의 내용이 만만치 않으니 그것을 이해하고 습득한다면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부모와 아이는 학습만화에 대한 암묵적 거래가 형성된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이 팔린 책이 바로 why다.


이사를 할 때마다 책을 나르느라 이사를 해주시는 아저씨들이 고생이다. 그래서 수고비를 따로 챙겨드리곤 한다. 그런데 어떤 분이 책을 싸면서 이렇게 책이 많은 집은 처음이라면서 그런데 왜 선생님댁엔 why책이 없냐는 것이다. 연세가 좀 있으신 분이었는데 그 책을 아는 걸 보니, 여러 집 이삿짐을 싸시면서 꼭 있었던 책이었는데 도서관처럼 책이 많은 이곳엔 정작 그 책을 찾을 수 없으니 물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책을 사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지 않고, 학생들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별 실이득이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 학습만화가 있다고 하자. 과학분야는 새로운 어휘가 가장 많이 나오고 개념어휘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그걸 만화로 쉽게 전달하려고 그림과 캐릭터를 등장시켜 이야기로 풀어써 놓았다. 예를 들어 포유류라는 말은 자궁에서 새끼를 기르고, 낳아서 젖을 먹이는 동물을 분류하는 말이다. 이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림과 함께 개념을 설명한다. 그리고 포유류에 속하는 동물들의 예시도 그림으로 그려 넣는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포유류가 무엇이고 종류에는 사람, 개, 코끼리, 고래 등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아이들이 학습만화를 통해 제대로 그 개념을 이해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의심 없이 그 책을 사주었겠지만, 내가 실제로 만나본 학습만화 마니아 친구들은 그저 그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것에 그치고 만다. 포유류가 뭐니?라고 물으면 새끼를 낳고, 젖을 먹여요까지는 말하곤 한다. 그런데 포유의 뜻이 뭐니?라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이 말해놓고, 포가 자궁을 의미하고, 유가 젖을 의미하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거꾸로 개, 사자, 코끼리, 고래의 공통점이 뭐니?라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조금만 깊이 물어도, 살짝 질문을 바꾸어도 아이들에겐 다른 문제처럼 느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깊이 없이 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외웠던 그 단편적인 지식은 꾸준히 꺼내서 쓰지 않으니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만다. 나쁜 독서습관만 남긴 채.


그러면 제대로 학습만화를 학습에 유용하게 읽는 아이는 없을까? 게 중에는 과학이나 역사에 진짜 관심을 가진 아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은 과학 학습만화만 읽는 것이 아니라, 줄글로 된 다른 과학책과 역사책도 읽는다. 관심사와 관련된 다양한 책을 읽는다. 그런 아이들에게 학습만화는 자기가 읽는 책 중에 하나다. 그게 재미 흥미 위주로 학습만화를 통독하는 아이들과 다른 책도 읽으면서 좀 더 쉽게 풀어쓴 학습만화도 같이 읽는 아이들의 차이다.


그러니 학습과 만화를 분리시키는 것이 옳다. 만화는 아이들에게 휴식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그리고 학습은 학습 목적에 맞게 나온 책을 읽는 것이 좋다. 다만 학습을 목적으로 하는 책은 독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학습독서를 위한 높은 독서력은 이야기책을 꾸준히 제대로 읽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책을 빠르게 줄거리만 파악하면서 읽는 습관이 왜 나쁠까? 생각해 보라. 그렇게 책을 읽을 바엔 아예 요약본을 읽는 것이 낫다. 아예 줄거리만 읽으면 될 것 아닌가? 심지어 일부러 속독과 통독을 가르치는 곳도 있다. 도대체 그게 자신에게 무슨 득이 있단 말인가. 통독이 유용한 경우는 오래전 정독한 책을 다시 읽을 때다. 이미 꼼꼼하게 읽은 책이지만 잊은 내용들을 다시 상기시키기에 알맞은 방식이다.


책을 잘 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읽고 나서 얼마나 많은 내용을 기억하느냐일까, 아니면 책을 읽는 중간중간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그것들이 하나하나 나의 내면에 쌓여 책이 나를 변화시키는 경험을 하는 것일까? 대답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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