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독하는 아이들

by 책선생

# 이 주제의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몇의 사례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된 것을 각색하여 재구성한 인물임을 알려드립니다#


책 한 권을 나무 한그루라 상상해 보자. 작가가 책 속에 담아 놓은 의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책일수록 대놓고 주제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비유와 상징으로 의미를 다 감추어 놓는다. 그건 나무의 뿌리와 같다. 그렇다면 주인공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핵심 사건은 나무의 몸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무의 굵은 가지는 주인공과 핵심 인물들이 중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개의 작은 사건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나무의 잔가지들은 주변인물 이야기에 해당할 테고, 나뭇잎들은 이야기 소재들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문해력이 높고 정독을 할수록 나무 한그루의 전체를 다 세세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책 한 권을 비로소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책 많이 읽은 아이들도 속독을 하게 되면 아이들은 굵은 가지까지 혹은 더 빨리 읽었다면 나무의 몸통 밖에는 읽어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이 책을 나는 읽었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수많은 민준, 서연, 이준, 서아들은 하나같이 책을 많이 읽기는 하는데, 지나치게 빨리 읽어서 만나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흔한 케이스가 바로 속독하는 습관을 가진 아이들이다. 너무 많아서 예시를 들기도 힘들다. 현상은 같지만 속독을 하는 이유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다.


부모는 아이가 책을 많이 읽어 좋기는 하지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빨리 책을 읽어치워 이상하다고 말한다. 근데 책 내용을 엄마 앞에서 잘 이야기하니 딱히 문제가 또 아닌가 의구심을 갖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나에게 '선생님 이거 잘못된 거 맞죠?'라고 묻는다. 책을 저렇게 읽어서 뭐가 남을까 싶은 거다. 그리고 부모들의 그런 직감은 옳다. 책을 저렇게 읽을 바엔 줄거리 요약본을 읽는 게 나을지도.





속독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올바른 책 읽는 방법을 애초에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어른들은 아이들을 말로만 가르치려 한다. 아이들은 말로만 배우지 못한다. 그러면 때려야 한다는 얘기일까? 아니!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반복적인 훈련이다. 말로 전달한 것을 직접 실행하게 하고, 그것을 반복하게 해야 비로소 무엇인가를 습득한다. 그 과정이 학습의 기본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 ' 빨리 읽지 마라'라고만 한다. 그리고 아이가 하지 않으면 딱 세 번은 참고 그 뒤로 또 하지 않으면 버럭 한다. '빨리 읽지 말라고 했지!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래도 세 번을 참는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문화인 것 같다. 무슨 일이든 세 번 기회를 주는 게 보편적이니 말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자. 말로만 전달했을 때 무엇이든 척척 배웠으면 애초에 모든 어른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지 않은가. 어른이 되었어도 우린 잘못을 하고 실수를 한다. 다짐을 하고 어김없이 무너진다.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어른이란 존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도 실천하지 못할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말들만 쏟아내는 존재니까. 그런데 아이들도 살아가면서 차차 안다. 어른들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말처럼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이 90% 잔소리로 들린다. 그러니 말이 아닌 행동으로 습득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은 올바른 방법을 제시하고 반복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확인하고 피드백을 주고 다시 수정해서 반복하도록 해야 한다. '~해라'이 한마디에 뭐든 배우고 잘하는 아이는 세상에 없다. 게임 말고는.


또 다른 속독 이유는 책을 혼자 읽다 생긴다. 이른 읽기독립을 하고 책을 꾸준히 읽으면 부모는 계속 혼자 보게 둔다. 그러면 어떤 책에서 읽기 싫은 부분을 쉽게 넘기고 골라 읽게 되는데. 그런 습관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속독하다가 오독한다. 그걸 바로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계속 그렇게 책을 읽게 된다. 독서에 어른의 올바른 지도가 가장 필요한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은 비교적 조언을 빨리 받아들이고 고치려고 노력한다. 물론 한번 몸에 밴 습관을 고치기란 이 아이들 역시 어렵지만 말이다.


속독의 가장 큰 문제는 저절로 통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속독과 통독의 습관을 가진 아이들은 주로 만화 또는 학습만화만 읽어 온 경우가 많다. 글과 그림을 동시에 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게 되며 훑어 보는 습관이 자리 잡는다.


또는 학원과 학원 사이에 시간 때우기로 책을 읽는 경우에도 이런 습관이 생긴다. 이런 아이들은 일반 줄글로 된 책을 찬찬히 읽는 게 힘든 상황이라, 책을 읽더라도 주인공이 누구냐만 파악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집중해서 주인공을 추격하듯이 빠르게 읽어 내려간다. 애초에 찬찬히 책을 읽을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만화를 보거나 아주 가벼운 책을 주로 본다. 혹여 두께가 있는 줄글로 된 책을 읽더라도 시간이 없으니 중간중간 묘사된 배경과 인물의 마음 따윈 알아서 제키고 어떤 경우 인물 간 대사와 대사 사이의 글을 빠르게 패스한다. 그렇게 짐작하여 읽어도 무리가 되지 않은 쉬운 책만 읽는다. 이런 아이들의 독서 습관을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힘들다.


이런 여러 속독 이유가 있지만 이 습관을 고치는 다른 비법 같은 건 절대 없다. 오로지 정독 습관이 생길 때까지 스스로 소리 내서 읽게 해야 한다. 속독하는 아이들은 누군가 읽어주는 소리도 잘 듣지 않는다. 읽어주면 눈으로 먼저 앞서 읽는다. 책을 빠르게 읽어 줄거리 파악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특징들이 있어서 사건을 찬찬히 음미하며 읽는 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뒷 이야기가,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견디기 힘들다.


자칫 이런 아이들에게는 소리 내서 읽기가 벌 받는 느낌일 수 있기 때문에 음독시키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천천히 소리 내서 읽게 한다. 그리고 힘들면 눈으로 천천히 읽으라고 시간을 준다. 그렇게 아이를 지켜보면서 읽는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 것 같으면 계속 묵독을 시키고, 다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면 새롭게 시작되는 챕터에서 다시 음독을 시키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읽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속독하는 아이들은 혼자 읽을 때면 여지없이 통독과 속독을 할 게 뻔하다. 습관이기 때문이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원래대로 돌아간다. 어쩔 수 없다. 100번 1000번 가르칠 수밖에. 육아와 학습의 기본은 인내심이다.


속독을 바로 잡는 또 한 가지는 반복 독서를 시키는 것이다. 아이가 뜨겁게 열광하는 책이 있으면 가장 좋고 여하튼 재밌게 읽은 책을 1년 주기로 다시 읽게 한다. 반복 독서의 힘은 세다. 반복해서 읽으면 3가지의 유익함이 있다. 잊었던 내용을 상기시키고, 속독으로 놓쳤던 것을 읽을 수 있고, 그동안의 내면의 자연 성장으로 이해가 안 되었던 내용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복 독서는 가장 좋은 독서 방법이다. 단, 자기가 좋아하는 책으로 반복독서를 하면 아이의 속독의 문제를 크게 보완할 수 있다.


그리고 최후 수단이 글쓰기다. 줄거리 요약하기를 시키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고, 글의 내용을 질문으로 만들어 주제 글쓰기를 하면 더욱 좋다. 하지만 이것은 지도하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대략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글쓰기를 지겨워하는 아이라면 오히려 책도 멀리할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이 학습처럼 느껴지면 독서에 대한 흥미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니 정기적으로 아이와 약속된 시간에 간헐적으로 해보면 좋겠다. 초등 시절에는 글쓰기보다는 책 읽기가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글쓰기 시키려다 책 읽기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속독이 크게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다. 정독하면서 읽어도 많이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빨라진 경우다. 읽다 보면 이야기 구조의 일정한 패턴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해도 빠르게 추론도 정확해진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많은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책 속의 배경들에 대한 이해가 더 잘되니 내용이 쉽게 쉽게 이해가 된다. 그렇게 속독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은 크게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이 200쪽 되는 책을 2시간 안쪽으로 읽는 건 크게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200쪽에 담긴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같은 시대 배경을 가지거나 혹은 아이와 비슷한 또래가 나오고 아이의 경험으로 충분히 이해가능한 사건들이 나오는 책들인 경우에 저 정도의 속독은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빨리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유럽 중세이나 과거의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전일 경우에는 다르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 그리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인물의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읽기는 어렵다. 아이의 경험과 먼 이야기일수록 머릿속에 그림 즉, 상상이 잘 안 되고 상상이 잘 안 되는 책을 빨리 읽는다는 것은 핵심 줄거리만 잡아채서 인물 뒤를 추격하는 읽기를 하는 중인 것이다. 작가가 써 놓은 의미를 물론이고 세부적이지만 중요한 책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다 놓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어서 자연스럽게 속독하는 경우라도 이런 종류의 고전들은 속독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은 대체로 알아서 반복 읽기를 한다. 어떤 책을 10 회독까지 하는 아이를 본 적이 있는데, 책이 어려워서도 있겠지만 보통 이 정도면 아이에게는 '인생책' 정도 되는 것이다. 이런 아이의 인생책을 부모가 함께 읽어 대화를 나눈다면, 적어도 아이가 좋아하는 그 책에 대해 아이가 그 책에 대한 수다를 떨도록 질문해 준다면. 그러면 그것이 바로 놀이이자 공부가 되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속독하는 습관은 예방이 최선이다.

병으로 치면 속독은 '난치병'이다. 치료 불가능한 일은 아니고 죽지도 않지만 고치기 힘들다. 부모가 뼈를 깎는 인내심으로 설명해 주고 천천히 바로 잡아가야 한다. 이 속독의 습관은 그래야 간신히 고쳐진다. 100번 1000번 가르쳐야 하는데, 이 말은 절대 비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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