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처음 죽음을 목격한 것은 엄마의 할머니의 죽음이었어. 엄마가 여섯 살 때라 왜 돌아가셨는지 잘 몰랐다가 나중에 들어서 안 사실인데 할머니는 간암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해. 어린 내 기억에 할머니는 이부자리를 펴고 아랫목에 늘 누워 계셨는데 머리맡에 카세트테이프를 두고 불경을 반복해서 들으셨던 기억이 나. 그게 할머니 나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 어린 엄마는 테이프 한 면이 다 돌아가면 바꿔서 돌려 트는 일을 도왔고 어른들은 그런 어린 엄마를 기특하다고 칭찬했던 것 같아.
어느 날인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는데 어른들이 갑자기 할머니를 업고 서둘러 어딜 가는 거야. 할머니 신발을 집어 들고 서둘러 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선명한데, 그러고 할머니는 더 이상 보지 못했어. 대신 안방에는 병풍이 둘러졌고 그 뒤에 나무로 만든 기다란 상자를 가져다 놓더라. 그리고 어른들을 매우 분주해지기 시작했어. 집에는 동네 사람들뿐 아니라 생전 얼굴도 처음 보는 친척들로 가득했지. 순간 우리 집이 아닌 다른 공간이 된 듯한 느낌이었는데, 어른 내 눈에는 흡사 잔치집과도 비슷해 보였어. 전을 부치 고소한 기름 냄새와 떡 찌는 냄새 그리고 손님들을 대접을 고기와 육개장 같은 것을 끓이는 냄새가 잔치 때 풍경과 매우 유사했어. 물론 고모들이 와서 대성통곡을 하기 전까지는.
출처- 매일일보
엄마 어릴 적에는 장례를 집에서 치렀어. 지금은 대체로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도 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에서 치르거나 가까운 별도의 장례식장을 마련하지.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일인데 그걸 집에서 했다는 게 놀라워. 물론 시골은 동네 사람들끼리의 유대감이 깊기 때문에 어떤 집에 초상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같이 일을 도왔어. 그건 아주 당연한 듯이 했던 일이었어. 그런 걸 한국인들의 정이라고 하는 거고, 그게 근면 성실과 함께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아. 서로 어렵고 힘들었으니 돕고 사는 게 당연한 문화였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따뜻한 장면들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엄마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장례식은 슬프지만은 않았어. 마당에 멍석들이 깔리고 흰 천막을 치고 대문에는 근조 등이 걸렸어. 가까운 친 인척들이 모이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정성껏 장례 절차를 하나씩 밟아갔어. 문상을 온 손님들을 서로 아는지 악수를 나누고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을 얼른 감추고 소주잔에 술을 따르고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어.
"오래 앓다가 돌아가셨다지."
"고생 좀 하셨지"
"이젠 좀 편안 해지셨겠지"
"에휴~ 그래도 가시기엔 좀 젊으셔"
이런 대화들이 오갔던 것 같아. 그리고 하루 이틀 밤을 새워 장례를 치렀어. 손님들은 꾸준히 집을 방문했고, 손님들은 안방에 마련된 병풍 앞 제사상에 절을 하고 손님들이 절을 할 때는 상복을 입은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은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냈지. 그리고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는 마당에 마련된 자리로 가서 또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술 한잔, 밥 한 그릇을 먹고 떠났어.
어린 엄마는 왜 장례식장에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는지 이해를 잘하지 못했어. 그래서 엄마가 그랬잖아. 잔칫집과 비슷했다고 사람들의 웃음 대신 울음이 대신하고, 옷차림이 달랐을 뿐. 나중에 커서 안 사실인데 장례식에서 밥과 술을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은 고인이 마지막으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식사라고 하더구나. 자신이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먼 길 와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는 거라고 해. 참 따뜻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아.
삼일장의 마지막날에 마당에는 화려한 꽃가마가 등장하고 할머니의 관은 저곳에 실려 드디어 장지로 가게 떠나지. 그때 상여를 따라 상복을 입은 가족들과 친인척들 그리고 가까운 동네 사람들이 뒤를 따라 울기 시작해. 잔칫집 같은 분위기는 이제 정말 초상집같이 변해. 정말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니까. 그리고 고인이 묻히고 영원히 잠들 장소에 도착하면 관을 땅에 묻는데 이때 사람들이 가장 슬퍼했던 것 같아.
<전통 장례 행렬 상여> 출처: 농촌 경제 신문
얘들아~ 엄마는 이 이야기를 끝으로 '기억 하나'를 이제 그만 떠나보낼까 해. 엄마의 인생을 바꾼 그때의 기억 하나. 그것으로 엄마는 너무 많은 시간을 방황했어. 처음에는 지나 온 시간을 그 기억 때문에 허비하기만 했다고 생각해서 많이 공허하고 억울했지. 하지만 뒤돌아보니.... 의미 없었던 시간들은 하나도 없더라. 그 모든 것이 의미였어.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엄마를 단단하게 성장시키고 있었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면서도 엄마는 그 누구의 응원과 지지 그리고 격려에도 나 스스로는 한 번도 그러지 못했어. 지금까지 열심히 산 나 자신을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수고했다고 말해주지 못했단다. 슬픔과 공허의 늪에 빠져 아무것도 몰랐지. 모든 게 그 기억'때문'이라면서.
그런데 이제 그만하려고 그 원망. 엄마가 너희를 낳고 좋은 엄마가 되리라 비장한 결심을 한 것도, 엄마가 지금 문제를 겪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도, 엄마가 우리의 반려견을 못 키우겠다고 하던 전 보호자로부터 데려와 가족이 되는 행운을 누리는 것도. 사실은 모두 그 기억 '덕분'이더라. 누구의 잘못이었든 무지였든, 그때 그것이 최선이었든 의무였든. 그냥 그 모든 것이 의미였고 엄마 자신이었다는 생각을 해.
" 어린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지금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어린 나는 어른들의 보호나 배려를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나는 내 아이들을 키켜주는 어른으로 자랐다. 어린 나는 슬퍼도 아파도 혼자 끙끙 앓아야 했지만 나는 내 아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알아주는 어른으로 자랐다. 살을 자르고 뼈를 깎는 고통으로 삐뚤어졌던 나를 바로 세우고 내 아이들에게 불행을 대물림 시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