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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습

제 습기입니다.

by 라면 Jan 08. 2024

내 방 문고리엔 걸이형 제습제가 걸려있다. 플라스틱 손잡이 부분이 있어 문고리에 걸 수 있게 만들어진 제품이다. 두 구역으로 나뉜 몸통 부분 위쪽에는 제습제 알갱이가 있고 그 아래쪽 공간에 제습제 성분에 의해 모여든 수분이 보관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날. 방 안에 텁텁한 습기를 없애기 위해 쿠팡에서 주문한 제습제였다.


옷장에 넣어 쓸 수 있는 일반적인 박스 형태가 아닌, 걸이형 제습제를 주문한 이유는 방 안 곳곳에 비치하기 위함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방 안엔 총 다섯 개의 제습제가 걸려있다. 여름에 걸어둔 것들이 아직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이다. 아래쪽 투명한 공간에 물이 반쯤 차 있는 채로. 문을 쳐다볼 때마다 여름의 흔적이 덜렁거린다. 


습한 것을 누가 좋아해 줄 수 있나.


여름이 싫은 이유는 높은 기온 때문만은 아니다. 꿉꿉한 습도 때문이기도 하다. 덥고 습한 한국의 기후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자는 몇 없을 것이다. 잔뜩 땀을 흘리고 나서 샤워를 하고 나와도 높은 습도 때문에 상쾌하지가 않다.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여름의 습기는 남들보다 더 불쾌한 존재다. 서울에 자취할 땐 제습기를 사서 운용했다. 제습기의 단점은 소음과 기계에서 방출되는 더운 바람이다. 고향 집에선 그래서 제습기 대신 제습제를 써 보기로 했다. 다섯 개나 방 안에 비치해 보았지만, 사실 그 효과는 체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습제 아래쪽 투명한 비닐 재질의 공간엔 물이 나날이 차올랐다. 그러니까 아예 효과가 없었다는 건 아니겠지. 제습제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거겠지. 겨울이 와서야, 해를 넘기고 나서야 제습제의 노고를 알아주는 내가 제습제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네게 고맙다는 말을 뒤늦게나마 건넨다.


나는 따뜻한 시선으로 지난여름 수고한 너희를 바라본다. 

습기를 없애기 위해 태어난 너희를 바라본다.

때가 지났지만 떠나가지 않은 너희를 바라본다.


축축한 것을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 그러니 너희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거겠지. 하지만, 나는 축축한 사람이다. 다한증이 있는 내 손바닥은 항상 축축하다. 손바닥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축축하다. 자주 깊은 물속까지 잠수하는 내 영혼엔 물기 마를 날이 없다. 내 이름에조차도 물이 있다. 더군다나 요즈음은 자주 눈물을 흘리곤 한다. 오늘도 영화를 보다가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서울의 봄'을 보는데 갑자기 울분이 치솟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울분이 어느 곳을 향한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저 눈물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에, 끅끅거리며 눈꺼풀 안쪽으로 다시 집어넣었을 뿐이다.


우울한 사람을 좋아할 수 있나. 나는 자주 우울에 빠지곤 한다. 어렸을 적부터 그랬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슬픈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눈물을 보이는 것이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니. 밤에 몰래 숨죽여 울곤 했다. 무엇이 그리 슬픈 건지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다. 그저 살아가며 겪었던, 겪어야 할 모든 일이 내 슬픔의 근원이었음을 이젠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사랑받기 위해서, 나는 습기를 숨긴다. 자신의 아픔을 알아 달라고, 자신을 안아 달라고 호소하는 눈물과 물통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런 방법으로는 사랑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지나치게 우울한 사람과는 어울릴 수 없으니. 우울의 전염성을 알고 있기에 철저히 그 감정을 숨기는 선택을 한 것이다. 습한 여름에 에어컨도 틀지 않고, 제습기도 틀지 않고 오롯이 그 축축함 속에서 힘겹게 숨쉬기를 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주변을 오방신처럼 지키고 있는 제습제에게 물었다. 우리의 여름은 얼마나 축축했는지. 그 속에서 숨 쉬던 나의 영혼을 얼마나 축 젖었었는지.


눈물과 물통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더 있다. 너희의 본질을 사랑해 줄 사람은 없다는 비정한 말은 그저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돌아오는 읊조림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며. 습하고 더운 여름의 본질은 인간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름의 본질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원동력에 있다. 여름의 녹음과 여름의 매미와 여름의 풀벌레와 여름의 우리. 우리의 습함이 그것들을 키워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조금만 참기로 하자. 지난여름 나는 제습제 다섯 개로 내 습함을 숨겼다. 이번 여름은 에어컨이나 제습기의 힘을 빌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홀로 있을 때는 한껏 물속으로 헤엄쳐 들어가기로 하자. 


축축한 내 영혼 곳곳에 돋아나는 싹들이 나를 녹음으로 인도한다. 

겨울이건만. 빌어먹을 겨울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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