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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누가 자꾸 날 밀어!

12코스, 바람에 떠밀려 넘어지는 길

by 체리뽀

비를 피했다고 좋아하면 꼭 바람을 만나더라!


12월, 여전히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중이었다. 아이들과 올레길을 걸으려면 주말밖에 시간이 없는데, 하필 12월 들어 3주째 주말마다 날씨가 궂었다.


지지난 주에 2코스를 걸을 때도 지난 주에 11코스를 걸을 때도 엄청난 바람을 만나 고생했던지라, 이번 주말만은 날씨가 좋기를 바랐건만...


또 비 소식 가득한 주말을 맞게 되었다. 올레길은 걸어야겠고, 그나마 강수 확률이 낮은 쪽으로 가서 걷기로 했다. 오늘은 올레 12코스 완주를 목표로 출발!


북서풍을 뒷통수로 맞으며 걷는 게 나을 것 같아, 역방향으로 걷기 시작!


지도를 보니 11코스처럼 12코스도 역방향으로 걷는 게 나아 보였다. 매서운 북서풍을 얼굴로 맞는 것보다는 뒷통수로 맞는 게 덜 힘들 테니까 :)


12코스 역방향 시작점인 용수 포구에 도착하니 바람이 정말 미.친.듯.이. 불고 있었다. 오늘도 왠지 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었다.


비는 간신히 피했으나 바람까진 피하지 못했던 험난한 올레길 여정이 그렇게 또 시작되었다.

용수 포구에서 역방향으로, 차귀도를 바라보며 걷는 바당길 :)


3년 전에 차귀도 요트 투어했던 그 바다네!


큰 파도로 인해 운항을 못하고 있는 차귀도 요트가 용수 포구에 정박해 있는 게 보였다. 3년 전 여름에 여기서 우리 가족이 함께 요트를 탔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3년 전, 차귀도 요트 투어의 추억^^


"얘들아, 우리 이 요트 타고 저기 보이는 차귀도 한 바퀴 돌고 선상 낚시도 하고 그랬잖아! 기억나?"


"나 일곱살 때, 양발 깁스했을 때? 저 요트를 탔었구나!"


"그 때 엄마랑 아빠가 미끼만 다 던져주고, 물고기는 한 마리도 못 잡았잖아! 엄청 기대했는데..."


하하... 큰 돈 주고 탄 요트였는데! 낚시에 성공해서 싱싱한 회 먹어 보겠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낚시 초보인 나와 남편은 물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아이들 앞에서 체면을 구겼었다.


"난 그 때 깨달았어. 내가 낚시에 소질이 없다는 걸. 그래서 제주 일년살이 동안 낚시는 해볼 생각도 안 했지!"


남편이 나에게 귓속말로 자신의 속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갑자기 드는 의문 하나! 물고기를 낚는 데는 영 소질이 없으면서 왜 이렇게 저는 잘 낚으시는지...?


(남편이 미끼를 던질 때마다 덥석 물어 버리는 내가 문제일 수도^^;)

와이프만큼은 엄청 잘 낚는! 강태공 남편 ㅋㅋ
바람에 미친듯이 흔들리는 갈대를 따라하고 있는 아이들 ㅎㅎ
여행자들이여! 길은 따로 없다. 당신의 걸음이 길을 만든다.


차귀도도 멋있는데 파도 치는 것도 예술이다!


사방에서 부는 바람을 헤치며 능선을 올라 가니 차귀도가 성큼 다가와 보였다. 차귀도를 한 눈에 내려다 보며 걸을 수 있는 그 길이 바로 '생이기정 바당길'이었다.


역방향으로 걸었더니 거의 다 걷고 나서야 안내 표식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생이기정 바당길은 그야말로 제주 서쪽 바다의 비경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요트 타고 가까이서 봤던 차귀도다!
비경을 간직한 '생이기정 바당길'


생이기정 바당길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오름이 '당산봉'이었다. 걷는 동안에는 그저 울창한 나무들이 차가운 바람을 막아줘서 고맙게만 느껴진 길이었다.


역방향으로 다 걷고 나서야 우리가 지나온 야트막한 숲이 '당산봉'의 일부였음을 알게 되었다. 12코스에서 만난 첫 오름 '당산봉'은 아주 수월하게 지날 수 있었다.

오늘의 첫 번째 오름, 당산봉을 내려 가며 :)
내리막길은 식은 죽 먹기지요^^
이렇게 추운 12월에 피어난 유채꽃이라니! 놀라움에 찍어둔 사진 :)


차귀도를 지키자! 아빠를 지키자!


자구내 포구에 가니 공중 화장실이 있었다. 겨울 올레길을 걷게 되면서부터 화장실만 보이면 무조건 들르는 게 우리 집의 규칙이 되었다.


이유는 더운 날 걸을 때보다 땀 배출이 적다 보니 더 자주 화장실을 찾게 되는데, 문제는 그럴 때마다 화장실이 '짠'하고 나타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산 속을 걷거나 화장실 하나 없는 구간을 지날 때 아이들이 다급하게 화장실을 찾으면 그 때부터 가족 모두가 초비상이 되기에, 보이는 화장실마다 무조건 들르는 게 최선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차귀도를 지키자'라는 비석 앞에서 아빠를 꼭 안고 있는 딸들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아빠의 수호대처럼 보여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희들은 차귀도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아빠를 지키는 중이야?"


"응, 우리는 엄마에게서 아빠를 지키는 중이야!"


"아빠, 우리가 지켜줄게! 우리만 믿어! 얍~"


"얘들아, 엄마 너무 서운해~ 엄마가 무슨 적이라도 돼?"


"응! 엄마는 나의 영원한 적이야. 왜냐하면 내가 아빠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아빠랑 먼저 결혼을 해버렸잖아?"


띠용! 큰 아이의 야무진 대답에 뒷통수를 한 대 후려맞은 기분이었다. 이 때 아이들의 철통 경호를 받고 더욱 의기양양해진 남편을 보니 어찌나 얄밉던지..ㅎㅎㅎ


차귀도보단 아빠를 지키고 싶은 아이들!


꿩이 왜 꿩인지 알아? 꿔어어엉- 하고 날아서 꿩이야!


올레 12코스에서 가장 기대했던 구간이 바로 '엉알길'이었다. 자구내 포구에서 엉알 해안까지 이어지는 그 길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게 그 쪽으로 올레길이 이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2024년 봄부터 엉알길 초입부에서 낙석이 발생하여 그 구간 대신 고산리 신석기 유적지 쪽으로 임시 우회하게 된 것이었다.


옆으로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아슬아슬한 아스팔트 도로 위를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맞아 가며 걷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길 옆의 무밭에서 꿩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 올랐다. 제주에 온 뒤로 자주 목격하게 된 꿩은 도시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새라 마주칠 때마다 매번 놀랍고 신기했다.


꿩은 풀숲에 숨어 있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갑자기 큰 소리로 울며 날아가는데, 이 때 꿩의 울음 소리를 잘 들어 보면 분명히 '꿔어어엉-' 하고 운다.


"얘들아, 꿩이 왜 꿩인지 알아? 너희도 잘 들어봐~ 꿩이 날아갈 때 어떻게 소리 내는지!"


오늘 올레길에서만 네 마리의 꿩을 보았다. 아이들은 그 때마다 귀 기울여 꿩의 울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쟤네들 날아 오를 때마다 꿔어어엉- 하고 우는 거 들었어?"


"응, 엄마! 진짜로 꿔어어엉- 하고 우네? 그래서 이름이 꿩인가봐!"


믿거나 말거나, 저의 피셜이긴 합니다만! 제주 오름이나 숲을 지나다가 어떤 새가 '꿔어어엉-'하고 우는 걸 들으신다면 100% 꿩입니다! ㅎㅎㅎ


고산리 유적지를 따라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 꿩을 네 마리나 만났다지요^^*


수월봉은 전혀 수월하지 않아요!


12코스에서 두 번째로 오르게 된 오름은 '수월봉'이었다. 이름만 들으면 굉장히 수월하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건 차를 타고 오신 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아주 잘 닦여진 오르막 도로를 걸어 가고 있는데, 우리 옆으로 여러 대의 차가 지나쳐 갔다. 알고 보니 수월봉은 정상까지 차로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 가족은 각자 자기 몸을 가누기에도 버거운 바람을 뚫고 걷는 중인데, 차를 타고 정상까지 수월하게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뭔가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엄마! 수월봉은 왜 정상까지 차로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거야?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올라 가고 있는데!"


"오름이 왜 오름이겠어, 직접 오르는 맛이 있어야 오름이지! 저렇게 차로 가는 건 반칙 아니야?"


아이들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바람을 헤치며 두 번째 오름을 오르는 중이라 더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수월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차로 수월하게 갈 수 있도록 한 거 아닐까?"


태연하게 말했지만, 나 역시도 수월봉으로 올라가는 차를 얻어 타고 싶을 만큼 힘든 상태였다. 바람이 진짜 태풍처럼 불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와 아이들이 고개를 들지 못했던 수월봉 입구!
네... 바람 부는 수월봉은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다 ㅠㅠ


으아아아아앙~!!!!


수월봉 입구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던 바람은 수월봉 정상에서 절정으로 불고 있었다. 바람에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기념 사진만 찍고 돌아서던 순간,


수월봉 육각정에 오르려고 먼저 달려간 둘째가 계단을 한 칸 밟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휘청이며 넘어졌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놀란 둘째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고, 괜찮아? 어쩌다가 넘어졌어? 계단 헛디딘 거야?"


"아니 엄마... 내가 한 발로 계단에 서는 순간 바람이 나를 세게 밀었어...ㅠㅠ"


그랬다. 둘째는 말 그대로 바람에 떠밀려 넘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고, 안아서 토닥여 주니 금방 진정하는 둘째였다.


"엄마... 나는 누가 날 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람이었어!"


바람의 위력에 놀란 둘째! 그녀를 넘어뜨릴 만큼 강력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수월봉을 내려 가기로 했다.


수월봉 정상... 몸을 가누기 힘들었던 곳! 둘째가 바람에 떠밀려 넘어진 곳ㅠㅠ


수월봉을 벗어나 마을 길로 접어들자 바람이 다소 잦아 들었다. 바람에 식겁한 우리 가족은 그 뒤로 몸이 휘청일 정도의 바람만 불지 않아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길가의 올레 표식도, 갈대들도, 무 잎사귀들도 바람에 사정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밭에서 나는 작물들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와... 엄마! 무가 내 팔뚝보다 더 굵어! 너무 신기하지 않아?"


둘째는 올레길을 걸으며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함을 배우고 있었다. 엄청난 바람은 사람을 쓰러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이토록 모진 바람 속에서도 밭에 있는 작물들은 최선을 다해 자란다는 것을!


둘째야, 올레길을 걸으며 더 단단해지고 있구나! 모진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걷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너를 열렬히 응원한다!


걷기는 내가 삶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 추운 겨울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 그리고 동백 :)
겨울임을 잊게 만드는 초록초록한 밭과 분홍 동백꽃 :)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참으로 시리도다!


마지막 바당길 구간이 시작되는 신도 포구가 나왔다. 겨울 올레길을 걸을 때는 최대한 바다를 피해서 걷는 게 좋은데, 12코스에서는 이 구간만 지나면 바닷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마지막 바당길 구간의 시작, 신도 포구!


오전 내내 흐린 날씨이다가 바다 위로 살포시 내려오는 햇살을 보니 무지 반가웠다. 사진을 찍어 보고자 했으나,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릴 뿐이었고.


그래도 겨울 제주 바다는 참 예뻤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랗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쓰고 있던 모자를 날려버릴 듯 했던 바닷바람!
바위를 삼켜버릴 듯 맹렬히 달려드는 파도!
서슬퍼런 바람이 불어도 바다멍은 포기할 수 없지!


"바다에서 마을로 곧장 들어가지 말고,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카페에서 좀 쉴까?"


올레길 위에서 웬만하면 잘 안 쉬려고 하는 남편이 카페에 가자고 먼저 제안해 왔다. 바닷바람에 어퍼컷을 하도 맞아서 지쳐가던 와중에 어찌나 반가운 말이었는지!


"우리가 점심 먹기로 한 식당까지 아직 멀었으니까 그러는 게 좋겠다!"


부쩍 지친 기색을 보이던 아이들도 카페에서 쉴 수 있다는 말에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돌고래가 자주 출몰한다는 바다!
좌회전 하라는 올레 표식이 나왔지만 카페에 가기 위해 좀 더 직진하기로!


앞서 간 아이들을 뒤따라 간신히 도착한 카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이들이 철푸덕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

"엄마 어떡해... 이 카페 오늘 문 닫았어..."


"하... 여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걸어 왔는데!"


하필이면 카페가 오늘 문을 닫은 것이었다. 하... 이 카페를 가자고 한 남편에게 괜시리 화가 났지만, 지금의 화는 심신이 지친 탓일 테니 혼자서 꾹꾹 참아 보려고 애를 썼다.


나 역시 카페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더 열심히 걸어 왔기에,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모자를 뒤집어 쓴 채 식당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쭉 걷는 수밖에!


"얘들아, 부지런히 걸어서 식당까지 가자! 그래야 밥도 먹고 몸도 좀 쉴 수 있어!"


그렇게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서 겨우 도착한 식당은 왜 하필 웨이팅 손님으로 넘쳐나고 있는 건지...ㅠㅠ


다른 때 같았으면 웨이팅을 포기하고 다른 식당을 찾아갔을 텐데! 가족 모두가 비바람에 혹사 당한 상태라 그냥 웨이팅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며 쉬는 게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다.


1시간 정도의 기다림 끝에 입성하게 된 <나무 식탁>이라는 식당! 아침에 시부모님께서 올레길 잘 걸으라며 격려금을 보내 주신 덕분에 먹고 싶었던 메뉴를 마음껏 시켜 먹을 수 있었다.


제주 고등어 온소바, 고등어 보우 스시, 제주 어묵 우동, 영귤 가지 튀김, 명란 마요 구운 밥! 맛있게도 냠냠^^




식당에서 웨이팅 포함 2시간 정도를 보내고 밖으로 나서니 바람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따뜻한 식당에서 편하게 쉬다가 다시 걸으려니 발걸음도 쉬이 떼지지 않았다.


식당 바로 근처가 중간 스탬프 지점인 '산경도예'였다. 폐교를 개조해서 운영하는 도자기 공방라는데 문은 닫혀 있었고, 운동장은 날씨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더 으스스해 보였다.


중간 스탬프를 찍었던 '산경도예' 앞
운동장에 여러 동상들이 그대로 있었는데, 이상하게 무서워 보였다!
아이들은 삐걱대는 그네를 타며 잠시나마 즐거워 했지요^^


아,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오름이야!


12코스가 유독 힘들게 느껴진 건 강한 바람, 가끔씩 내리는 비, 추운 날씨 탓도 있었지만 오름만 3개를 올라야 했던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당산봉, 수월봉에 이어 세 번째로 오르게 된 오름은 '녹남봉'이었다. 둘째는 수월봉에서 바람에도 떠밀려 넘어졌기에 오늘은 더더욱 오름에 오르는 걸 힘들어 했다.


하... 오늘만 세 번째 오름... 한숨만 푹푹 나오던...
우리가 걷는 건 위대한 일입니다! 하지만 둘째는 너무 힘들어서 주저 앉았지요^^;
녹남봉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제주 서남쪽 오름들!


아빠, 바지랑 양말에 도깨비풀이 잔뜩 붙어 있네! 내가 떼줄게~


언제 이 길이 끝나나, 이제 그만 좀 걷고 싶은데, 하다가도 불쑥 감동 포인트가 생기는 게 올레길에서의 묘미이다. 녹남봉 정상에 올라 칼바람을 맞으며 한라산 능선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남편의 바지와 양말에 잔뜩 붙은 도깨비풀을 발견한 딸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무릎을 꿇은 채 아빠에게 달라붙은 도깨비풀 제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어? 아빠가 해도 되는데... 고마워 딸들!"


"우와... 아빠는 진짜 좋겠다! 딸들이 도깨비풀도 다 떼어주고!"


남편의 지독한 발냄새(?)도 이겨내는 딸들의 찐사랑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빠 발에 붙은 도깨비풀을 떼어주고 있는 기특한 딸들^^




녹남봉을 내려와 신도 저수지를 지날 무렵, 내 뱃속이 기분 나쁘게 꿀렁이기 시작했다. 점심을 거하게 먹은 덕분에 화장실을 가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 보니 건물 한 채 없이 그저 밭두렁만 펼쳐지는 길이었다. 다급히 지도를 살펴 보니 30분은 걸어야 화장실이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때부터 발에 부스터를 단 듯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배가 너무 아파 식은 땀이 절로 났고, 다리는 정말 아팠지만 어떻게든 화장실까지 빨리 도착해야 했다.


덕분에 나는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몹시 빠르게 주파할 수 있었다. 그 때 만난 화장실은 그저 빛! 큰 위기를 넘기고 나니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인 건 기분 탓이었을까?


이 지점부터 화장실 이슈가 생긴 나...
길은 알아도, 화장실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멀더라는...ㅠㅠ


어? 뭐가 떨어지는데... 이건 우박인가?


예상 도착 시간보다 훨씬 늦은 4시 30분쯤에야 겨우 '무릉외갓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때보다 바람이 강했기에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하루종일 바람에 흠씬 두들겨 맞은 탓에 후다닥 스탬프를 찍고 무릉외갓집 내부에 들어가 쉬려던 순간, 패스포트 위로 굵은 비(?) 같은 게 후두둑 떨어졌다.


"엄마, 갑자기 눈 내려!"


"어? 이건 눈이 아니고 우박 같은데?"


"악! 우박이다! 실내로 대피 대피~"


하늘에서 우박이 거침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분만 늦었어도 이 우박을 길 위에서 다 맞아야 했을 텐데, 도착하자마자 우박이 떨어져서 정말 다행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한 우박!
무릉외갓집은 폐교를 개조해서 만들었고, 제주의 제철 먹거리와 올레 기념품을 팔고 있어요^^
사장님께서 시식용으로 내어주신 과일.. 정말 꿀맛이라 레드키위는 두 꾸러미나 샀답니다^^


여보... 택시가 안 불러지는데?


자, 이제 차를 두고 온 용수 포구까지 돌아가는 게 문제였다. 무릉외갓집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몸을 녹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택시를 불러서 용수 포구까지 다함께 가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무릉외갓집은 5시 30분에 문을 닫기에, 그 전부터 카카오 택시로 꾸준히 호출을 해도 배차 가능한 택시가 1대도 없다고만 나왔다.


대정 콜택시에 직접 전화도 해봤지만 역시나 배차 가능한 택시가 전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계속해서 택시를 부르려는 시도를 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이용하려고 해도 매 정거장에서 오래 기다려 가며 2~3번을 갈아 타야만 했고, 그렇게 버스를 타고 내려도 마지막 20분 정도는 캄캄한 길을 걸어야 했다.


차로 30분이면 갈 거리를 2-3시간 걸려서 갈 엄두도 안 났고,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대로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버스를 기다리기엔 아이들이 너무 추울 것 같아 아찔했다.


"사장님, 어떡하죠? 여기로 올 수 있는 택시가 하나도 없다는데...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어머, 택시가 정말 한 대도 안 온대요? 아직 5시 30분밖에 안 되었는데요?"


"네, 죄송해요ㅠㅠ 여기 문 닫으셔야 되는데, 택시가 안 와서 가질 못하고 있어요..."


"아이구... 아이들도 있으신데 버스도 거의 안 올 뿐더러, 나가시면 너무 추우실 거예요... 제가 집에 있는 애기 아빠한테 차 끌고 오라고 부탁해 볼게요!"


"어머! 사장님...ㅠㅠ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밖은 추우니까 여기 앉아 계세요!"


"사장님... 진짜 감사드립니다...ㅜㅜ"


영업 마감 시간을 넘겼는데도 따뜻한 실내에 우리 가족이 머무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고, 차량으로 데려다 주시려는 선한 마음을 베푸신 무릉외갓집 사장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박이 떨어져 살짝 번져 버린 스탬프... 험난했던 12코스를 떠올리게 하는!!


사장님! 혹시나 해서 다시 택시 호출해 봤는데 1대가 와준대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차로 13분 거리나 되는 모슬포항에 있던 택시 1대가 내 호출에 응해준 것! 급히 사장님 남편분께 연락을 드려 안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택시를 기다렸다.


"사장님, 덕분에 택시 타고 무사히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들 머물 수 있게 퇴근도 못하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예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친절하신 무릉외갓집 사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눈발이 휘날리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다가오던 택시! 저희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ㅠㅠ


6시쯤 무릉외갓집에서 나오며... 이것도 다 추억이 되겠지^^;


흐엑~ 이 냄새 뭐야? 돼지갈비 냄새만 맡아도 너무 좋아!


우여곡절 끝에 우리 차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흩날리는 눈과 비를 헤치며 집으로 오던 중, 저녁을 먹기 위해 돼지갈비 집에 들르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돼지갈비 냄새를 맡으며 행복해 하던 아이들^^; 하루종일 강풍과 추위에 시달려 허기가 졌던 모양인지, 아이들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밥을 뚝딱 먹는 모습이었다.


"오늘 진짜진짜 고생 많았어! 갈비 맛있게 먹고 내일은 푹 쉬자!"


올레 12코스 완주 기념, 돼지갈비 만찬! (시부모님 찬스 덕분입니다^^)


돼지갈비를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안전 안내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오늘 12코스를 걸으면서 맞은 바람이 왜 그렇게 셌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는 내용이었다.


제주 앞바다 (특히 서부 앞바다) 풍랑 경보!


다음 올레길을 걸을 땐 부디! 제발! 바람을 피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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