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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과 추위도 꺾지 못할

2코스,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당한 길

by 체리뽀


엄마, 오늘 바람 소리 왜 이래?


겨울 올레길 걷기의 가장 큰 변수는 '비' 그리고 '바람'이다. 이 추운 겨울에 아이들을 비 맞게 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강수 확률이 낮은 지역의 코스를 고르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올레길 걷기 전날에는 일기 예보부터 살핀다. 변화무쌍한 제주의 날씨는 항상 예보를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조건 비가 온다는 곳 정도는 피하기 위함이랄까?


아이들이 지난 번부터 2코스를 걷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성산 쪽을 뺀 제주 전 지역에 비 예보가 내려져 있었다. 이건 올레 2코스를 걸으라는 하늘의 뜻이로구나!


"엄마... 오늘 바람 소리 왜 이래? 귀신 소리 같기도 하고 너무 무서워! 우리, 이 바람 속을 걷는 거야?"


다만 성산 쪽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뒤에야 아차 싶었다. 올레길 걷기의 변수인 '비'는 피했지만 '바람'은 미처 피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던 것!


성산은 원래도 바람이 센 지역인데, 그 날은 역대급으로 차갑고 거친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바람님! 제 간절한 바람이 하나 있다면... 오늘 무사히 올레길 걸을 수 있게 조금만 살살 불어주시길 부탁드려요... (살려주세요!)


시작 지점인 광치기 해변에서 마주한 엄청난 아침 풍경!


엄마!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지금 해 뜨고 있는 거야?


광치기 해변에는 아침 8시 30분쯤 도착했으니 일출 시각보다 한참 뒤였다. 그러나 구름으로 잔뜩 뒤덮여 어둡던 하늘에서 한줄기 빛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던 해는 이제 막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와... 진짜 추운데, 진짜 멋있다! 이 광경을 보려고 우리가 오늘 2코스를 고른 거구나!"


제주에 살기 시작하면서 심심하면 찾던 곳이 여기 광치기 해변이었다. 바다 위로 솟은 성산일출봉을 감상하기 좋아서, 썰물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초록 이끼로 덮인 바위를 보는 게 좋아서였다.


그런데 오늘, 그 어떤 계절의 어떤 순간보다 찬란하고 눈부신 광치기 해변을 마주하게 되었다.


올레 스탬프를 찍는 아이 머리 위로 찬란히 쏟아지던 빛... 그저 빛...


매서운 강풍이 몰아치던 광치기 해변! 겨울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꼈는데도 온몸이 달달 떨리게 추웠다. 얼른 바다를 등지고 올레길을 걸으러 가야 하는데, 쉽사리 발이 떼지지 않았다.


"와... 바람도 미쳤는데... 풍경은 더 미쳤다 진짜!"


고급 어휘를 쓰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자꾸만 미쳤다는 저급한 말만 튀어나올 뿐이었다. 우리 가족의 눈길과 발길을 모두 붙잡았던 그 날의 광치기 해변은 그야말로 예술 작품 같았다.


성산일출봉 앞으로 드러난 이끼 낀 바위
빛내림 덕분에 더 신비로운 느낌이 들던 광치기 해변
아빠를 따라 조심조심 이끼 낀 바위를 걷는 아이들
장엄한 풍광 앞에서 넋을 잃었던 순간


"와... 여보야... 2코스 시작도 전에 이미 끝났는데? 오늘 올레길 하이라이트는 단연 여기야!"


"그러게, 몇 번을 와본 광치기 해변인데도 오늘이 제일 멋있다!"


"엄마... 근데 너무 추워... 얼굴이 찢어질 것 같아!"


"나도! 나는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


바람 소리가 너무 세서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작전상 후퇴라고 해야 하나,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걷기를 시작해야만 했다.


황홀한 광치기 해변의 풍경을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걸어 볼까?


잊을 수 없는 풍경을 보여준 광치기 해변, 안녕!


어머, 유채꽃이 12월에 피는 꽃이었어?


내수면으로 접어드는 길목,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노오란 꽃봉오리가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설마, 이게 유채꽃일까?


제주로 여러 번 여행을 왔지만 겨울에는 온 적이 없었기에 12월에 피어난 유채꽃을 처음 보게 되었다. 유채꽃은 이른 봄인 2월에 피는 꽃인 줄로만 알았거늘!


"와, 유채꽃 핀 거 보니까 벌써 봄이 온 것 같다!"


"근데 봄이 왔다고 하기엔 날씨가 너무 한겨울인데?"


한겨울에 핀 노랗고 작은 유채꽃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이 모진 겨울 바람을 맞으면서도 열심히 꽃을 피워낸 기특한 녀석...^^


우리 집에도 작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꽃'같은 아이들이 있다. 이 모진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힘차게 내딛고 있는 예쁜 딸들!


12월에 핀 유채꽃에 놀라고, 이 바람 속을 뚫고 걷는 아이들에 놀라는 길!
내수면 둑방길, 뒤를 돌아보니 빛내림이 여전히 멋있습니다!
성산일출봉을 뒤로 하고 걸으니 바람이 조금 사그라듭니다.


어, 저기 오리 있다! 그것도 엄청 많이!


오조포구 안쪽으로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무리지어 다니는 오리들이 많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기 위해 다가가자 쏜살같이 달아나기 바쁘던 오리들^^;


"우와, 저기 봐! 오리들 진짜 빨리 움직인다!"


"아기 오리도 있네? 귀여워~"


"어휴~ 보이지는 않지만 저 물 속에서 물장구 치느라 얼마나 힘들까?"


아이들은 재빠르게 움직이는 오리들 모습에 감탄을 했지만, 남편은 그런 오리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에 감정이입을 하는 듯 했다.


"우리도 내년에 복직해서 저 오리들처럼 열심히 물장구치며 살아 가겠지?"


"그렇겠지? 아... 벌써 힘든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12월 들어 남편과 나는 부쩍 '제주 일년 살이의 끝, 복직한 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올레길을 완주해 낸 체력으로 다시금 일터로 돌아가 각자의 역할을 해내게 될 테지...?


오리 구경하느라 신난 아이들
성산일출봉을 보며 걷는 길
이제 식산봉으로 갑니다!




남편과 나는 두 번째로 오르는 식산봉이었다. 식산봉 정상으로 향하는 숲길은 오르막이라 약간 힘들긴 했지만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어 오히려 좋았다.


"바람이 센 날에는 바다보다 숲으로 걷는 게 훨씬 낫네!"


"하... 바람 피해서 걸으니까 좀 살 것 같다!"


"그래도 오르막은 숨차고 힘들어~"


식산봉 정상으로 가는 길
나무 사이로 성산일출봉을 조망할 수 있는 식산봉 정상^^


식산봉 정상에 오르니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몹시 추웠다. 오늘처럼 바람이 센 날은 정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어 빠른 하산만이 답이었다.


오조포구는 산책만 해도 힐링이 되니, 꼭 한 번 가보시길 :)
바닥에 쓰인 '올레길'을 따라 걸어요^^


엄마는 동생 있어서 좋았어?


바다를 벗어나 고즈넉한 마을길을 걷게 되자 서로 대화가 가능할 만큼 바람 소리가 잦아 들었다. 큰 딸은 심심했던 모양인지 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말을 걸어왔다.


"동생? 좋았지~ 엄마랑 삼촌이랑 지금도 친하잖아!"


"어릴 때도 삼촌이랑 친했어?"


"아니, 전혀! 나이가 7살이나 차이 나는데도 맨날 싸웠다?"


"그럼 이모랑은? 이모랑은 자매니까 더 사이 좋았겠네?"


"아... 우리 언니는 나랑 잘 놀아주지 않았어...ㅎㅎㅎ 엄마는 언니를 좋아했는데 말이지!"


나는 삼남매 중에 끼인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나만 다리 밑에서 주워왔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자라면서 언니도 있고 남동생도 있다는 건 엄청난 복이라는 걸 깨달았다지 :)


아이들에게는 이모와 삼촌, 나에게는 언니와 남동생인 두 사람! 그들과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줄 때마다 아이들은 재미있다며 박장대소를 해댔다.


"근데 동생 있어서 좋은지는 왜 물어봤어?"


"음... 나도 외동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외동이면 뭐가 좋을 것 같은데?"


"엄마가 나만 사랑해 줄테니까!"


큰 딸은 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엄마에게 듬뿍 사랑을 받았던 건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엄마... 비밀로 할테니까 솔직히 말해줘! 동생보다 내가 더 좋지?"


"응! 당연하지! 엄마는 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오예~ 신난다!"


나의 대답을 들은 큰 딸은 신이 나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마 작은 딸이 와서 같은 질문을 했어도 같은 대답을 했겠지만, 그거야말로 특급 비밀인 걸로...


근데요, 큰 따님! 그러는 너는 왜 항상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고 말하세요? 엄마 섭섭하게시리... (엄마 은근히 뒷끝 있다? ㅎㅎ)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던 길 :)


젠틀 도넛 가게에서 당 충전 좀 하고 갈까?


남편과 예전에 가봤던 '젠틀 도넛'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찬 바람을 너무 쐬어서 따뜻한 곳이 그립던 차에 잘됐다 싶어 냉큼 들어갔다.


사장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도넛 종류를 만들고 계셨고, 아이들은 도넛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곧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먹게 된 도넛... 온 몸이 녹아내릴 만큼 달콤하고 따뜻하고 퐁신퐁신한 맛이었다.


"엄마... 정말 행복해지는 맛이야!"


첫째가 말한 대로 정말 행복해지는 맛이었다.

도넛 가게에서 도넛 만드는 거 구경하는 아이들 ㅎㅎ


너희들, 귤 먹을래?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께서 아이들에게 귤을 하나 내미셨다. 아이들 주먹보다 더 큰 귤이었다.


"이거 먹어도 되는 귤이예요?"


"그럼! 그런데 지금 먹으면 엄청 셔~ 며칠 뒀다가 까먹어 봐!"


"저 신 거 되게 잘 먹어요! 감사합니다!"


어르신이 주신 왕귤을 둘째가 냉큼 받아 들었다. 아이들이 왕귤을 보며 신기해 하는 모습을 보시던 그 어르신은 우리 남편에게 넌지시 말을 거셨다.


"어디 사는가? 주소 알려주면 애들 먹으라고 귤이나 한라봉 한 박스 보내 줄게!"


"아... 정말이요?"


"그럼! 육지 살아? 육지로 보내줄까?"


"아, 저희 지금은 제주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 주소 찍어줘~ 내가 거기 지날 일 있을 때 귤 한 박스 집 앞에 던져두고 갈게!"


"하하, 네! 그럼 주소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남편은 도넛 가게 안에서 처음 뵙는 어르신께 우리 집 주소를 알려 드리게 되었다. 제주의 귤 인심은 이렇게 후하단 말인가...


(이 날부터 약 3주가 지난 지금까지 저희 집 앞으로 던져진 귤은 아직 없습니다^^;;)

왕귤 1개 받고, 귤 한 박스도 말로만(?) 받게 된 아이들^^




도넛 가게를 나와서부터는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2코스에는 오름이 두 개 있었는데 '식산봉'은 이미 올라갔다 왔고, 남은 하나가 바로 '대수산봉'이었다.

대수산봉으로 가는 길
뒤쳐지는 둘째를 토닥이며 오르는 '대수산봉'


엄마! 나 생각없이 아빠 걸음 속도 따라 가다가 쓰러질 뻔 했어!


대수산봉 정상에는 남편과 첫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대고 있는 와중에 패딩을 벗어 던진 채로 쉬고 있던 두 사람^^;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남편이 첫째에게 암산으로 푸는 수학 문제를 냈고, 아이는 머릿속을 굴리기 바빠서 쉴 생각도 미처 못한 채 아빠의 빠른 속도에 맞춰 걸었다고 한다.


나와 둘째도 가쁜 숨을 뱉어 내느라 몇 번씩 쉬며 힘겹게 올라온 이 경사진 오름을, 단숨에 올라 왔으면 더울 만도 했다. 이 추운 날에 땀날 정도로 열심히 오름을 올라온 너, 칭찬해♡


대수산봉 정상에서 2코스 중간 스탬프도 찍을 수 있었다.


대수산봉 정상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었습니다!
저 멀리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멋진 뷰 :)
전망대에 오르니 섭지코지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추워도 너무 추워서 ㅠㅠ 얼른 바람이 덜 부는 숲길로 하산!




오후 들어 하늘이 점점 개이기 시작했다. 가끔씩 태양이 내리쬐면 불어오는 바람도 그렇게 매섭지 않게 느껴져 걷는 데 여유가 좀 생겨났다.


대수산봉을 내려와서,
무밭을 구경하며 걷는 길
여기서부터 아이들이 다리 아파 했는데...
둘째가 특히 다리 아프다 했지만, 쉴 곳이 없어 쉬지를 못했던..ㅠㅠ


그러나 날씨가 개이는 것과는 반대로 둘째의 얼굴이 잔뜩 찌뿌려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간식을 먹여도 도통 힘을 내지 못하고 힘들어 하던 둘째...


"엄마... 나 다리 아파...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돼?"


"여기 주변은 온통 밭이고, 쉬었다 갈 만한 카페도 전혀 없는 외진 곳이라... 땅바닥에 앉아서 쉬기엔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안될 것 같고... 조금 이따 혼인지 나오는데, 거기서 쉬는 게 어떨까?"


"아... 혼인지... 언제 나오는 거야... 너무 힘들어!"


아침부터 찬 바람을 헤치며 걷느라 다른 때보다 몇 배로 체력이 소모된 상태였다. 간식으로 도넛을 먹긴 했으나, 밥을 먹을 만한 식당이 보이지 않아 점심도 못 먹었으니 힘든 게 당연했다.


둘째 아이를 다독이며 혼인지까지 걷는 길이 참으로 멀고도 길게 느껴졌다.


어흑, 겨우 도착한 혼인지!!!!


혼인지에 도착해서도 바람을 피해 쉴 만한 실내 공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이용한 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처마 아래에서 간식을 까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하려 애쓸 뿐...


"어? 여기 신랑 신부 사진 찍는 곳 있다! 아빠,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언니! 내가 아빠랑 결혼할 거야~ 아빠, 나랑 결혼해줘! 응?"


"음? 아빠는 엄마랑 이미 결혼했는데?"


"아니야! 그 결혼은 무효야! 나랑 결혼해~"


"엄마는 빼고, 우리 둘 중에 선택해! 언니야, 아니면 나야?"


혼인지에서 갑자기 '아빠랑 결혼하기' 배틀이 시작되었다. 결혼은 내가 했는데, 엄마는 좀 빠지란다. 흑흑... 남편아, 너는 좋겠다? ㅎㅎㅎ 유부남인데 또 결혼하자는 애들이 둘이나 있고?


(남편은 공평하게, 두 아이 모두와 혼인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아빠랑 결혼하고 싶은 딸들..ㅋㅋㅋ


겨울의 혼인지를 걷는 내내, 수국이 만개해서 너무나 아름다웠던 여름의 혼인지를 떠올렸다.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수국이지만 내년 여름에는 또 아름다운 꽃망울을 피워 내겠지?

겨울의 혼인지
여름의 혼인지, 수국이 정말 아름다운 곳 :)




둘째는 아무리 힘들어도 드러눕지는 않는데, 첫째는 힘들면 땅바닥에 바로 드러눕는 스타일이다. 혼인지에서 한참을 쉬었다 걷는데도 첫째는 힘들다며 땅바닥에 드러눕기를 시전했다.


"아, 엄마! 부끄러우니까 내가 얼굴 가리면 사진 찍어!"


부끄러운 줄 알면 재깍 일어나야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사진 찍으라는 첫째... 덕분에 한바탕 웃으며 남은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힘들다며 땅바닥에 드러누운 첫째


드디어 도착 지점인 온평 포구로 가는 바당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온평 환해장성을 따라 가다 보니 저 멀리 온평 포구가 보였다.


온평 환해장성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2코스 도착 지점인 온평 포구가 나옵니다!!


먼저 스탬프를 찍고 있던 분들이 계셨는데, 맙소사! 아까 젠틀 도넛 가게에서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부부셨다. 가족 사진까지 친절히 찍어 주셨던 두 분... 감사합니다!


지난 주까지는 올레길을 다 걸으면 남편만 버스를 타고 가서 출발 지점에 주차해 둔 차를 가져와 나와 아이들을 태우는 식이었는데...


이토록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 바다 앞에서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못 견디게 추웠기 때문에, 차라리 가족 모두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나을 듯 했다.

칼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던 이 때...


얘들아... 다같이 버스 타고 가게, 큰 길까지 조금만 더 걷자!


아이들은 내 말을 듣자마자 좌절, 그리고 오열했다.


"말도 안돼! 난 여기서 한걸음도 못 움직여! 다리가 너무 아파!"


이미 혼인지 도착 전부터 다리 아파했던 둘째는 한계에 다다른 듯 울먹이며 외쳤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최소 15분은 걸어야 했다.


"그럼 어떡해... 이 추운데 아빠 오시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잖아... 조금만 걸으면 안될까?"


둘째는 나의 간곡한 부탁에 하는 수 없다는 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를 업어 주고 싶었지만, 몸무게가 30kg 가까이 되는 아이를 업을 자신도 없었다.


나도 이미 3만보 이상을 걸은 상태라 다리에 힘이 풀려 있어 자칫 하다간 둘다 넘어질 우려도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앞서 걷던 남편이 둘째 앞에 멈춰 서더니 업히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둘째는 세상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빠 등에 냉큼 업혔다.


아빠는 위대하다! 아빠는 강하다!


남편도 많이 힘들었을텐데, 둘째를 업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아빠는 위대한 존재였다.


나도 어렸을 때 외출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깜빡 잠들면 아빠가 나를 업어 주시고는 했다. 엄마는 계속해서 나를 흔들어 깨웠지만 나는 일부러 끝까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빠가 나를 업고 엘리베이터가 없던 4층 우리 집까지 안전하고 편하게 데려다 주는 그 기분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끔 업혔던 아빠의 등은 참 따뜻하고 아늑했다. 분명히 내가 자는 척 하는 줄 아셨을텐데 "됐다, 마! 애가 마이 피곤한갑네~ 내가 업고 올라 가지 뭐!" 하셨던 아빠...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에도, 이미 돌아가시고 세상에 안 계신 지금도, 나에게는 영원한 슈퍼맨인 것이다. 오늘 아빠 등에 업힌 둘째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바람을 피해 버스를 타고 함께 이동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오늘의 출발 지점인 광치기 해변 정류장에 내리니 차를 세워둔 곳까지 금방이었다.


그런데... 어랍쇼? 갑자기 남편이 첫째를 업고 가는 게 아닌가! 나중에 남편에게 들으니 첫째가 다가와 조심히 부탁하더란다.


"아빠... 나도 동생처럼 업어주면 안돼?"


공명정대한 나의 남편! 혼인지에서 두 딸에게 동시에 애정 공세를 받은 만큼, 공평하게 업어 주기로 했다고 한다. 역시, 인기남은 피곤한 법!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주차한 차까지 첫째를 업고 가는 남편^^;


"여보... 나도 다리 아픈데... 나는 언제 업어줄 거야?"


"하... 두 여자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너까지?"


"아놔! 자꾸 까먹나 본데, 내가 본처야! 내가 조강지처라구! ㅋㅋㅋ"


"그건 모르겠고... 이놈의 인기... 언제쯤 식으려나..."


식을 줄 모르는 남편의 인기는, 다음 편에도 쭉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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