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코스, 우도를 한 바퀴 둘러보는 길
만 22세였던 내가 올레길 걷기의 기쁨과 고난을 처음 느꼈던 게 우도 올레길이었다. 2024년 마지막 달,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도 올레길을 다시 걷게 되었다.
갓 대학교를 졸업해 파릇파릇한 청춘이었던 나는 어느새 만 36세가 되었고,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딸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13년 전에는 나홀로 걸었던 우도를 이번에는 든든한 길잡이이자 말동무인 딸들과 함께 걷게 되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기대가 되는 올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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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가는 배를 올해 두 번이나 타보네!
추석 연휴 때 첫째 아이 친구 가족을 만나러 우도에 간 적이 있다. 그 친구 어머니 고향이 우도여서 연휴 내내 우도에 있을 테니 우리 가족도 놀러 오라고 초대해 주신 덕분이었다.
첫째는 우도 가는 배를 타고 가면서 그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여름 방학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서 자주 볼 수 없게 된 아이의 단짝이었다.
- 나는 오늘 우도 올레길 걸으러 너희 외할머니 사시는 우도에 가고 있어.
12월 29일, 우리 집 아이들은 방학까지 며칠이 더 남은 상태였다. 제주 서쪽 학교에 다니는 그 친구 역시 아직 학기 중일 테니 우도 할머니 댁에 와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우리는 올해만 벌써 두 번째, 성산항에서 배를 타고 우도로 가는 중이었다.
오늘 바람도 많이 불고 애들도 있는데 전기차 안 빌려요?
천진항에 내려 스탬프를 찍고 있던 우리에게 전기차 대여 업체 사장님이 말을 걸어 오셨다. 우도는 렌트카 반입이 허용되지 않기에 거의 모든 관광객이 전기차를 빌린다.
"저희는 우도 올레길 걸으러 왔어요!"
"우도 올레길 다 걸으려면 5시간씩 걸려~ 어떻게 걸으려고 그래?"
"괜찮아요! 우도는 다른 데보다 훨씬 길도 짧던데요?"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들 덕분에 사장님의 호객 행위는 소득없이 끝나 버렸다. 우리는 우도봉부터 들르는 역방향 코스를 따라 걷기로 했다.
우도의 상징인 땅콩 그림이 그려진 길 안내 표지판이 귀여워 사진도 한 장 남기고 출발했다.
우도에 왔으면 우도봉에는 올라 가야지?
소머리 모양의 우도봉을 오르려는데 올레길은 그 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 13년 전에는 분명 올레길이 우도봉 정상을 향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루트가 바뀐 듯 했다.
우도봉을 오르며 바라본 하늘, 바다, 제주 본섬의 자태, 저 멀리 한라산, 우뚝 솟은 성산일출봉까지! 엄청난 풍광에 압도 당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올레길은 우도봉 반대편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뒤따라 오던 다른 올레꾼들이 주어진 경로를 따라 걷는 게 보였다.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나는 올레길을 잠시 벗어나서라도 우도봉을 올라가고 싶었다.
13년 전에 느꼈던 그 감동을 아이들과 남편도 느껴봤으면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챈 남편이 우도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얘들아, 우도까지 왔는데 우도봉에는 올라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빠의 제안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세차게 저었다.
"저 경사진 오르막길을 오르자고? 올레길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도 다 올레길만 따라서 가고 있잖아~ 올레길만 걷기에도 힘들어요!"
"우도에서 제일 높은 곳이 바로 저기인데 한 번 올라가 보자! 싫으면 엄마랑 아빠만 올라갔다 올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우도봉으로 가는 데크길을 성큼성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니, 엄마랑 아빠 둘이서만 걷고 온대니까 그러네? ㅎㅎㅎ
(아이들은 자기들 빼고 엄마 아빠 둘이서만 무얼 하는 걸 극도로 싫어 한답니다^^; 그래서 이 험한 올레길 완주 여정에도 굳이 동참하게 된 것!)
어? 길이 막혀 있어! 아... 올라온 길로 다시 내려가야 하다니!
내 기억으로는 우도봉 정상에 올랐다가 반대편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 있었던 것 같은데... (13년 전이라 확실치 않음, 강산이 바뀔 만큼 아주 오래 전 일!)
정상 가까이에 올라보니 송전탑 같은 걸 보호하기 위한 철책으로 길이 막혀 있었고, 열심히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가야 다시 올레길과 만날 수 있었다.
"아, 열심히 올라왔는데 또 내려가야 해! 이럴 거면 왜 올라온 거지?"
"으... 이쪽으로 가다 보면 올레길이랑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눈으로 나를 욕하는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이었겠지? 그래도 우도봉 정상에 올라서 본 풍경은 멋지다고 하던 아이들... 그래! 엄마가 이걸 보여주고 싶어서 올라 오자고 한 거야!
"우도봉 정상에 오른 기념으로 사진 찍자! 우리 만세 한 번 할까?"
우도봉에서 내려와 다시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도봉을 오르느라 체력을 많이 쓴 탓에 아이들은 부쩍 힘들어 했다.
갑자기 계단 하나가 나타났는데, 13년 전엔 안 가봤던 '우도 등대 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이들은 의외로 이 공원을 즐겁게 둘러봤다.
우도는 올 때마다 계속 변해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예요!
우도에서 나고 자랐다는 아이 친구 엄마께서 지난 번에 해주신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 역시 13년 전의 기억과는 확연히 달라진 우도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흐르는 세월 속에 개발되지 않고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13년 전 우도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모습이 그리워지는 건 사실이었다.
최소한의 개발로 아름다운 자연과 그 지역만의 문화가 오랫동안 잘 유지되기를 바랄 뿐...
앗! 여기는 내 친구 외할머니 댁 앞이잖아! 비양도가 보이던 그 바다!
섬 속의 섬, 우도 안에 있는 비양도가 보이자 아이들이 매우 반가워 했다. 석 달 전, 한여름 같이 더웠던 추석 연휴에 이 곳에서 물놀이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제주로 전학 와서 4학년을 보내게 된 첫째는 단짝 친구를 만난 덕분에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 고마운 친구를 D양이라고 하자.
친구 D양은 여름 방학 때 이사를 가면서 전학도 가게 되었다. 아쉬워 하던 첫째 아이를 위해 우리 집에서 1박 2일 파자마 파티를 열었고, 두 아이는 찐하게 작별하게 되었다.
D양의 1학년 동생과 우리 집 2학년생 둘째도 돌봄 교실을 함께 다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 지라, 자매들끼리 넷이 붙여 놓아도 사이좋게 잘 놀아서 더욱 좋았다.
두 아이는 서로를 그리워 했지만 집과 집 사이가 1시간 30분이나 떨어져 있어 쉽게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러자 친정이 우도인 D양 어머니께서 우리 집과 가까운 우도에서 만나면 어떠냐고 먼저 제안해 주신 것!
덕분에 첫째 아이는 우도 외할머니 댁에 와 있던 단짝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추석 연휴 때 맞은 자신의 생일도 친구에게 직접 축하 받을 수 있어 매우 행복해 했다.
제주에 지인 하나 없던 우리 부부를 흔쾌히 친정 집으로 초대해 주신 D양 어머니께도 너무 감사했다. 덕분에 우도 현지인이 사는 집에 방문해 보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저희 올레길 걷고 있는데, 오늘 우도 올레길 걷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죠?"
"그럼요! 30도 넘는 이 날씨에 우도를 걷는 건 불가능이예요~ 이런 날씨엔 바다에서 놀아야죠!"
그렇게 우리 가족과 D양의 가족은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비양도 앞 바다에서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했고, 우도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는 특별한 경험도 누릴 수 있었다.
D양 가족과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며 비양도를 지나쳐 걸었다. 이 때라도 D양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 볼 걸, 하는 후회를 나중에야 하게 된 건 비밀...ㅠㅠ
왜냐하면 마침 D양 가족도 우도에 와 있었다는 걸 배를 탄 직후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올레길을 걷느라 휴대폰을 가방 속에만 넣어뒀던 첫째가 돌아가는 배 위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D도 지금 우도에 있대! 일찍 방학해서 할머니 댁에 놀러와 있다고 아침에 답장해 줬는데... 그걸 내가 이제야 봤어! 어떡해..."
아이는 정말 속상해 했다. D양이 다니는 학교가 일찍 방학을 한 덕분에 크리스마스 때부터 쭉 우도에 머물고 있었다는데,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날린 게 너무 아쉬운 듯 했다.
휴대폰도 보지 않고 올레길을 걷는 데만 집중한 딸아! 엄마가 D양 만날 수 있게 따로 약속 잡아 줄게! 너무 속상해 마렴 :)
하고수동 해수욕장 진짜 예쁜데!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좀 아쉽다...
우도 올레길을 걷기엔 차라리 겨울이 나았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보다 오늘처럼 흐린 날이 걷기엔 딱이었는데, 그래도 뭔가 좀 아쉬웠다.
우도의 고유한 바다 빛깔을 보려면 맑은 날에 왔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햇빛 아래 완연히 드러나는 쪽빛 바다를 볼 수가 없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아빠, 나 지금 너무 추운데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 먹어도 될까?
석 달 전 우도에 왔을 때 신나게 바다 물놀이만 하느라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을 못 먹었던 우리 가족! 우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꼭 하고 싶던 것 중 하나가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 먹기였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둘째 아이가 콜록대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하고수동 해수욕장 앞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는데, 아이 스스로도 난감한 눈치였다.
"하... 감기 걸릴 것 같은데 아이스크림 먹어도 되나? 몸도 으슬으슬 추운데 다른 거 먹을까? 근데 나 진짜 땅콩 아이스크림 먹고 싶었단 말이야! 차가운 거 꾹 참고 그냥 아이스크림 먹을까?"
둘째는 카페까지 걸어가는 내내 아빠에게 메뉴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페 앞에 다다랐을 때 아이는 결심이 선 듯 이렇게 말했다고...
"아빠, 아무리 추워도 나 땅콩 아이스크림 먹기로 결심했어!"
아이들은 미니 츄러스가 하나씩 얹어진 땅콩 아이스크림을, 나와 남편은 큰 츄러스와 뜨끈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미식가인 둘째는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떠서 혀에 녹여가며 먹기 시작했다. 처음 한 입을 맛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던 둘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지!
"아이스크림 먹기로 결정한 아까의 나, 정말 칭찬해!"
기침하며 몹시 추워하던 아이는 땅콩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뒤, 언제 그랬냐는 듯 기침이 잦아 들었다. 당 충전을 해서 그런지 춥지도 않다며 그 뒤로는 씩씩하게 더 잘 걷던 둘째^^ (너무 귀여워♡)
아기자기한 돌담 사이로 길은 계속 이어졌다. 오후 들어 하늘이 점점 개이고 있어 기분마저 좋았다.
우와! 여기 돌 모양 진짜 신기하다!
아이들과 꼭 방문하고 싶었던 '홍조단괴 해빈'에 도착했다. 땅콩 강정 과자 모양으로 생긴 '홍조단괴'로만 이루어진 바닷가인데 그 가치가 매우 높아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되어 있는 곳이었다.
성산일출봉쪽 바다에서부터 밀려와 쌓였다는 홍조단괴 퇴적물은 꽤 경사가 있는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그 경사진 언덕이 천연 미끄럼틀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언덕을 힘겹게 올라 와서는 그대로 풀썩 앉아 미끄럼틀 타듯 쭉쭉 내려가던 아이들^^; 신고 있던 장화 속에 들어간 홍조단괴를 털고 나면, 도돌이표처럼 무한 반복으로 미끄럼틀을 탔다.
하루종일 거기서만 놀라고 해도 잘 놀 것 같았던 아이들^^; 덕분에 나도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서 더 아름답게 반짝이던 홍조단괴 해빈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앗, 여기가 13년 전에 나 혼자 점심 먹었던 햄버거 가게야! 빨간 머리 앤의 집!
홍조단괴 해빈에서 신나게 놀고 손을 씻으러 잠시 들른 화장실. 그 뒤편으로 문이 굳게 닫힌 건물 하나가 보였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 '빨간 머리 앤의 집'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13년 전에 우도 올레길을 걷다가 혼자 들어가 햄버거를 사먹었던 그 가게라는 걸!
오늘은 13년 전에 나혼자 걸었던 올레길의 추억을 떠올리며 걸은 길이자, 첫째 아이 친구네와 보낸 여름날의 추억을 동시에 떠올리며 걸은 길이었다.
우도 올레길은 다른 길보다 짧기도 했지만, 많은 추억들을 떠올리며 걷느라 더 즐겁게 완주할 수 있었다. 배를 타기 전에 시간이 남아 완주 스탬프도 찍고 기념 사진도 기쁘게 남겼다.
그러나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기 위해 들른 천진항 대합실에서 나오는 뉴스 속보를 보자마자 온 가족이 얼어 버리고 말았다.
12월 29일, 우도 올레길을 완주한 것보다 무안 공항 참사가 일어난 날로 오래도록 아프게 기억될 날이었다. 우도에서 배를 타고 나오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분들의 명복을 빌었다.
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던 아빠 얼굴도 떠올랐다. 누구나 사고를 당할 수 있다지만 그게 나의 가족일 수도, 어쩌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심장이 내려 앉는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랍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이 누군가에겐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내게 주어진 날들을 감사함으로 가득 채우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