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코스, 이토록 따뜻한 크리스마스라니!
엄마, 우리 크리스마스에 뭐할 거야?
"우리? 음...... 크리스마스니까 특별히 올레길 걸을까?"
"엥? 그건 특별한 게 아니잖아!"
"시내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게, 제주시 쪽 올레길 걷는 거 어때?"
"그러면 우리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탕 많이 사주면 안돼?"
"그래~ 아빠가 크리스마스니까 특별히 사탕 많이 사줄게!"
"오예! 아빠 최고!"
"크리스마스에 올레길 걷는 거 너무 좋아!"
솔직히 아이들에게 말을 꺼내기까지 걱정이 좀 됐다. 크리스마스 날마저도 올레길을 걷자고 하기엔 아이들에게 상당히 미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쿨하게 OK 해주었다. 올레길 걸을 때 먹을 간식을 평소보다 많이 사주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아이들은 큰 마트에서 마음껏 골라온 간식을 각자의 배낭에 가득 채운 채로 잠이 들었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크리스마스 날에 굳이 올레길을 걷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3주째 강풍과 추위 속을 걷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모처럼 크리스마스 날에만 14도까지 오른다는 희소식을 듣게 된 것!
올레 17코스 시작점인 광령 1리 사무소에 도착하니 바람이 잔잔해서 전혀 춥지 않았다. 이제 막 해가 뜨고 있었는데도 포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날씨였다.
'됐다! 오늘은 따뜻한 날씨 덕분에 반 이상은 이미 걸은 거나 다름 없다!'
꽤나 울퉁불퉁한 보도블럭 길을 따라 걷던 중이었다. 길가에 핀 동백꽃 구경을 하며 기분 좋게 스타트를 했는데, 앞서 가던 둘째가 길 위로 뻗어 나온 나무 뿌리에 걸려 크게 넘어졌다.
"으아아아아앙!"
슬라이딩 하듯 대자로 엎어지며 넘어진 둘째. 얼른 달려가 일으켜 세웠더니 무릎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바지를 올려서 살펴보니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고... 초반부터 넘어져서 어떡해... 걸을 수 있겠어?"
"응... 조금 아프긴 한데 천천히 걸어 볼게! 대신 엄마가 내 손 꼭 잡아줘야 돼!"
처음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길래 걷지도 못할 줄 알았더니, 둘째는 이내 눈물을 닦고 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이의 걷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져 감동이 밀려왔다.
넘어지면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서 걸으면 되지!
올레길 위에서 아이들은 유독 큰 사람으로 보인다. 어쩔 때는 나보다 더 침착하게 행동하기도 하는데, 특히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더욱 놀라게 된다.
지난 주에 12코스를 걸을 때는 강한 바람에 떠밀려 넘어지고, 오늘은 넘어지면서 무릎에 피까지 나는 수난을 겪은 둘째... 투정을 부려도 모자랄 판에 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는 올레길 위에서 삶의 진리를 온몸으로 배우는 중이었다.
길은 무궁무진하게 다양하고 많다는 걸.
꽃길도 가시밭길도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다 맞닥뜨리며 걸어 나가야 한다는 걸.
험한 길 위에서 넘어지더라도 마냥 나자빠진 채로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살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는 거고 그럴 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걸으면 된다는 걸.
"엄마가 손 꼭 잡고 같이 걸어 줄게! 너무 아프면 말해!"
"헤헤... 무릎은 좀 아픈데, 엄마가 챙겨 주니까 좋다!"
배실배실 웃는 둘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아이는 아픈 만큼 한뼘 더 자라고 있었다.
(그 다음 올레길부터 아이는 상처났을 때 바르는 연고와 밴드를 꼭 자기 배낭에 챙겨 다닌답니다^^;)
어머, 평일인데 이 시간에 애들이 학교를 안 갔네?
무수천 길 위에서 마주친 동네 아주머니께서 놀란 듯 말을 걸어 오셨다. 수요일 오전 10시인데 학교에 안 간 어린이들이 왜 여길 걷고 있는지 궁금하신 듯 했다.
"오늘 크리스마스예요! 빨간 날이요!"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알려 드리자 아주머니께선 또 한 번 놀란 표정이 되셨다. 나도 저 아주머니처럼 나이가 들면 크리스마스 날조차 잊고 살게 될까?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엄마, 껌 하나 씹을래?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가! 간식을 넉넉하게 챙겨온 둘째가 귀여운 산타처럼 먹을 것을 선물해 주었다. 둘째가 건네준 껌 종이에는 점괘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어? 껌 종이에 뭐라고 써 있네? 남을 배려하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 보라네~"
"푸하하~ 평소에 얼마나 배려를 안 했으면! 배려 좀 해라!"
남편은 이 때다 싶어 깔깔대며 나를 놀려댔다. 그걸 보던 둘째가 남편에게도 껌 하나를 슬며시 건넸다.
"자, 아빠는 이 껌 줄게! 읽어 봐!"
"깨끗하게 씻기? 뽀득뽀득 상쾌하게 지내자? 딸~ 아빠 자주 씻잖아!"
"으이구~ 여보야! 깨끗하게 좀 씻고 다녀..ㅋㅋ 오죽하면 딸이 그걸 주냐!"
서로 놀리기에 진심인 우리 부부! 그런 엄마 아빠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센스 있게 먹잇감을 던져주던 둘째! 껌 하나로도 웃을 수 있어 즐거운 순간이었다.
무수천을 따라가다 보니 바다와 맞닿은 월대천도 만나게 되었다. 월대천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이 있어 도심 속 쉼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물이 흘러서 바닷물이 되는 건가 봐! 그럼 이 물은 짤까, 안 짤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뒤늦게 징검다리를 건너러 내려온 첫째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다랑 연결된 이 물은 과연 짤 것인가, 안 짤 것인가?
"아빠 생각엔 안 짤 것 같은데... 니 생각은 어때?"
"코 앞이 바로 바다잖아! 그러니까 소금물이 여기 와서 섞이지 않았을까?"
"글쎄... 그렇게 궁금하면 살짝 찍어서 맛 보던지!"
"진짜? 그래도 돼?"
첫째는 아빠와 대화를 나누다 말고, 허락을 구하는 눈빛으로 대뜸 나를 쳐다 보았다. 흐르는 개천 물에 뭐가 섞였을지 몰라 한 방울도 안 마시게 하고픈 게 엄마 마음이지만...
남편은 조심성 많은 나와는 달리 어린 시절에 굉장한 호기심 대장이었다고 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려면 직접 먹어 봐야지! 라는 신조를 가지고 계신 분^^;
그 아빠에 그 딸이라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첫째는 개천의 물을 찍어 혀에 맛보는 과감한 행동을 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둘째도 덩달아 물맛 감정하기에 동참!
"어때? 바닷물처럼 짜, 안 짜?"
"아빠 말대로 하나도 안 짜! 거참 신기하네~"
궁금증을 직접 해결한 첫째는 세상 뿌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만약 엄마인 나랑만 있었다면 눈치만 보다가 물맛도 보지 못한 채 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엄마인 나는 '안 돼, 위험해, 조심해!'라는 말을 자주 하며 아이들의 행동에 제약을 걸 때가 많은데, 이게 사실 아이들의 자유로운 탐색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이 때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아빠이다. 엄마보다 허용 범위가 넓은 아빠는 '궁금하면 직접 해봐! 정말 위험한 거 아니면 괜찮아!'라며 아이들이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올해 남편과 동반 육아 휴직을 하며 새삼 깨달았다. 아빠란 사람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훌륭한 길잡이이자 큰 스승이라는 걸!
길은 외도를 지나 내도로 접어 들었다. 서귀포 쪽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늘 제주 남쪽 바다만 보다가, 오랜만에 제주 북쪽 바다를 보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우와! 말 모양 등대는 처음 봐!
이호테우 해변으로 가는 길, 하얀색 말과 빨간색 말 모양 등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말 모양 등대여서 그런지 더 깜찍해 보였다.
걷는 길 곳곳에 빨간 말과 하얀 말 모양으로 된 장식이 많아 아이들과 사진 찍는 재미도 쏠쏠했다. 덕분에 이호테우 해변까지 힘든 줄도 모르고 걸을 수 있었다.
이호테우 해변을 지나 도두봉에 오르기 전, 배가 고파서 식당부터 찾았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외식 메뉴인 짜장면과 짬뽕을 먹으러 고고!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로 가득 찬 중국집에서 배불리 식사를 했다. 외투를 벗고 걸어야 할 만큼 따뜻한 날씨 덕에 차가운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물고 다시 길을 나섰다.
여기 재미있는 민속놀이 다 있네!
도두항으로 가는 길은 '도두 추억애(愛) 거리'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민속놀이 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된 곳이었다. 굴렁쇠 굴리기, 공기 놀이, 고무줄 놀이, 팽이 치기, 딱지 치기, 말타기 놀이 등!
너무 잔혹할 것 같아 일부러 보지 않은 <오징어 게임>에도 이런 놀이가 많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말타기를 열심히 하던 어린 시절 내 얘기를 해주니 아이들이 매우 재미있어 했다.
아... 나 이상하게 너무 힘들어! 더는 못 걷겠어!
도두봉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첫째가 더는 못 가겠다며 철푸덕 쓰러지듯 앉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배도 살살 아프고 뭔가 속이 답답해!"
"진짜? 짜장면 급하게 먹어서 체했나... 화장실 가고 싶은 배야?"
"아니, 그런 배는 아닌데... 그냥 힘들어! 더는 못 걷겠어!"
아이는 숨을 거칠게 쉬며 주저앉은 채로 힘들어 했다. 짜장면을 급하게 먹어서 그런 건지, 식사 직후 먹은 아이스크림이 너무 차가웠던 건지, 이유만 추측해 볼 뿐이었다.
"내가 살살 데리고 올라 갈테니 둘째랑 먼저 가!"
남편에게 첫째를 맡기고, 무릎 부상을 당한 둘째랑 먼저 도두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첫째의 배 아픔 문제는 화장실에 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고 한다.
도두봉에 오르니 한라산 능선과 제주 공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도두봉 정상에는 제주 공항으로 날아 들거나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기 위해 많은 분들이 모여 계셨다.
그러니까 이 날은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이었고, 온 국민이 큰 슬픔과 충격을 받은 무안 공항 참사가 불과 4일 후에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한 날이었다.
올레 17코스를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많은 비행기를 목격했고, 도두봉에 올라서는 비행기 이착륙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 당시엔 비행기가 한 대씩 하늘로 날아갈 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었는데, 지금은 비행기만 봐도 먹먹한 기분이 든다. 다시는 이런 참혹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년 전에 왔었던 도두 무지개 해안 도로네!
도두봉을 내려가니 4년 전에 와본 적이 있는 도두 무지개 해안 도로가 나왔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돌들이 푸른 바다와 잘 어우러져 있어 사진 명소로도 유명한 곳!
자칫 하면 바다로 떨어질 것 같아 위험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돌 뒤편으로 충분히 넓고 평평한 공간이 있어 안심하고 걸으면 된다^^
아이들은 끝없이 이어진 무지개 빛 돌을 밟으며 이 구간을 신나게 걸어 나갔다.
산리오! 키티! 폼폼 푸린! 시나모롤! 마이 멜로디다!
눈 앞에 갑자기 아이들을 현혹시키는 녀석(?)들이 대거 등장했다. 아이들이 워낙 좋아해서 나도 이름을 아는 캐릭터들이 승무원 복장을 한 채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맞은 편 주황색 건물로 와보라고 아이들을 유혹하고 있던 캐릭터들! 아이들이 꼭 가보고 싶다고 해서 들러 본 그 곳은 제주 항공에서 운영하는 소품샵 및 카페였다.
구경 삼매경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 결연한 얼굴로 아빠에게 다가 오더니 DEAL을 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우리 집 재정 경제부 장관인 남편은 물건을 함부로 사지 않는다.
"아빠... 있잖아... 우리 뭐 좀 사주면 안 될까?"
"안 돼! 여기는 관광객들이나 여행 온 기념으로 물건을 사는 곳이야!"
"아... 너무 예쁜데... 정말 갖고 싶은 게 있는데..."
"비싼 돈 주고 사줘도 한 번 가지고 놀고 거들떠도 안 볼 테니까 사주고 싶지 않아~"
남편은 단호하게 답했다. 솔직히 내 눈엔 그런 남편이 너무 하다 싶었다. 크리스마스에 아무 불만 없이 올레길까지 열심히 걷는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애들 크리스마스 선물 셈 치고 뭐 좀 사주지..."
내가 넌지시 던져 봤지만 남편은 못 들은 척 했다. 충동적인 소비, 불필요한 소비, 계획 없는 소비를 혐오(?)하는 남편에게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아빠~ 그럼 우리 용돈으로 사게 허락 해주라~ 제발 제발~ 응?"
"아빠가 먼저 결제해 주면 집에 가서 돈 갚을게요! 응응? 아빠 부탁해~"
철옹성 같은 남편을 무너뜨린 건 딸들의 협공 애교였다. 딸바보 남편은 딸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견뎌내지 못하고 아이들이 가지고 온 물건을 자연스럽게 선결제 해주었다.
"너희들, 집에 가서 꼭 돈 갚아야 된다!"
"네, 아빠! 너무 고마워~ 진짜 갖고 싶었는데 히히!"
"아빠 사랑해요! 아빠 최고! 아빠 짱!"
아이들은 가방에 전리품을 잘 챙겨 넣으며 다시 걸을 채비를 마쳤다. 소품샵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한 탓에 남은 길은 더욱 부지런히 걷기로 했다.
아빠는 차 가지러 먼저 출발해야 될 것 같아! 아빠는 용두암이랑 용연 계곡 많이 봤거든! 너희들은 엄마랑 걸으면서 구경 다 하고 만나자~
차를 두고 온 광령 1리까지 가는 버스가 곧 끊길 시간이었다. 남편까지 함께 완주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도착해서 바로 저녁을 먹으려면 차가 꼭 필요했다.
남편이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먼저 간다고 하자, 갑자기 첫째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빠, 나도 같이 가면 안돼? 아빠가 차 가지러 갈 때 나만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잖아!"
"완주를 일찍 끝냈으면 차 가지러 갈 때 너랑 가려고 했지, 오늘은 아니야~ 아빠만 갔다 올게!"
"아아아악! 싫어! 나도 따라 갈래!"
"버스를 두 번 넘게 갈아탈 거고, 중간에 버스 끊기면 30분 정도 걸어야 될 수도 있어! 아빠 혼자 부지런히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ㅇㅇ야, 아빠는 17코스 남은 구간의 길을 여러 번 가봐서 안 걸어도 괜찮으신 거야! 그런데 너는 여기서 아빠를 따라 가면 17코스 완주를 못 하게 되는 건데... 그래도 돼?"
첫째는 나의 말에 잠시 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혹시 다리 아파서 그만 걷고 싶어? 그래서 아빠 따라 버스 타고 싶은 거야?"
"아니!!! 나 힘들어서 우는 거 아니야!!! 진짜야!!!"
"그러면 엄마랑 17코스 끝까지 걷자. 네가 아빠랑 간다고 해서 운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올레길 완주를 포기하면서 아빠를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첫째는 내 말에 다시 한 번 더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이내 감정을 추스리는 모습이었다.
"아빠, 다음에 올레길 빨리 완주하고 나면 차 가지러 갈 때 나만 데려가 줘! 약속!"
"그래! 아빠가 약속 꼭 지킬게~ 오늘은 아빠 몫까지 잘 걸어줘! 울지 말고~"
문득 머리 위로 거대한 물체가 지나가고 있어 위를 올려다 보았다. 알고 보니 우리 가족이 서 있던 지점이 착륙하는 비행기가 내려오기 직전인 용담 포구 근처였다.
살다살다 이렇게 가까이서 비행기 아랫면을 본 건 처음이었다. 몇 대의 비행기가 우리 머리 위를 지나쳐 무사히 착륙하는 것을 보았고, 남편은 차를 가지러 유유히 사라졌다.
하루종일 맑았던 하늘이 제주 시내에 가까워 질수록 흐려지고 있었다. 예보에는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날씨였다.
다리가 몹시 아팠지만 해도 저물어 가고 비도 올 것만 같아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아이들은 중간중간 재미있는 길에서는 토끼처럼 뛰다가, 지루한 길 위에서는 한없이 느려졌다.
얘들아, 관덕정 도착했다! 여기 근처에 아마 도착 스탬프가 있을 거야!
아이들에게 사기(?) 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한 달 전부터 17코스 종점이 관덕정 분식에서 김만덕 기념관으로 바뀌었다는 공지는 이미 올레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뒤였다.
분명히 '김만덕 기념관'이 종점인 줄 알고 있었는데도, 다리가 너무 아파서 정신도 놔버렸던 건지 예전 종점이었던 '관덕정 분식' 속의 관덕정이 보이자 도착했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엄마, 여기가 관덕정이야? 근데 파란색 올레 스탬프 찍는 곳이 안 보이는데?"
"이상하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걸으면서 찾아 볼까?"
그 때까지도 몰랐다. 제주 목관아 관덕정 앞은 올레길 17코스 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서부터 종점까지는 자그마치 15분을 더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ㅠㅠ
얘들아, 진짜 미안해! 엄마가 착각한 거였어! 종점이 김만덕 기념관으로 바뀐 걸 깜빡 잊었네... 여기서 좀 더 걸어야 할 것 같아ㅠㅠ
아이들은 진심으로 좌절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며 목관아까지 갔는데, 여기서 더 걸어야 한다니..ㅠㅠ 아이들보다 내가 더 상심이 컸다. 심지어 우려했던 비까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쓰고 조금 걸으니 칠성로 쇼핑타운을 통과하는 길이 나왔다. 비를 막아주는 아케이드 지붕 덕분에 비 걱정 없이 걸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1시간 전에 출발했던 남편은 아직도 차를 주차해 둔 곳으로 이동 중이라고 연락이 왔다. 버스를 갈아타고 가다가 중간부터는 버스가 없어 30분 정도 걷는 중이라고... (남편, 힘내요ㅠㅠ)
다행히 김만덕 기념관은 공휴일이었던 크리스마스에도 운영 중이었다.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고 하길래, 남편이 올 때까지만 기념관 내부를 천천히 둘러 보기로 했다.
김만덕 기념관이 문을 닫은 6시에도 남편은 오지 않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저녁이라 제주 시내 곳곳이 극심한 교통 체증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와 아이들은 김만덕 기념관 앞 버스 정류장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10여 분 뒤에 도착한 남편을 간신히 만나 식당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몹시 추운 저녁이었다.
차를 가지고 오느라 2시간 넘게 고생한 남편도, 17코스를 완주하느라 고생한 아이들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철판 요리 가게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힐링할 수 있었다.
"얘들아, 정말정말 고생 많았어! 메리 크리스마스~"
"아마 크리스마스 날에 올레길 걸은 어린이는 우리밖에 없을 거야!"
"아빠, 우리 진짜 완주하느라 힘들었거든! 그러니까... 아까 사준 장난감, 그냥 아빠가 사주면 안 되나?"
"그래! 우리 딸들 완주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아빠가 사주는 걸로 할게!"
이렇게 우리 가족 모두 올레길 17코스 완주라는 값진 크리스마스 선물도 받고, 아이들은 올레길을 걸은 덕분에 원하던 캐릭터 장난감도 선물 받게 되었다는 Happy Ending-
제주에서 보낼 수 있어 행복했던 2024년의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