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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스탬프는 어디에?

13코스, 중간 스탬프를 처음 놓친 길 (24th)

by 체리뽀 Feb 06. 2025


내일이면 절기상 대한인데 14도까지 오르는 거 실화야?


총 27개의 올레길 중에 벌써 24번째 올레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감개무량할 수가!


오늘은 유일하게 내륙으로만 뻗어 있는 올레 13코스를 걷기로 했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솔직히 올레길 중에 가장 기대가 되지 않는 코스였다.


대신 날씨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일이면 일년 중에 가장 춥다는 '대한'인데 낮 최고 기온이 14도까지 오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13코스는 저지 마을에서 출발해 용수 포구까지 역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는 용수 포구에 도착한 뒤에나 실컷 보는 걸로 :)


13코스는 역방향으로 걷기 시작!
시작부터 저지오름이 나옵니다.
'13코스 역방향' 글씨를 따라 갑니다.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저지오름!
싱그러운 숲으로 향하는 계단
저지오름을 오르는 내내 땀이 줄줄^^;


와! 비양도도 보이고 한라산도 보이고 산방산도 보인다!


저지오름을 오르는 내내 '역방향으로 걷기를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약 정방향으로 걸었다면 마지막에 이 오름을 오르며 다리가 너무 아파서 화가 났을 것 같은 기분이 마구 들었기 때문이다.


"저지오름... 생각보다 꽤 높은데? 만만한 오름이 아니었어!"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오른 저지오름! 정상까지 오른 수고가 아깝지 않게 아름다운 뷰가 펼쳐졌다. 서쪽으로는 푸른 바다와 비양도가, 북쪽으로는 눈 덮인 한라산이, 남쪽으로는 산방산까지 보였다.


얘들아 저기 비양도 보인다!
한라산도 엄청 잘 보여!
여기서 산방산까지 보이네?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좀 식히고 저지오름 정상에서 내려오는데 벌써 다리가 후들거렸다. 둘째는 눈에 보이는 벤치에 주저 앉더니 한탄 아닌 한탄을 늘어 놓았다.


"힝... 시작부터 오름 올랐다 오니까 벌써 다리 아파!"


"그러게, 엄마도 다리가 꽤 아프다! 근데 이렇게 힘든 오름을 올레길 가장 마지막에 걸었다고 생각해봐!"


"흐엑! 진짜 생각만 해도 끔찍해ㅠㅠ 차라리 먼저 걸은 게 낫지~"


"역방향으로 걷기를 잘했지? 이제 오름 안 나오니까 힘든 길은 끝났어!"


물론 나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확실치는 않았지만 경험상 오름 오르는 게 가장 힘들다 보니, 남은 길은 수월하리라 예상해 보았다.


"진정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니까, 위대해지기 위해 또 걸어 볼까?"


저지오름 정상을 내려와 마주치게 된 간세와 좋은 글귀^^


우와, 팽나무 너무 멋있다! 저 멀리 보이는 섬은 차귀도인가?


하늘은 쨍하니 맑았고 날씨는 한없이 따뜻했다. 1월 중순의 날씨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출발할 때부터 옷을 얇게 입었는데도 아이들은 겉옷을 벗고 걷기 시작했다.


"팽나무 뒤로 보이는 게 차귀도인가? 여기서 바다도 보이네!"


"엄마, 이 집 되게 멋있다! 마당에 있는 멍멍이도 멋있고~"


"안녕하세요! 올레길 걸으시나 봐요~"


팽나무 근처 저택에서 정장을 말끔히 차려 입으신 중년의 남성분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며 대문 밖으로 나오셨다. 손주뻘 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가우셨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여기 정말 뷰가 좋네요! 팽나무 뒤에 있는 섬이 차귀도 맞죠?"


"네 맞습니다! 제가 여기 배경으로 가족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까요?"


팽나무 뒤로 차귀도가 보이던 지점
덕분에 남기게 된 가족 사진^^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어 주신 그 분 덕에 귀한 가족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돌아서려는데 남편에게 넌지시 건네주신 말씀 한 마디가 있었으니...


"아빠한테는 딸이 최고입니다! 딸이 둘이나 있으니 귀한 보물을 얻으신 거예요~"


남편은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전했고, 아이들은 그 분이 안 보이게 된 지점까지 가서야 기쁜 표정으로 아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빠! 아까 그 아저씨가 우리 보고 보물이래~ 맞아?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너희는 아빠의 보물이지~"


"헤헤, 너무 좋다! 내가 아빠의 보물이라니~"


자신들이 아빠의 보물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더 행복해진 아이들은 아빠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며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었다.


열심히 걸어 나가는 우리 집 보물들
돌로 쌓은 듯한 낮은 성곽길도 걷고,
자잘한 돌길도 뛰듯이 잘 걷습니다.
이미 아이들은 저 앞에 먼저 가고 있고!
돌길이 무서운 엄마만 뒤쳐져서 걷는 중..ㅠㅠ


제주 올레길 위에서는 마음이 트인다. 서로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자연에 있기 때문이다.


저지오름에서 봤던 글귀에 이어, 또 다른 글귀를 발견했다. 딸들과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벅찬 감정의 근원이 어딜까 궁금했는데, 자연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자연에 있다라...'


올레길을 걷기 전, 그러니까 제주로 이사 오기 전만 해도 나는 아이들에게 '호랑이 엄마'로 불렸다. 직업병이었을까, 나는 아이들을 엄하게 가르쳤고 따끔하게 혼내는 사람이었다.


올레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서서히 엄마의 본체를 알게 되었다. 자신들보다 늘 한 수 위인 것 같았던 엄마가 사실은 허당이며 울퉁불퉁한 돌길도 잘 걷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임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거의 날아 다녔다. 항상 자신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던 엄마조차도 잘 못 걷는 길을 야무지게 누빌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먼저 태어났다는 것과 몇 년 더 살아봤다는 것, 그 외에 엄마인 내가 아이들보다 나은 점은 거의 없었다. 올레길을 걸을 때 우리는 모두 공평했고, 오히려 아이들이 내 스승이 되어줄 때가 더 많았다.


한 때는 내가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이들은 스스로 경험하며 자라고, 또 부모가 믿고 기다리는 만큼 자란다는 걸.


"엄마, 넘어지니까 천천히 와! 우리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이들은 올레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길 찾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길 위에서 헤매기도 하고 가끔씩 넘어지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겁먹지 않고 직진한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또 배우고 성장하는 중이다.     


서로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자연에 있기 때문에...


계속 보여서 궁금했는데, 아홉굿 의자공원 전망대였구나!


저지오름 정상에서부터 아이스크림 콘처럼 생긴 시설물이 계속 보였다. 그 정체가 몹시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낙천리 아홉굿 의자 공원에 설치된 전망대였다.


아홉굿 의자공원 도착!
이름에 걸맞게 여기저기 의자가 많은 공원이었다.
열심히 걸어서 전망대 꼭대기에도 가보고!
아이들 요청에 따라 의자공원 한 바퀴 돌아 보기로^^ (너희는 챔피언!!)
아이들 눈에 띈 놀이터에서도 한참을 놀고~
다양한 의자 보는 재미에 푹 빠졌던 시간!


우리가 가려던 식당 중에 한 곳은 예약 마감이고, 한 곳은 휴업 중이라네?


올레 13코스는 유명한 관광지가 없어 식당이 드문 편이었다. 의자마을 근처 돈까스 가게 두 군데를 찜해 뒀는데, 막상 전화해 보니 두 군데 다 점심 식사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올레길에서 크게 벗어난 식당으로 갔다. 지난 번에 12코스를 걸을 때 아침을 먹었던 곳인데 두루치기도 맛있고 계란 후라이도 셀프로 해먹을 수 있어 아이들 반응이 좋은 곳이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올레길과 다시 만나기 위해 큰 길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는 곧 올레 표식을 발견하게 되어 다시 호젓한 숲길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때 큰 실수를 하고 말았는데...)


잠시 올레길을 벗어나 큰 길 따라 걷는 중
아이들 다리에 붙은 수많은 도깨비풀 발견!
둘째는 이 숲을 열심히 걸은 뒤에
고사리숲길이 아니라 '도깨비풀길'로 이름 바꿔야겠다는 말을 남김^^;


13코스 재미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걷기 좋은 길이 많다!


바당길이 전혀 없어 지루할 줄로만 알았던 13코스 길은 의외로 걷는 재미가 있었다. 곶자왈로 보이는 날것 그대로의 숲을 자주 지났고, 화장실이 전혀 없는 것만 빼고는 호젓해서 더 좋은 길의 연속이었다.


나무 덩쿨들을 지나고,
숲인 듯 숲이 아닌 곳도 지나고,
돌로 만들어진 아슬아슬한 다리도 건너는 등
아이들 입에서 '재밌다' 소리가 절로 나오던 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어느 순간이었을까. 느낌상 도착 지점까지 한 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될 것 같은 지점에서 첫째가 별안간 외쳤다.


"엄마, 근데 왜 아직도 중간 스탬프가 안 나오는 거야? 이제 거의 다 와가는 것 같은데?"


첫째의 지적은 예리했다. 중간 스탬프는 적어도 총 길이의 절반이나 3분의 1 지점에는 있어야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까지 안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어? 진짜 이상하다... 중간 스탬프 지점이 어디였더라? 패스포트 꺼내서 확인 좀 해줄래?"


첫째가 가방 속에 넣어둔 올레 패스포트를 꺼내 중간 스탬프 지점이 어디인지를 살펴봤다.


"악! 어떡해? 중간 스탬프는 아홉굿 의자공원에 있다는데? 우리 벌써 한참이나 지나 왔잖아!"


오 마이 갓! 여태 23개의 올레길을 걷는 동안 번도 중간 스탬프를 놓친 적은 없었다. 사실 올레길만 따라 걸으면 눈 앞에 짠 하고 스탬프 박스가 나타났기에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었거늘...


"아... 왜 중간 스탬프를 못 봤지? 아홉굿 의자마을 안도 구석구석 다 구경했는데 왜 안 보였지?"


그 때서야 휴대폰 지도 앱을 켜고 부랴부랴 중간 스탬프 찍는 지점을 찾아봤다. 그리고 왜 우리가 중간 스탬프 를 못 보고 지나쳤는지 그 이유를 단박에 알아낼 수 있었다.


파란 길이 올레길, 우리는 아홉굿 의자공원의 다른 문을 통해 식당에 가느라 빨간 길을 따라간 것!

  

의자공원 밖으로 난 길만 따라 갔으면 금방 만났을 중간 스탬프! 그러나 우리는 의자공원 안을 열심히 구경하다가 밖으로 나가는 다른 문을 통해 식당에 들르면서 딴 길로 새버려 중간 스탬프를 놓치게 된 것이다.


"히잉... 중간 스탬프를 놓치다니! 우리 다시 가기엔 너무 멀리 온 거 아니야?"


"그렇지, 다시 돌아갈 수는 없고! 다 걷고난 뒤에 차 타고 가서 스탬프 찍어야지 뭐~"


하하... 그렇게 우리는 중간 스탬프를 찍지 못한 채 도착 지점까지 걷게 되었다고 한다. 중간 스탬프를 꼼꼼히 챙겨줘서 고맙다, 첫째야^^


못 찍고 온 중간 스탬프에 대한 미련을 남긴 채 걷는 중
유채꽃밭도 종종 지나고,
싱그러운 초록의 채소밭도 지납니다. 오른쪽은 브로콜리^^
스프링클러 물이다! 얼른 뛰엇!


와... 호수에 비친 구름이랑 하늘 좀 봐... 너무 예쁘다!


올레 13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런 기대없이 마주친 용수 저수지였다. 뭉게 구름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지만 하늘은 몹시 푸르렀고 구름들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수지 물 위로 하늘이 그대로 반영되어 마치 데칼코마니 작품을 보는 듯 했다. 위를 봐도 하늘, 아래를 봐도 하늘, 눈 닿는 모든 곳이 하늘이 되는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물 위에도 구름이 두둥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순간!
용수 저수지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감상했던 하늘♡


차귀도가 엄청 크게 보여!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아~


용수 저수지를 벗어나 큰 도로를 건너자 용수 포구로 향하는 마을 길이 나왔다. 올레길 막바지라 한계에 다다른 아이들의 텐션을 높이기 위해 뜬금없이 돌림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엄마가 먼저 부를게, 한 소절 뒤에 따라 부르면 돼! 다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다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나팔꽃 인사합니다~ 우리도 인사하며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처음에는 별 호응도 없던 아이들이 '동네 한 바퀴' 돌림 노래하는 재미에 빠져서는 무한 반복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음치에 박치인 남편은 시작과 동시에 포기를 선언했던 돌림 노래^^;


돌림 노래 덕분에 끝까지 힘을 내서 도착 지점인 용수 포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중간 스탬프를 빼먹고 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13코스 역방향 완주 성공♡


용수 마을로 접어드니 차귀도가 매우 가깝게 보입니다.
차귀도 요트가 보이는 걸 보니, 다 왔구나 싶었던 :)
13코스 역방향 걷기 끝!
그리웠던 바다와 차귀도도 실컷 봐주고~


아이고! 중간 스탬프야, 여기 있었구나~


용수 포구에서 택시를 불러다가 차를 두고 온 저지 예술 정보화 마을까지 갔다. 거기서 우리 차로 옮겨 타고 중간 스탬프 지점인 낙천 의자공원으로!


"와... 여기 있었구나, 중간 스탬프가! 우리가 딴 길로 새는 바람에 놓친 거니까 할 말이 없네..."


"얘들아, 엄마는 기념 사진 찍을 건데 너희는 안 찍을 거야?"


"응, 다리가 너무 아파서 차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


"나도 그냥 차에 있을래! 스탬프도 엄마가 대신 찍어줘~"


아이들은 잔뜩 지친 모양인지 차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다리는 아팠지만 아이들 패스포트까지 챙겨 중간 스탬프를 야무지게 찍고, 남편에게 부탁해 기념 사진도 몇 장 남기려는 순간...


"엄마, 기다려! 나도 같이 사진 찍을래~"


"아빠! 엄마만 찍어주지 말고 기다려! 나도 갈 테니까!"


그러면 그렇지, 우리 집 딸들이 나만 사진 찍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는데 싶었다. 다리 아프다더니 결국엔 열심히 뛰어와 기념 사진 남기기에 동참하던 딸들이었다.


날은 눈부시게 화창했고, 13코스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으며, 놓쳐서 아쉬웠던 중간 스탬프까지 마저 찍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깜빡 잊고 온 중간 스탬프도 찍으러 갔습니다!


오늘은 용수 저수지에서 봤던 좋은 글귀로 스물 네 번째 올레길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내가 정말로 해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되는 올레길 걷기는 앞으로 단 3개 코스만 남겨두고 있다.


마침내 긴 여정을 끝내고 하얀색 벤치 위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이런 일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해냈다는 사실 외에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은 없었다. 내가 정말로 해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충분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으면서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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