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코스, 월령리 선인장 마을을 지나는 길 (26th)
1월 마지막 날을 올레길 걷기로 마무리 하자!
설 연휴 내내 매서운 강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중간중간 눈이 내린 날도 있어 아이들은 눈 놀이를 하느라 신이 났지만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남은 올레길은 딱 2개, 제주를 떠날 날도 딱 2주를 남겨둔 상태였다. 설 연휴가 끝난 1월 마지막날, 기온이 조금 오른다는 예보가 있어 14코스를 걷기로 했다.
14코스는 올레길 중에서 가장 긴 길이의 코스였다. 거의 20km에 달하는 길을 걸으며 아이들이 행여 지루해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긴 연휴 동안 집에만 있느라 심심했다며 올레길을 걷는 걸 굉장히 반겼다. 그래, 오랜만에 콧바람 좀 쐬러 올레길 걸으러 갈까?
어? 비 온다! 오늘은 늦은 오후부터 비 온다고 했는데?
일기 예보만 믿었는데 또 뒷통수를 맞았다. 제주의 날씨는 변화무쌍 하기로 유명하다지만 올레길 초반부터 비를 만나게 되니 좀 난처했다.
"흐에에에엥~ 나 넘어졌어!"
심지어 앞서 걷던 둘째가 돌길 위에서 넘어진 채 울먹이고 있었다. 비 막을 용도로 패딩 모자를 씌웠더니 시야 확보가 안 돼서 돌에 발이 걸린 모양이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비 오니까 길도 질퍽하고 미끄러울 거야! 아래 잘 보고 걷자~"
다행히 도톰한 패딩 점퍼 덕에 아이는 다친 곳 없이 말짱했다. 빗줄기는 제법 굵어졌고 우리 가족은 비를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아 그저 걷고 또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 너무 답답한데 그냥 모자 벗고 걸으면 안돼?"
"머리카락 젖으면 감기 걸릴 것 같은데..."
"하... 비 좀 그만 오지! 충분히 많이 맞았는데!"
"얼마나 다행이야~ 오늘이 엄청 추운 날이었다면 우린 벌써 꽁꽁 얼었을 거야!"
체감상 30분은 족히 비를 맞으며 걸었던 것 같다. 밭 사이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전혀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앗! 이제 비 그친 것 같은데? 엄마 모자 벗고 걸을게~
아이들은 쓰고 있던 모자부터 빠르게 벗었다.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는가 싶더니 그쳐가는 모양새였다. 모자를 벗어제낀 아이들은 부스터를 단 듯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비 와서 땅 미끄럽다~ 안 넘어지게 조심히 걸어!"
엄마인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아이들은 천천히 걷느라 답답했었는지 속도를 더 올릴 뿐이었다.
우와, 해 떴다! 그 많던 먹구름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도래낭길에 이르렀을 때쯤 갑자기 해가 떴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가 월령리 선인장 마을인가봐!
월령리 선인장 마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돌담 사이로 삐죽 솟아 있는 모든 게 선인장이었다. 아이들은 선인장을 물끄러미 쳐다 보는가 싶더니, 겁도 없이 뾰족한 가시를 만져댔다.
"앗, 따가워! 엄청 뾰족해!"
"선인장 가시 금방 박힌다고 저번에도 얘기해 줬는데~ 함부로 만지면 안돼!"
아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선인장에 자꾸만 손을 대고 싶어 했다. 사막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선인장들이 빼곡히 있으니 아이들 눈에는 신기할 만도 하지^^
월령리 마을을 따라 걷던 중 '진아영 할머니 삶터'라는 표지석과 함께 작고 아담한 집 한 채가 나왔다.
"진아영 할머니가 누구시지...?"
"어? 나 알아! 학교에서 배웠어! 진아영은 무명천 할머니 본명인데, 그 분이 항상 무명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서 그렇게 불리셨대!"
제주에서 1년간 학교를 다닌 2학년생 둘째가 '진아영 할머니'를 알고 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 둘째 아이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기 시작했다.
"와... 그런 것도 배웠구나! 그런데 왜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계셨던 거야?"
"제주 4.3 사건 때 경찰이 총으로 할머니 턱을 쏘는 바람에 할머니는 평생 음식도 못 드시고 말도 제대로 못 하셨대. 총 맞은 턱이 보기 흉할까봐 무명천으로 항상 가리셨던 거야!"
둘째 아이의 야무진 설명 덕분에 진아영 할머니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고통스러웠을 삶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추모하는 마음을 가진 뒤에야 그 곳을 떠날 수 있었다.
드디어 중간 스탬프 찍는 곳이다!
월령리 선인장 군락지 입구에서 중간 스탬프도 찍고 사진도 찍었다. 길고 긴 14코스의 절반이 숲길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바당길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여기가 유명한 선인장 군락지래! 너희가 좋아하는 선인장 실컷 보고 가자!"
저기 보이는 섬이 비양도 맞지?
언제 봐도 반가운 비양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 근처 식당에서 고기 국밥과 고기 국수를 먹은 뒤 다시 걷기 시작할 때도 비양도는 내내 보였다.
오, 지난 여름에 여기서 스노클링도 하고 너무 좋았는데!
내가 제주에서 꼬박 일 년을 살았다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겨울에 금능 바닷가를 걸으면서 여름에 이 곳에서 있었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니!
"날씨가 맑았으면 금능 바다 빛깔이 더 예뻐 보였을텐데, 조금 아쉽다!"
"엄마, 여기서 모래 놀이 조금만 하고 가면 안 될까?"
"그래! 모래 사장으로 내려가서 걷자~"
아이들은 잠시나마 금능 해변의 고운 모래도 만져 보고, 파도와 밀당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 큰일 났다! 만조 시 침수되면 우회하라고 써 있는데?
협재 해수욕장 근처 <쉼표> 카페 아래로 난 계단 입구에 '침수 시 우회'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계단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바닷물이 거의 다 들어와 있어 지나가기 어려워 보였다.
"얘들아, 지금 만조인가봐~ 바닷물로 길 막혔으니까 돌아가자!"
"엄마... 잊었어? 우회하는 순간 엄청 먼 길로 가야 될 지도 모른다는 거?"
그랬다. 우리는 이미 올레길을 걸으며 수차례 길이 침수되어 먼 길로 되돌아 가본 경험이 있었다. 아이들은 웬만큼 침수된 게 아니면 가던 길로 어떻게든 가고 싶어 했다.
"엄마, 잘 봐봐! 파도가 잠시 밀려나갈 때 와다다다- 뛰면 건널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내가 먼저 가볼게! 신발에 물 좀 들어가면 어때, 나는 그냥 이 길로 가고 싶어!"
"아... 엄마는 안전하게 돌아가고 싶은데..."
"지금이다!!!! 나 먼저 간다!!!!"
저돌적인 첫째 아이는 파도가 잠시 밀려나간 틈에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핫, 나 바지 조금 젖었어! 근데 재밌어! 동생아, 너도 빨리 와!"
길 건너편에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던 첫째. 언니의 길 건너기 장면을 목격한 둘째도 용기를 내서 뒤따라 뛰었다. 밀려 왔다가 다시 밀려 나가기 시작하는 파도의 타이밍에 맞춰!
문제는... 나였다. 나는 달리기를 엄청 못하는 데다가 아무리 낮은 높이여도 철썩대며 강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무서워서 자꾸만 망설여졌다.
"엄마! 우리가 파도 밀려갈 때 말해줄게! 그 때 뛰면 돼~"
"엄마, 할 수 있어! 준비... 하나, 둘, 셋, 지금이야!"
아이들 구령에 맞춰 얼떨결에 뛰기 시작했다. 파도가 다시 밀려와 내 신발을 적시기 전에 아이들이 서 있는 곳까지 뛰면 되는데, 그 길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와, 우리 엄마 물에 안 빠지고 건너기 성공!"
"잘했어, 엄마! 엄청 잘 뛰었어!"
딸들이 무사히 길을 건너온 나를 폭풍 칭찬해 주고 있었다. 엄마와 딸들의 대사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한테 잘 뛰었다고 칭찬해 주는 딸들이라니...^^;
"딸들아 고마워! 덕분에 길 우회하지 않고 건널 수 있었네! 휴..."
바다에 떠있는 비양도가 우리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와! 갈매기 진짜 많다!
도착 지점인 한림항에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부쩍 지치고 힘들었던 마지막 구간, 우리 가족에게 즐거움을 안겨준 건 다름 아닌 '갈매기'들이었다.
우연히 갈매기에게 뻥튀기 과자를 던져 주던 젊은 연인 한 쌍을 보게 되었고, 딸들은 지체없이 걸음을 멈추고 갈매기들을 기다리는 방청객이 되었다.
잠시 후, 그 동네에 있던 갈매기들이 맛집(?) 소식을 듣고 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서로 던져주는 과자를 먹겠다고 싸우던 갈매기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어느새 길 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발길을 멈추고 젊은 연인 한 쌍과 그 곁으로 몰려드는 갈매기떼 구경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계속해서 갈매기 이야기를 하며 화제를 돌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가족 모두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둘째 아이는 너무 힘들어 아무 말도 안 한지 오래였다.
"갈매기가 많아도 진짜 많다! 거의 도시에서 비둘기 보던 거랑 비슷한데?"
"근데 다리가 너무 아파... 앗! 저기 어묵 판다! 아빠, 어묵 사주면 안돼?"
"아빠, 나는 붕어빵도 먹고 싶어!"
"여보, 나도 어묵이랑 붕어빵..."
한림 매일 시장을 지날 때쯤 우리 가족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은 바로 어묵 꼬치와 붕어빵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멈추고 간식을 먹고 있자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되었다.
간식을 먹고 나서 불과 300m 정도를 더 걸으니 마침내 도착점인 '한림항 도선 대합실'이 보였다. 먼저 와서 스탬프를 찍고 계시던 모녀 올레꾼 중에 따님 분이 가족 사진도 찍어 주셔서 더 아름답게 마무리 된 오늘!
"엄마, 노래 중에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그 노래 있잖아!"
"응! 그 노래 알지~"
"오늘은 그 노래를 이렇게 바꿔 부르고 싶어!"
"어떻게?"
돌 틈 사이에 피어난 선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