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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 올레!

7-1코스, 한라산에 이별을 고하러 가는 길

by 체리뽀


정말 이 날이 올까 싶었다.


작년 봄, 제주 올레길을 처음 걷기 시작할 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제주 일년 살이를 하는 동안 27번째 올레길까지 걷는 날이 과연 올까? 그것도 초등학교 4학년, 2학년인 딸들과 함께?


우리는 날씨가 괜찮은 주말마다 한 코스씩 걸어 나갔다. 제주라는 섬의 특성상 비와 바람을 피하기가 쉽지 않아서 나중에는 날씨와 상관 없이도 걸어야 했다.


제주 올레길을 다 걷게 되리라고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못했다. 그래서 오늘 걷게 될 7-1코스가 우리의 마지막 올레길이라는 게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총 437km, 27코스의 올레길 중 마지막 한 코스만 남다니!


엄마, 오늘 7-1코스만 다 걸으면 우리 제주 올레길 완주하는 거야!


7-1코스가 시작되는 서귀포 버스터미널 앞에서 첫째 아이는 한껏 들뜬 얼굴로 종알거렸다. 올레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꾸욱 찍고 씩씩하게 걷기 시작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헤헤, 올레 패스포트에 도장을 다 찍게 되네! 우리 진짜 대단하지 않아, 엄마?"

둘째 아이가 올레 패스포트의 모든 페이지에 찍힌 스탬프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기쁨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 우리 딸들! 진짜 대단해~ 엄마는 우리가 올레길 완주를 앞두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아!"


첫 올레길을 걸을 때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딸들과의 제주 올레길 완주'가 마침내 오늘 이뤄질 예정이었다.


오늘은 눈이 가득 쌓인 7-1코스를 걷습니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섰지만 양 볼과 두 손이 금세 빨개질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웬만하면 따뜻할 때 걷고 싶었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눈이 그치고 기온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우리 가족이 제주에서 다시 육지로 이사 가기까지 단 6일을 앞둔 날이었다.


"이러다가 올레길 완주를 코앞에 남겨두고 육지로 이사 가게 생겼어! 내일은 날씨랑 상관없이 무조건 마지막 올레길 걸으러 가자!"


남편의 결단 덕분에 우리 가족은 마지막 올레길 여정에 나설 수 있었다. 길 위에 가득 쌓인 눈도 매서운 칼바람도 결코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쌓인 눈이 반은 녹고 반은 얼어 있던 길




서귀포 신시가지를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 곳곳에 빙판이 가득했다. 참고로 나는 빙판길을 걷다 미끄러져 발가락이 부러진 이후로 빙판길을 정말 무서워 한다.


남편과 첫째는 빠른 걸음으로 먼저 가버린 상황, 둘째 아이만 내 곁에 남아 함께 걸어주고 있었다.


"엄마, 내가 엄마 걷는 속도 맞춰서 같이 걸어 줄게!"


"고마워..ㅠㅠ 혹시 엄마가 또 빙판길에서 넘어지면 아빠한테 바로 전화 좀 해줘~"


"무서우면 내 손 잡을래, 엄마?"


"아니야... 엄마가 넘어지면서 너까지 넘어트리면 안 되니까! 딸냄, 엄마랑 같이 걸어줘서 고마워~"


그렇게 우리 모녀는 서로를 살피며 여러 빙판길을 건넜다. 눈이 가득 쌓인 산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도 나를 호위해 주는 둘째가 있어 마음까지 든든했다.


둘째와 함께 걸은 낭만 가득 눈길^^


하얀 눈이랑 주황 귤이 같이 있는 게 말이 되나?


제주의 겨울 풍경은 육지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하얀 눈이 쌓인 한라산을 배경으로 주황빛 귤이 싱그럽게 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일년 전에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겨울에 귤이 달려 있어 정말 신기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아... 이제 우리 육지로 이사 가면 귤 나무도 못 보겠다! 엄마, 기념으로 귤 나무랑 사진 찍어줘~"


올레길을 걸으며 수많은 귤 나무를 만났다. 잎이 돋아나는가 싶더니 하얀 꽃을 피우고, 작은 몽우리가 맺히는가 싶더니 초록의 열매로 커지다가, 마침내 주황빛 귤이 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6일 뒤 다시 돌아간 육지에서는 절대로 보지 못할 제주만의 겨울 풍경. 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귤 나무가 보일 때마다 포즈를 취하길래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하얀 눈, 주황 귤, 귀여운 둘째^^
한라산을 바라보며 계속 걷습니다.


어디쯤이야? 엉또폭포 입구가 전부 빙판길로 변해서 엄청 미끄러워~


엉또 폭포 입구로 향하는 길목에서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엉또 폭포로 가는 길이 전부 빙판길인 걸 보고 빙판길 트라우마가 있는 내 걱정이 돼서 전화를 준 것이었다.


"어차피 엉또 폭포만 보고 다시 내려가야 되니까 굳이 안 올라와도 될 것 같아~"


"진짜? 그 정도로 빙판길이 심하다고? 아무튼 근처까지는 가볼게!"


엉또 폭포로 향하는 길
미끄러운 눈길 혹은 빙판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엉또 폭포로 가는 길은 해가 들지 않아 쌓인 눈이 꽁꽁 얼어 있었다. 조심스레 몇 걸음 디뎌본 순간 느낌이 왔다. 이 길을 무리해서 가다간 발가락 골절 그 이상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다는!


"아하하... 엄마는 저번처럼 또 넘어져서 발가락 부러질까봐 못 가겠어...ㅠㅠ 올레길 완주해야 되는데 넘어져서 다치면 안되잖아... 엄마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언니랑 아빠 따라 갈래?"


둘째는 빙판길 위에서 넘어질까봐 덜덜 떨며 서 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결연하게 말했다.


"아니! 나혼자 가는 것도 위험하고, 엄마만 두고 가기도 좀 그래! 그냥 여기서 언니랑 아빠 내려올 때까지 엄마 옆에 있을래~"


의리 있는 나의 둘째는 끝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어 주었다. 결국 엉또 폭포는 남편과 첫째 아이만 대표로 다녀오게 되었다.

엉또 폭포는 비가 엄청 와야만 물줄기가 흐른다.


엄마, 엉또 폭포 보러 갔는데 물이 없더라...


남편과 첫째가 엉또 폭포 물줄기를 보지 못했다며 아쉬운 얼굴로 내려오고 있었다.


"대단하다 우리 딸! 엄마는 빙판길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했는데~"


"안 올라오길 잘했어! 엄마는 미끄러워서 분명히 또 넘어졌을 거야~"


참고로 나는 선천성 희귀 유전 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병을 앓고 있다. 말초 신경 세포가 손상되어 발가락 쪽이 특히 약해 잘 넘어지고 잘 골절된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된 상황!


첫째 아이가 내 병을 유전 받았을 확률이 높은데, 미끄러운 빙판길을 잘 올라갔다 온 걸 보니 너무 대견하고 기특했다.


출발할 때부터 따로 걷던 두 아이는 오랜만에 다시 만나자 맨 손으로 눈사람을 만들며 놀기 시작했다. 본인들을 꼭 닮은 꼬마 눈사람을 만들고서 뿌듯해 하던 아이들^^


"엄마... 근데 손이 너무 시려워... 꽁꽁 얼어버릴 것 같아!"


아이들은 빨개진 두 손을 녹이며 다시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눈을 뭉치던 아이들! 손 안 시렵니...ㅠㅠ
귀여운 꼬마 눈 사람 자매^^
엉또 다리를 건너며 멋쟁이 돌하르방과 찰칵^^


우리 너무 준비없이 출발했나? 산길도 온통 눈으로 덮여 있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서귀포 해안가에 살고 있다. 우리 집 주변은 눈이 쌓여도 금세 다 녹기 때문에 같은 서귀포 안의 7-1코스 올레길도 형편이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서귀포에서도 해안가와 산간 쪽은 천지 차이라는 걸, 쌓인 눈의 양과 눈 녹는 속도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어쩌다 마주친 올레꾼들이 죄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있는 걸 보고 그제야 '아차' 싶었다. 고근산으로 향하는 눈 쌓인 숲길에서 아이젠은 필수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아... 아침에 혹시 모르니까 아이젠 챙길까 생각은 했는데... 한라산 오르는 것도 아니고, 올레길 걷는 건데 너무 오바하는 것 같아서 두고 온 게 좀 아쉽다..."


남편이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이젠도 없으니 최대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눈길을 걷는 수밖에!


넘어질까 조심스레 걷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눈길을 걷는 느낌이 너무 좋다며 깡총댈 뿐이었다. 흡사 산 속에 풀어둔 두 마리의 토끼들 같았달까^^;


애매하게 눈이 녹아 더 질척이던 길
아이들은 재미있다며 잘도 걷습니다.
엄마, 우리 아직 5km밖에 못 왔대! 알려주는 중^^
하얀 눈과 잘 어울리는 올레 표식 :)
아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갑니다.
종종 걸음으로 조심히 걷고 있는 나^^;


여기가 고근산인가 봐! 이제 이 산만 넘으면 힘든 거 끝난다~


하얀 눈밭 위로 7-1코스의 하이라이트인 '고근산'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올레 표식이 보였다. 아름다운 설경을 품은 고근산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고근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중간중간 멈춰서 눈을 뭉치며 놀아요^^
좁은 길에선 한줄 기차로 칙칙폭폭^^


아이젠도 없이 어떻게 올라가니 너희들? 미끄러우니까 계단 조심해!


고근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분들마다 신발에 아이젠을 착용하고 계셨는데도 옆에 난간이 없다 보니 미끄러질까봐 거의 앉아서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어머, 너희들 아이젠도 없이 어떻게 올라가려고 그래? 계단이 얼어서 정말 미끄러워~"


고근산에서 내려오시는 분들마다 아이들을 보며 걱정스런 얼굴로 당부를 건네셨다. 나 역시도 아이들이 계단을 오르다 낭떠러지 옆으로 떨어질까봐 노심초사였다.


"얘들아, 계단 안쪽으로 붙어서 가! 미끄러우니까 절대로 뛰면 안돼!"


아이들에게 신신당부를 하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애들은 너보다 잘 걸으니까 네 걱정만 해! 넘어지지 않게 아래만 잘 보고 올라가!"


쭈굴... 사실이 그랬다. 나만 잘 걸으면 된다! 아이들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내 둔한 발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한 계단 한 계단 조심히 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나무 계단을 한 명씩 오르기 시작합니다.
눈이 얼어 있어 정말 미끄러웠던 계단!
미끄러운 것도 문제인데 가도 가도 끝이 없어 화가 나던 길(!)


야호~ 고근산 정상이다! 엄마 너무 더운데 옷 좀 벗을게~


수많은 계단 끝에 고근산 정상이 있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걷느라 온몸이 땀으로 젖어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정상에 오르자마자 훌렁훌렁 외투를 벗어 던졌다.


"이렇게 눈 내린 한 겨울에 덥다는 말이 다 나오네!"


"계단이 너무 많았어ㅠㅠ 앉아서 쉬고 싶은데 눈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앞으로는 산방산이랑 바다도 보이고~ 뒤로는 한라산도 보이고! 경치 좋은데?"


"아싸! 이제 고근산 내려가는 일만 남았으니까 힘든 거 끝이겠다~"


고근산 정상에서 서귀포 바다도 내려다 보고 눈 덮인 한라산도 바라보며 여유를 한껏 즐겼다. 땀이 식으니 금세 추위가 느껴져 외투도 다시 입었다.


고근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귀포 앞바다


"제주 사는 내내 봤던 한라산인데, 오늘따라 더 멋있어 보이는 건 왜지? 곧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런가?"


남편이 눈 덮인 한라산을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요 며칠 동안 한라산은 눈구름에 뒤덮여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한라산은 새하얀 눈으로 덮여 더욱 선명하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주에 사는 일년 동안 계절과 날씨에 따라 매일매일 다른 얼굴의 한라산을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올레길을 걸은 덕분에 한라산을 모든 방향에서 다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눈만 돌리면 어디서든 한라산을 찾아볼 수 있는 날도 일주일이 채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오늘의 올레길 걷기는 사실 한라산에게 작별 인사를 할 목적도 있었다.


"한라산아 안녕! 일년 내내 우리를 지켜봐 줘서 고마웠어!"


"우리가 육지로 돌아가고 없어도 웅장한 지금 모습 그대로 잘 있어줘~"


고근산 정상에서 한라산과 찐하게 작별하고, 마지막 중간 스탬프도 찍은 뒤에야 하산을 시작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새하얀 한라산
고근산 정상에서 중간 스탬프도 잊지 않고 찍습니다^^
올레 7-1코스 후반부를 향해 하산합니다!


후덜덜...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 난이도가 더 높은데?


아이들은 올레길에서 오름을 만날 때마다 한결 같은 패턴을 선보였다. 오르막길에선 거의 네 발로 헉헉-대며 느리게 오르다가도 내리막길은 총알 같이 뛰어 내려 가고는 했던 것!


그러나 이 날, 고근산을 하산하면서는 절대로 뛸 수가 없어진 아이들이었다. 꽝꽝 얼어버린 나무 계단에서는 옆에 있는 난간을 생명줄 마냥 꼭 잡고 옆으로 발을 디뎌야만 겨우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흑흑 넘어질까봐 부들부들 떨며 한 걸음씩 걸었습니다.
옆에 난간을 잡지 않으면 도저히 내려갈 수 없었던 계단
그래도 아이들은 익숙해져서 점점 속도를 붙여 내려 가는 중!
조심조심, 한 걸음씩 옆으로 내딛으며 끝없이 내려가는 중
만세! 드디어 힘든 계단길 탈출!




고근산을 내려오자마자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눈'이라는 복병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예상보다 훨씬 늦은 시각에 점심을 먹게 되었다.


"오름은 내려갈 때 달려가는 재미가 있는 건데, 고근산에선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어~"


"그래도 사방에 눈이 많아서 계속 눈 만지고 노니까 다른 때보다 훨씬 재밌어!"


내심 힘든 눈길을 아이젠도 없이 걷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27번째 마지막 올레길을 눈 덕분에 더 특별하게 기억할 수 있다며 좋아했다.


든든히 점심을 먹고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이제 서귀포 시내 쪽으로 쭉쭉 걷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살얼음 낀 골목길이 문제였다.


"엄마, 여기 내리막길 좀 무서운데 나 손 잡아줘~"


첫째가 나에게 S.O.S.를 요청했다. 남편은 둘째 손을 잡고 이미 내리막길을 다 내려간 상태였다. 첫째의 손을 덥썩 잡으려다 말고, 둘 다 위험해질 거란 생각이 들어 대답했다.


"너보다 엄마가 빙판길에서 더 잘 넘어지잖아... 엄마 손 잡았다가 너도 같이 넘어지면 어떡해..."


곤란한 표정을 짓는 엄마를 보더니 아이는 할 수 없다는 듯 혼자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내 한 몸 균형을 잡고 걷는 게 어려워 옆에 사람이 있으면 내 무게를 다 실어 지탱하는 버릇이 있기에, 아이까지 위험에 빠트릴 여지가 충분한 사람이었다.

둘째 아이 손을 잡고 먼저 가버린 남편...ㅠㅠ


알았어... 나 혼자 내려가지 뭐... 어, 어, 어... 엄마!!!


순식간에 아이가 꽈당, 넘어졌다. 차가운 얼음 바닥 위로 엉덩이를 부딪치며 넘어진 아이는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엄마 잡고 일어서 봐! 어디가 제일 아파? 엉덩이?"


물기가 잔뜩 묻은 아이 옷을 털어주며 묻자, 아이는 두 손을 내밀었다. 넘어지며 짚었던 손바닥 전체가 울퉁불퉁하게 얼어있던 얼음에 쓸려 온통 빨개져 있었다.


"손바닥이 칼에 베인 것처럼 너무 따갑고 아파...ㅠㅠ"


아이의 빨개진 손바닥을 어루만지고 있노라니 저만치 아래에 있던 남편이 첫째 울음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왔다.


우리 집에서 가장 어린 둘째만 단도리해도 버거울 텐데, 혼자서 잘 못 걷는 와이프와 엄마를 똑닮아 걸음이 어설픈 첫째 아이까지 케어해야 하는 남편을 보니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흐엥... 나도 아빠 손 잡고 가고 싶었는데! 엄마는 넘어질까봐 손도 안 잡아준단 말이야..."

첫째 아이의 울부짖음 속에는 엄마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나도 아이의 손을 꽉 잡으며 '엄마만 믿어! 넘어질 것 같으면 엄마가 꽉 붙들어 줄게~'라고 말하는 엄마이고 싶은데...


"엄마가 미안해... 손도 못 잡아주고..."


사실 나야말로 남편 손에 의지해서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꼭꼭 숨긴 채로 바들바들 떨며 혼자서 빙판 내리막길을 겨우 내려가야 했다.


먼저 도착해서 뒤를 돌아보니 아빠 손에 거의 매달리시피 내려오고 있는 첫째가 보였다. 짠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빙판길을 아빠에게 매달려 내려오는 중인 첫째...


나처럼 잘 못 걷는 사람이 올레길을 기어코 다 걸었구나...


내가 최근에 알게 된 나의 병 '샤르코-마리-투스'는 발과 손 근육들의 힘이 약해지며, 발과 손 모양에 변형이 오고 균형 감각이 저하되는 말초신경 유전병이다.


내가 이 병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는 증상들을 꼽자면,


1. 보행 장애로 인해 잘 넘어진다.

2. 반복적으로 발목을 잘 삐끗한다.

3. 반사 신경이 없다.

4. 균형을 못 잡는다.

5. 망치 발가락으로 인해 넘어지면 발가락이 쉽게 부러진다.

6. 달리기를 정말정말 못한다.


이런 신체적 결함을 가진 내가 올레길 완주를 눈앞에 두고 있다니,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걸어온 내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그리고 그 수많은 길 위에서 아이들 손도 꽉 잡아주지 못할 만큼 약했던 엄마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올레길을 끝까지 함께 걸은 자랑스런 엄마로 기억되기를 감히 바라본다.


걸어온 길 11km, 남은 길 4.7km


나 여기 어딘지 알아!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왔던 하논 습지야!


하논 분화구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체험 학습으로 와본 곳이라며 반가워 했다. 만약 아이들이 제주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은 채로 올레길을 걸었으면 이 정도로 좋아했을까?


올레길을 걷는 내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아이들에게 올레길은 생생한 체험 학습의 장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은 제주의 학교에서 배운 제주의 문화와 자연과 역사를 더 깊이 보고 듣고 느끼며 뿌듯해 했다.


"엄마, 하논 습지는 현무암으로 된 제주에서 유일하게 논 농사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배웠어!"


"그래서 옛날 제주 사람들은 쌀밥을 잘 못 먹었대~ 우리 선생님이 말해 주셨어!"


아이들은 올레길 위에서 나도 잘 몰랐던 제주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다. 제주에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몰랐을 이야기들을 이제는 아이들도 나도 많이 알게 되었다.


하논 분화구에서 바라본 한라산, 안녕!
논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물기 가득한 곳이라, 땅이 정말 질척였어요^^;


꽃길만 걷자꾸나, 얘들아!


길은 드디어 낯익은 서귀포 중심지로 향하고 있었다. 천지동 벽화 골목길에 다다르자 '꽃길만 걸어요'라는 예쁜 문구가 보였다.


"벽에 쓰여있는 이 말, 우리한테 하는 말 같아! 올레 완주길만 걸어요~"


"히히~ 좀 있으면 7-1코스 도착점이지? 빨리 완주 인증서 받고 싶다!"


"얘들아~ 엄마는 너희랑 걷는 모든 올레길이 꽃길이었어!"


정말이었다. 아이들과 걸었던 437km에 이르는 길고 긴 그 길은 그야말로 '꽃길'이었다. 사계절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어 예쁘기도 했지만, 꽃보다 더 어여쁜 내 아이들과 함께 걸어 참 좋은 길이었다.


꽃길만 걸어요,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아 :)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준 올레 표식도 안녕...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이윽고, 마침내, 다다른 제주올레 여행자 센터 :)


나 오늘, 완주했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초등학생 아이들과 올레길을 완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현실로 이뤄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마지막 스탬프를 찍으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7-1코스를 상징하는 감귤 모양 도착 스탬프를 찍는 그 순간, 우리의 길고 긴 올레길 여정도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나 오늘 완주했다! 437km, 27코스의 올레길 전부를!
장장 1년만에 모든 올레 스탬프 찍기 완료^^


저희 가족 모두 올레 완주증 발급 받으려구요!


지친 몸을 이끌고 제주 올레 여행자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냐는 스텝분 말씀에 아이들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희 올레길 완주했어요! 완주증 발급 받으려구요~"


"어, 정말? 축하해 얘들아! 대단하구나~ 어머님 아버님이 아이들 것까지 설문 좀 해주시겠어요?"


스텝분 안내에 따라 휴대폰으로 설문을 작성했다. 남편은 둘째 아이 것까지, 나는 첫째 아이 것까지 설문을 하자 비로소 완주증 발급 신청이 완료되었다.


완주를 축하햄수다, 폭삭 속았수다! 우리 가족^^


완주 증서 여기 있습니다! 포토존에서 인증 사진 찍어 드릴게요~


우리 가족은 한 사람씩 차례대로 포토 타임을 가졌다. 감사하게도 스텝분이 사진을 찍어 주셨는데, 찍힌 사진은 올레 공식 홈페이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첫째 아이는 완주 인증서를 받아 들더니 완주자만 울릴 수 있는 종을 힘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올레 여행자 센터 로비 가득 '땡- 땡- 땡-'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여기저기서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종을 울리고 있는 첫째 아이에게 쏠렸는데, 완주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어린 초등학생 여자애라는 걸 확인한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어? 애가 그냥 신기해서 종 쳤나봐~ 난 또! 저 애가 진짜 올레 완주한 줄 알았어!"


그 소리를 들은 첫째 아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 올레 완주했어요! 오늘 다 걸었어요~"


"아, 정말? 진짜로 올레 완주를 한 거였구나! 축하한다, 얘야!"


다시 한 번 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초등학생 아이가 올레길을 완주하는 일이 잘 없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언니가 모든 분들에게 축하 받는 걸 목격한 둘째도 다음 차례에 힘차게 종을 치기 시작했다. 그 곳에선 올레 완주 종소리가 들리면 모두 함께 축하해 주는 게 예의인 듯 했다.


"어머, 너도 올레길 다 완주한 거야?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감사합니다~"


둘째는 수줍어 하면서도 어른들의 축하를 받는 걸 즐기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올레길을 완주하고 이 종을 칠 수 있게 되는 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우리 딸들 고생 많았고 정말정말 축하해! 끝까지 잘 걸어줘서 고마워~"


올레길 완주 종을 힘차게 울리고 있는 둘째 모습 :)
그토록 받고 싶었던 제주 올레 완주증과 뱃지^^
완주 축하 식사권도 받았어요^^


우리 올레길 완주 기념으로 축하 파티라도 하고 갈까?


남편은 썩 내켜하지 않았으나 나는 오늘 같은 날을 기념하려면 파티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했고, 서귀포 시내에 있는 조각 케이크 집에 들러 달콤한 디저트를 즐겼다.


"내가 완주 종을 울렸을 때 왜 거기 있는 어른들 모두가 장난이라고 생각하신 걸까?"


"어린 애가 올레길을 완주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신 거지!"


"하긴 437km를 걸은 거면 서울에서 해남 땅끝까지 걸은 셈인데... 어마어마한 거리니까!"


"다시 생각해도 내가 올레길을 다 걸었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신기해!"


달콤한 케이크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진 올레길 완주의 맛! 아이들과 함께 누릴 수 있어서 더 진하고 깊은 감동의 맛이었다.


달콤한 올레길 완주의 맛♡


제주에 살았던 일년 동안 가장 잘한 일을 꼽자면, 아이들과 올레길 완주에 도전했고 결국 해낸 일이 아닐까.


벌써 제주에서 육지로 다시 이사온 지도 두 달이 흘렀다. 나는 복직을 했고, 아이들은 원래 다니던 도시 학교의 5학년과 3학년 학생이 되었다.


5학년이 된 첫째는 얼마 전 학교에서 성장 앨범을 만들었다며 가지고 왔다. 첫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게 올레 리본, 4학년 때 자신의 삶 속에도 간세를 그려 넣었을 만큼 아이는 올레길을 찐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첫째 아이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제주도와 올레길


3학년이 된 둘째는 얼마 전 적성 검사를 했다며 결과지를 가져 왔는데, 가장 1순위 능력이 '자연친화' 능력이란다. 식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많고 자연과의 친화 능력이 특히 높은 편이라고...^^


아무래도 제주에서 일 년을 살았던 경험,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올레길을 꾸준히 걸은 결과인 것 같아서 신기하고 놀라웠다.


자연친화 능력이 가장 높은 둘째


제주에 살기 전에는 가까운 거리도 걷는 걸 힘들어 하던 아이들이었는데, 요즘은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고 나서도 뭔가 아쉬운 듯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우리 얼마나 걸었어? 겨우 한 시간? 올레길 또 걷고 싶다..."


"올레길도 다 걸었는데, 이 정도 걷는 건 일도 아니지!"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변화시켜준 올레길, 그리고 내 신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올레길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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