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코스, 제주 도심을 가로지르는 길 (25th)
설 연휴에 갈 데도 없는데 올레길이나 걸으러 갈까?
꿈만 같던 제주 일년살이도 다음 달이면 끝이 난다. 초등학생인 두 딸과 올레길을 다 걸을 수 있을지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이제 딱 세 코스만 더 걸으면 올레길 완주 인증서를 받게 된다.
제주에서 살게 된 올해만 양가 부모님들 배려로 명절 방문을 생략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이번 설 연휴도 제주에서 우리끼리만 지내게 되었다.
"내일부터 설 연휴 시작인데 우리 뭐해?"
"설 연휴 내내 춥고 눈도 올 거래! 그래서 말인데, 내일만 날씨가 괜찮다고 하니 올레길 걸으러 갈까?"
"좋아! 이제 3개밖에 안 남았는데 다 못 걷고 이사 가면 어떡해~ 빨리 걸어야지!"
현재 남은 코스는 14코스, 18코스, 7-1코스 이렇게 3개이다. 7-1코스는 가장 마지막에 걷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완주 인증서를 발급해 주는 올레 여행자 센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4코스와 18코스 중에 어디로 갈 것인가... 14코스는 20km, 18코스는 18.7km를 걸어야 한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짧은 길로 가야지!
그리하여 스물 다섯 번째로 걸을 올레길은 18코스로 정해졌다.
사라봉은 서우봉만큼이나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제주시 도심 한가운데 있는 오름이라 그런지 사라봉에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올레길을 걸으며 만난 여러 오름 중에 서우봉만큼이나 인기가 있는 느낌이었다.
"제주시에서 제일 유명한 오름이라더니, 산책 나오신 동네 분들이 많이 보인다!"
"엄마 근데... 사람이 많은 것보다 계단이 많은 게 더 문제인 것 같아!"
"이건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옥의 계단이야! ㅠㅠ"
그랬다. 사라봉은 다른 오름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아 보였는데 오르기가 꽤나 벅찼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돌 계단 때문에(?) 의외로 난이도가 높은 듯 했다.
18코스는 사라봉만 오르면 힘든 거 다 끝났어~
사라봉만 올랐을 뿐인데 아이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 같았다. 18코스는 아직 초반에 불과했기에 아이들이 벌써부터 지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성급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야 말았다.
"18코스는 사라봉만 정상까지 오르는 것 같아! 바로 옆에 별도봉이란 오름도 하나 더 있는데 산책길 걸으라고 되어 있으니까 오르막 길은 없지 않을까? 이제 힘든 거 다 끝났으니까 화이팅!"
하지만 별도봉도 제법 경사진 오름이었다. 사라봉처럼 아주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히 걷는 길도 아니었다. 오르막 능선을 오르며 아이들은 연신 엄마인 나를 째려 봤다.
"하... 별도봉은 산책길만 걷는다면서? 근데 왜 정상을 향해 가는 거야...ㅠㅠ"
"엄마가 그렇게 말만 안 했어도 그냥 올랐을 텐데! 기대했다가 실망하니까 더 힘들어!"
올레길 안내에 사라봉은 '정상'이란 말이 덧붙여져 있고 별도봉은 '산책길'이라고만 쓰여 있길래 둘레길 정도만 걸을 거라 판단한 내 잘못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역시 가보지 않은 길은 함부로 아는 척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까 갈림길 하나 나오던데, 애들이 그리로 잘못 간 건 아니겠지?
별도봉을 내려가는 길은 통나무로 된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워낙 잘 넘어지는 나로서는 높이 튀어나온 통나무에 발이라도 걸려 계단을 구르게 될까봐 아주 조심하며 천천히 하산했다.
그런데 별도봉을 벗어난 뒤 시야가 확 트인 길로 갔는데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별도봉 중턱에서 갈림길이 나왔던 터라 아이들이 엉뚱한 길로 갔을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우리 애들, 아까 그 갈림길에서 올레 표식을 놓쳤나? 숲속에서 길 잃고 헤매는 거면 어떡하지?"
"에이, 그럴리가... 그런데 이쯤에선 애들이 보여야 되는데 이상하게 안 보이네..."
"휴대폰 가지고 있는 첫째한테 전화해 보자! 근데 걔 휴대폰 가방에 넣어두고 무음으로 잘 해두는데..."
남편도 나처럼 조마조마했는지 첫째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걱정과는 달리 금방 전화를 받은 첫째!
"지금 어디쯤 가고 있어? 별도봉에서는 다 내려간 거지?"
남편이 전화로 첫째 아이에게 위치를 물어볼 때쯤, 조금 전까지는 나무에 가려서 전혀 안 보이던 아이들 머리 두 개가 논둑길 위로 둥둥 떠가는 게 보였다.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이긴 했지만 두 아이 모두 크게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휴, 다행이다... 아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전진하는 중이었다.
"와... 우리 딸, 진짜 다 컸다!"
남편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혀를 내두르며 첫째 아이에게 감탄하는 중이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첫째는 동생과 빠르게 하산한 뒤에 따라오는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자 바로 가방 속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냈다고 한다.
목에 휴대폰을 걸고 무음으로 해둔 소리도 일부러 켜둔 채, 엄마 아빠가 혹시 전화 오면 바로 받으려고 준비했다는 첫째! 올레길을 걸으며 아이의 순간적인 기지와 판단력이 높아진 게 단번에 느껴졌다.
"그러게, 우리 딸 진짜 많이 컸네... 엄마 아빠가 전화올 것도 예상하고! 심지어 올레길도 잘 찾고!"
"게다가 둘 다 엄청 빨라... 이러다간 애들 또 놓치겠어! 안되겠다, 우리도 부지런히 걸어서 따라 잡자!"
나는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하는데 불안해서라도 아이들을 뒤쫓아 가야 했다. 남편 손에 붙들려 속도를 올려 걷기 시작한 나, 뱁새가 황새 따라 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너희 진짜 빠르다... 안 힘들었어? 우리 딸들 정말 대단해!
화북 포구 근처에서 아이들을 겨우 따라 잡을 수 있었고, 나는 다시 만난 아이들에게 엄지 척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둘이서만 올레 표식을 보며 길을 찾아가는 게 정말 기특했기 때문이다.
"우리 잘 걷지?"
"응! 진짜 잘 걸어~ 엄마는 너희들 속도 따라 가려다가 숨차 죽는 줄 알았어!"
"계속 우리끼리 가려다가 엄마 아빠 힘든 것 같길래 여기서 기다려 준 거야~"
"그래, 기다려줘서 고마워!"
열심히 잘 걸은 아이들을 위해 달콤한 음료를 사주기로 했다. 근처 카페에 들러 레몬차와 핫초코를 각각 받아든 아이들은 당 충전을 해야 되니 그제서야 템포를 늦춰 걷기 시작했다.
여기 모래 색깔 되게 까맣다!
검은 모래로 유명한 삼양 해변에 도착하게 되었다. 일전에 5코스를 걸을 때도 쇠소깍 해변에서 검은 모래를 봤는데, 제주시에서도 볼 수 있어 신기했다.
아이들은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던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래 사장으로 뛰어 내려 갔다. 고운 색으로 반짝이는 검은 모래를 만지며 아이들은 굉장히 좋아했다.
"엄마, 이것 봐! 모래 색깔 진짜 예쁘지 않아?"
"엄마도 모래 한 번 만져봐! 너무 부드러워~"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직접 만져본 검은 모래는 예상한 것보다 더 부드럽고 고왔다. 아이들은 아예 모래 사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한참 동안 모래 놀이를 했고, 나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힐링할 수 있었다.
모래 놀이에 흠뻑 빠진 아이들을 피자로 간신히 꼬셔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배불리 피자를 먹고 나서 다시 삼양 해수욕장 정자로 돌아와 중간 스탬프를 찍었다.
삼화 포구에는 무지갯빛 돌마다 귀여운 문구들이 쓰여 있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문구는 "행복이란 당신과 함께 노래하는 것, 당신과 검은 모래 위를 함께 걷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올레길을 걷는 내내 수많은 노래를 함께 불렀다. 최근 어느 날은 남편이 분리수거를 하러 가면서 무슨 노래를 흥얼거리길래 가만히 들어 보니 IVE의 신곡이었다.
"여보, 지금 IVE 노래 부르는 거야? 요즘 노래라곤 전혀 몰랐잖아!"
"아... 나도 모르게 부르고 있었네? 올레길에서 애들이 하도 부르니까..."
그러니까, 아이들과 길을 걸으면 아이들이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나에게 행복이란,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걷는 것이었다.
오후 들어서 뭉게 구름이 겹겹이 쌓이더니 먹구름으로 바뀌었다. 늦은 저녁부터나 비가 온다고 해서 마음을 놨는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날씨가 변해가고 있었다.
"비 예보가 점점 앞으로 땡겨지는 것 같네... 비 오기 전에 다 걸으면 좋겠는데..."
"중간에 비 오면 비 맞고 걸으면 되지!"
"맞아! 올레길에서 비 만나는 거 한두 번인가~ 그냥 맞으면 돼, 엄마!"
잔뜩 흐려진 하늘을 보며 비 걱정을 하는 건 엄마인 나뿐이었다. 제주로 이사 오기 전만 해도 우산 없이 비 맞으면 큰일나는 줄로만 알았던 도시의 어린이들은 다 어디 간 걸까!
아이들은 올레길을 걸으며 크고 작은 비를 많이 만났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당황하지 않고 비를 맞았다. 우비가 있어도 웬만하면 입지 않고 그냥 맞기를 택했다.
경험의 힘은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제주의 비는 우산을 써도 사방으로 들이쳐서 결국 온몸을 젖게 한다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맞을 비라면 그냥 시원하게 맞자는 게 아이들 지론이 되었다.
비는 조금 있으면 그친다.
비를 맞는다고 큰일나지 않는다.
비를 맞으면 은근히 기분이 좋다.
아이들은 올레길을 걸으면서부터 '비'를 반드시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닌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마 제주의 올레길을 이만큼이나 걸어보지 않았더라면, 나의 아이들은 우산 없이 비를 만날 때마다 발만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 몰라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육지의 도시에서 살게 될 아이들은 사뭇 다른 시선으로 비를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산이 없어도 괜찮은, 내리는 빗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가득한 아이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비가 와도 괜찮아! 바람이 불어도 괜찮아! 우리는 올레길 위에서 수없이 걸어봤기에 그 어떤 힘든 길도 헤쳐나갈 수 있어!
아! 저기 있다! 진짜 닭 머리처럼 생긴 바위야!
바람 부는 바당길을 쭉 따라가니 닭모루, 혹은 닭머르라 불리는 바위가 보였다. 아이들은 진짜 닭 머리랑 닮은 바위라며 한참을 쳐다 보았다.
이제 남은 길은 신촌을 지나, 죽도를 지나, 조천으로 이어졌다. 거의 19km 가까이 걸어야 하는 만큼 마지막엔 체력이 소진돼서 묵묵히 도착 지점까지 걸을 뿐이었다.
어머, 너희 저번에 19코스 출발할 때 봤던 애들이네? 오늘은 18코스 완주한 거야?
18코스 도착 지점인 '조천 만세 동산'에 도착했더니 올레 안내소에 계시던 직원분이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세 달 전에 19코스를 출발할 때 뵀던 분과 같은 분이셨다.
아이들과 올레길을 걸으면서 가장 좋은 점 중에 하나가 올레 안내소 직원 분께서 아이들 얼굴을 잘 기억해 주신다는 거다.
15코스와 16코스를 걸으며 두 번 방문했던 고내포구에서도 안내소 직원 분께서 아이들을 알아봐 주셨는데, 이번에도 우리를 알아봐 주시는 분을 뵙게 된 것!
아이들은 지친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환대에 응답했다.
"저희 이제 두 코스만 더 걸으면 올레길 완주해요!"
"이제 14코스랑 7-1코스만 걸으면 끝이예요!"
"와,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올레길 완주하는 어린이는 거의 못 본 것 같아!"
아이들 얼굴 가득 자부심과 성취감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 낯설지만 다정한 어른들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여태 포기하지 않고 올레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저희 꼭 올레길 완주할게요!
아이들은 지금까지 스물 다섯 번의 작고도 강렬한 성공을 경험했다. 앞으로 두 번의 작은 성공만 더 하면 총 스물 일곱 번의 성공을 하게 된다.
스물 일곱 번의 작은 성공들은 결국, 올레길 완주라는 거대한 성과로 이어질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일년 동안 자신들의 힘으로 이뤄낸 엄청난 업적이 될 게 분명했다.
그 위대한 성공을 위해 딱 두 번의 도전만이 남았다. 아이들의 올레길 완주를 향한 의지는 더욱 불타오르고 있고, 이제는 아이들 입에서 '남은 올레길 언제 걸으러 가?'라는 물음이 먼저 나오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과연 올레길 완주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