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는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점에 도달하는 순간 갖게 되는 만족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남에게 보이는 가벼워진 모습에 의해 생성된 만족감을 갖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이다.
너는 왜 그리 삐딱하니?라고 말하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는 없다. 죄송하다. 사실 나는 꽤 삐딱한 사람이다.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어찌 되었던 “살이 빠져서 기분이 좋다. 기쁘다. 내 모습이 좋다.” 가 아닌 “살이 빠져서 자존감이 높아졌다? “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나는 꽤 불편하다.
껍데기가 중요한 세상이자 살과 전쟁하는 세상에 살면서 다이어트와 자존감의 상관관계에 대해 삐딱한 자세를 가지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제일 껍데기가 훌륭했을 때 나의 영혼은 심각히 병들어있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연령이 적었고 패션 스타일에 목숨을 거는 라이프를 살고 있었기 때문에, 꽤 괜찮은 스타일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내 인생에서 보디라인이 제일 예뻤던 시절에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불행했다.
경쟁하듯이 누구보다 먼저 트렌드에 있는 물건을 마련해야 직성이 풀렸다. 나의 가난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화려한 물건들을 소유해야 안정감을 느꼈다. 매사에 남에게 다 공유하고 퍼주는 스타일이었지만 절친한 친구에게도 그런 힙한 아이템을 빨리 득템 하는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하루에 적어도 두 번은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했다. 체중이 100g이라도 늘어나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나는 마음이 병들어 있었다. 하나 둘 따져보면 정확히 부족한 것이 없지만 항상 모든 것이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트렌드를 찍어내는 첫 사회생활에서 만난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던 지인이나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있으면 평범한 나의 외모는 항상 초라했다. 최첨단 트렌드를 쫒으며 아무리 노력을 해도 패션의 완성 요소인 아름다운 얼굴이나 완벽한 포션의 보디라인을 태생적으로 가지지 못한 외모 때문에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다.
시드니로 이사하고 난 후에는 내 맘대로 안 되는 일들이 종합세트로 내 인생에 펼쳐졌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안했던 20대와 30대. 그 시절 나의 껍데기였던 외모는 내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시기에 맞물려 시작한 만만치 않았던 이민생활을 건강하게 보낼 만큼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는 데에 소중한 시간을 물 쓰듯 썼다.
착취가 취미이지 특기인 사람들은 나의 치명적인 하자를 알아채고 호구로 이용했다. 그리고 건강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기분 나쁜 늪처럼 질척이는 내가 지겨워져서 등을 돌렸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거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악습관을 떨쳐내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게 유리한 감정의 재구성과 훈련을 통해서, 나를 단단히 만드는 것에 허리가 휠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혼자 상처받고 혼자 외롭고 싶지 않아서...
가령 여드름을 불러들이는 콤플렉스였던 악지성 피부에 대해서 “노화가 늦어질 테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생각한다 던가. 실제로 피부관리를 1도 안 하는데 40대 치고는 주름이 없다. 끈기가 없고 남을 따라 하느라 이것저것에 서성이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똑 부러지게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서 남루한 이력서에 대해서도 “아는 분야가 많으니 나이가 들어도 할 일이 많아서 심심하진 않겠네.”하며 자기 합리화에 매진했다. 이것 역시 이번 시드니 락다운 때 3달 넘게 집에 남편과 아들 둘과 갇혀있는데, 할 것이 넘쳐나서 하루가 짧았다. 덕분에 코로나 블루는 내 옆에 오지도 못했다.
게다가 걱정을 최소화하고 남과 나를 분리시키는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타인의 삶이나 시선에 상관없이 나 자신과 가깝게 잘 지내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토록 내 영혼 깊은 곳을 지배하던 외모와 패션 스타일은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한다. 이제 이렇게 근사한 자존감이 준비되었으니 다이어트만 성공하면 되는데... 현재는 다이어트 시작 의사가 전혀 없다는 함정이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단단한 뿌리를 비옥한 토양에 내린 후에야 싹을 틔우고 꽃이 피며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건강하고 단단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그 위에 그토록 원하던 체중감량에 성공해서 가뿐하고 상쾌한 기쁨까지 마련한다면... 그런 상승 기운 가득한 영혼이 창조한 자존감은 무명 장수하여 개인의 삶을 유익하게 살 찌울 것이다. 메마른 땅 위에 내린 위태로운 영혼이 깃든 뿌리를 지닌 사람이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이 자존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치자.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그 유효기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요요 현상이 일어나면 어떡할 것인가?
자존감도 요요현상을 맞닥뜨리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