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삑-삑-삑-삑-
일정한 속도로 비밀번호를 누른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불이 꺼져있는 집은 고요하다.
가방을 멘 채 느린 걸음으로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방문을 연다.
우리 집에는 방마다 작은 붙박이장이 있다. 아마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붙박이장 안은 어두운 집안보다 더 어둡고 물건이나 옷들이 빼곡하게 들어있다.
고요한 집안에 닫혀있는 문을 여는 건 두근대는 일이지만 하나씩 문을 열고 문 뒤쪽까지 살펴봐야 안심이 된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래도 문을 여는 마음은 매번 긴장된다.
손에 약간 땀이 나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지만 닫혀 있는 문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조용한 일상이다.
집에 돌아온 내가 평화롭게 지내기 위한 의식.
별 것 아니지만 긴장되는 그 의식을 모두 마치면 안심이 되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운이 빠져 가방과 겉옷, 양말을 현관 쪽에 툭툭 벗어두고 거실에 있는 소파에 눕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는 오래된 검정 소파는 군데군데 까지고 갈라졌지만 꽤 쓸만하다.
처음 누울 때는 조금 서늘해도 누워있다 보면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진다.
누워서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붙잡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댄다.
지루하다.
무슨 채널을 봐도 재미는 없지만 그냥 틀어놓고 소파에서 뒹굴거린다.
.
.
.
“현수야, 일어나. 밥 먹자. “
소파에 누워있다가 잠드는 것도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엄마가 돌아온 집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잠기운에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지만 지금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엄마는 또 한참 뒤에나 깨울 것이 분명하다.
그건 싫다.
잠이 덜 깬 몸을 억지로 일으켜 엄마가 앉아있는 맞은편 식탁에 앉는다.
그새 잠이 좀 깬 건지 허기가 약간 느껴진다.
”엄마가 늦게 와서 반찬이 별로 없어. 미안해. “
엄마는 반찬을 할 생각도 없으면서 매일 아침, 저녁 반찬이 없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인 걸 안다. 엄마는 바쁘니까. 그런 건 얘기하지 않아도 안다.
계란 반찬 하나, 국 하나, 김 하나, 밥, 가끔 김치나 나물 같은 내가 안 먹을 반찬.
그 정도가 우리 집 반찬의 전부다. 어느 날은 국이 없을 때도 있고 계란 반찬이 없을 때도 있고.
엄마가 특히 늦었거나 미리 잡힌 일정이 있는 날은 미리 햄이나 돈가스 같은 것도 차려준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배만 부르면 그만이지.
밥을 먹고 나면 깜깜한 밤이 된다. 그러면 어느새 또 잘 시간이다.
학교 숙제는 엄마에게 비밀로 한다. 내일 학교에 일찍 가서 할 거니까.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엄마는 내 숙제에 딱히 관심이 있지도 않으니까 내가 알아서 하면 된다.
잠을 자려고 누워서는 눈만 감고 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무서운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들, 얼핏 봤던 무서운 영화의 예고편 한 장면, 끔찍했던 뉴스.
이런 것들이 왜 자려고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잔인하거나 끔찍한 장면들이 머리에 자꾸 떠오를 때면 나는 내가 괴물이나 악마가 아닐까 생각한다.
체구가 작으니 괴물은 아닌 것 같고 악마 쪽에 가깝겠지. 나는 인간세계에 내려온 작은 악마인 걸까.
이런저런 생각만 자꾸 하다 보면 더 잠이 깨는 기분이다.
눈을 뜨면 무서운 장면들은 사라지는데 잠을 잘 수가 없고, 눈을 감으면 무서운 장면들이 한참이나 떠오르다 갑자기 잠들어버린다.
매일 그런 무서운 생각들이 들지만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새근새근 자는 엄마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돌아누워 자고 있는 엄마 엉덩이에 내 엉덩이를 슬며시 밀어붙이고 다시 눈을 감아본다.
맞닿은 두 엉덩이에서 미미한 온기가 느껴진다.
우리의 아침은 여전히 고요하지만 나름대로 분주하다.
엄마는 별 것이 없는 반찬들로 식탁을 채우고 나는 이른 아침부터 학교 갈 준비를 한다.
나의 등교시간은 아침 7시. 학교 등교시간은 8시 반까지지만 나는 아침 일찍 학교에 가는 걸 좋아한다.
엄마는 내가 너무 일찍 가는 게 걱정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일찍 가는 게 좋다고 몇 번 말을 한 이후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으셨다.
일찍 학교에 가는 게 왜 좋은지 이유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아마도 교실에 먼저 온 친구들이 날 보는 게 싫은 것 같다.
왜 싫은지는 역시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오늘도 엄마보다 먼저 집을 나선다.
교실에 가면 특별히 할 일은 없다.
학교에 일찍 와서 하려고 했던 숙제는 쉬는 시간에 하기로 한다.
시간은 많으니까.
가방을 걸어두고 외투를 벗어두고 깨끗한 칠판을 한 번 더 지운다.
그리고 친구들 책상을 대충 둘러본다.
어제보다 낙서가 하나 더 늘어난 책상도 있고 상처가 생긴 책상도 있다.
이런 사소한 변화들은 나만 알거라 내심 흐뭇하다.
어떤 책상에는 서랍의 책들이 꽉 들어차 있고 어떤 서랍에는 먼지만 쌓여있다.
친구들 책상을 둘러보는데 역시 별 이유 같은 건 없다.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책상은 더 유심히 본다.
특별한 것도 없지만 괜히 책상도 한 번 더 보고 서랍에 들은 것들도 뒤적여 보고.
책상 둘러보기가 끝나면 괜히 사물함도 한 번씩 열어본다.
역시나 별 이유는 없다.
그냥 학교에 일찍 와서 볼만한 것들이 그런 것뿐이고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뿐이다.
사물함은 좋아하는 친구들 것만 열어보고 그대로 닫는다.
친구들 사물함이나 괜히 열어보는 사람이라는 걸 굳이 들켜서 좋을 건 없다.
그럼에도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일들이다.
매일하는 일이라 크게 감흥이 있지도 않은데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그러다 보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드문드문 온다.
친구들이 오면 혼자만 있던 고요한 세계가 다른 세계로 이동한 기분이 든다.
혼자만 있는 공간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공간.
그곳은 같은 곳이어도 다른 세계가 된다.
드르륵 -
교실 앞문이 덜컹거리며 밀린다.
한서가 왔다.
한서는 보통 내 다음이다.
부모님이 맞벌이셔서 부모님이 출근하는 시간에 같이 나온다고 했던가.
“현수야, 안녕.”
“응, 안녕.”
한서가 나에게 인사하고 자리 정리를 한다.
나는 한서가 자리에 앉아 정리하는 모습을 무심코 지켜보다가 숙제를 해보기로 한다.
수학 익힘책을 사물함에서 꺼내 책상에 올려놨지만 사실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한서가 왔으니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필통도 꺼내고 알림장도 꺼낸다.
알림장 뒤편은 수업시간에 적어놓은 낙서들로 빼곡하다.
그냥 노트필기를 하는 척하면서 적어놓은 시시한 낙서들이다.
내 인생도 내 노트처럼 시시한 것들로 빼곡하다.
수업시간은 지루하다.
그렇다고 수업을 피할 요령도 없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노트 필기를 해본다.
그러다 노트 위쪽에 또 다른 생각들을 적어본다.
나는 수업을 열심히 듣는 편이지만 자꾸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는 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도 다시 수업을 들었다가 다른 생각으로 빠졌다가를 반복하면 수업시간은 끝이 난다.
수업이 너무 지루한 날에는 아주아주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다행히도 짝꿍은 내가 수업시간 내내 흥얼거리는 걸 모르는 눈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있는 시간들은 너무 지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