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시> 3화 / 부재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

by 고유 just being


종종 그날이 생각난다.

내 기억 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는 엄마의 표정.

무표정은 분명 아니었는데 기쁜 듯 슬픈 듯 알 수 없던 표정.

지나고 나서 알았지만 그날은 아빠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 내가 유치원 때였던가.

초등학교 때였던가. 8살, 9살이라고 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 내 기억 속의 아빠는 어떤 날은 미안하다며 용서해 달라고 다 자기 잘못이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어떤 날은 다 네 잘못이라며 다 너 때문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날에도 엄마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엄마가 가끔 한 마디를 할 때면 아빠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상황에 할 만한 말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해요. 옆집 시끄럽겠어요.”


엄마의 대답은 아빠를 매번 더 화나게 했다.

엄마의 침묵도 아빠를 매번 더 화나게 했다.


내 기억 속에 아빠는 그런 존재였다.

이미 화가 났고 계속 더 화가 나는 사람.

아빠가 화를 낼 때면 나는 방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를 도와줄 수도, 아빠를 말릴 수도 없었다.

그럴 때는 매번 숨이 막혔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어떤 날에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장난감을 사주겠다며 잠든 나를 깨워서 장난감 가게에 데려가기도 했다.

아주아주 추운 날이었다.

잠에서 덜 깬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며 빨리 가자고 재촉해 대는 통에 내복 바람에 패딩만 입고 양말도 안 신고 그렇게 나갔었다.

아빠 차를 타고 도착한 장난감 가게에서 대충 눈에 보이는 장난감을 샀었다.

내 손을 잡아끄는 아빠의 손은 차갑고 거칠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새로 생긴 장난감은 좋았다.


만약에 아빠가 또 장난감을 사준다고 하면, 손은 잡기 싫다고 할 거다.

이젠 내가 많이 컸으니까.

그렇다고 아빠를 다시 보고 싶은 건 아니다.

아빠가 오면 아빠는 또 계속 화만 낼 거고 엄마랑 나는 많이 시끄러울 테니까.

그렇게 엄마와 나는 둘만 세상에 남겨졌다.

우리는 세상에 둘 뿐인 가족이 되었다.

.

.

.

삑삑삑-삑삑-

띠링띠링-

삑삑-삑삑삑-

띠링띠링-

삑삑-삑삑삑-

누군가 급하게 비밀번호를 누른다.

비밀번호가 자꾸 틀린다.

할머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할머니’라고 불러야 맞는 우리 할머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만 들어도 할머니인 걸 알 수 있다.

할머니는 성격이 급하시고 말씀이 많으시다.

하지만 할머니는 세상에 둘만 남겨진 우리를 늘 안쓰러워하신다.

나는 아빠랑 같이 있었을 때가 더 많이 화나고 슬펐는데…

할머니는 늘 나를 사랑한다고 하시지만 우리는 서로 많이 다르다.


“현수야, 점심 먹었니? 엄마 계시니?”

“할머니, 안녕하세요.”

“현수 집에 혼자니? 점심 먹었어?”

할머니는 대답할 틈을 안 주시고 물어보신 걸 또 물어보신다.

나는 한 템포 쉬었다가 할머니가 신발정리에 잠깐 정신이 팔리신 틈을 타 대답한다.


“… 엄마는 회사 가셨고 저는 점심 먹었어요.”

“벌써 점심 먹었구나. 현수 혼자 심심했겠네.

할머니가 현수 빵 좀 주려고 사 왔지.

현수 빵 좋아하니까.

현수 먹고 이따 엄마 오시면 또 같이 먹고 그래.

할머니는 병원 가야 돼서 갈게.

현수 혼자 심심하겠네.

할머니 또 올 테니까 배고프면 자꾸 뭐 챙겨 먹고 있어.

할머니 갈게.

아무나 문 열어주지 말고.

이것저것 많이 먹어. 많이 먹어야 많이 큰다.

할머니 병원 가야 돼서 갈게. 할머니 또 올게. “

할머니의 사랑의 말들은 종종, 아니 거의 항상 귀가 좀 아프다.

할머니는 가겠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반복하시고 나서야 가셨다.


쇼핑백 한가득 빵을 사 오셨는데 내가 좋아하는 빵은 없다.

그래도 배고플 때 먹으면 맛있겠지.

대충 빵을 꺼내놓고 쇼핑백을 접어서 식탁 아래 끼워놓고 다시 소파로 돌아간다.



예전에 엄마의 가시를 한참 들여다보던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낳지 말라니까 왜 말을 안 듣고 고집을 부려선.

없어지지도 않는 게 생겼는데 어쩌려고 그렇게…”


할머니의 두서없는 이야기들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건 분명 엄마의 가시에 대한 이야기였고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뭐가 가시에 대한 이야기인지 나에 대한 이야기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태어났을 때는 가시가 없었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엄마의 맨들하게 마냥 고운 오른손.

자랄 때도 없었던 가시가 엄마의 오른손에 돋아난 해는 내가 태어난 해였다.


혹시 엄마가 나 때문에 가시가 생긴 거라면 나는 정말 악마가 맞는 걸까.

엄마는 이 세상에 내려온 작은 악마를 막아야 되는 그런 운명의 천사인 걸까.

엄마에게만 있는 그 이상한 가시는 정말 나랑 상관이 있는 걸까.

엄마의 가시는 내가 클 때마다 점점 커져서 내가 진짜 큰 악마가 되면 나를 베어버리라고 생겨난 건 아닐까.


할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날 때면 왠지 내가 악마라서 엄마에게 가시가 생긴 것 같은 그런 엉터리 영화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꼭 말이 안 되라는 법도 없다.

이 세상은 원래 좀 엉터리 같으니까.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나는 더 이상 가시에 대해 물어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가시에 대한 이야기가 얼핏이라도 들릴 때면 듣지 말아야 할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온몸이 얼었다.

그런데도 가시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 또렷이 잘 들렸다.

.

.

.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간식을 사 왔다며 내 입에 넣어준다.

자려고 엎드려있던 나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먹이 앞의 동물처럼 입을 벌려 과자를 먹는다.

쉬는 시간에 자는 나를 깨워 친구들이 나에게 간식을 먹이는 건 흔한 일이다.

굳이 뭐 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거절하는 일은 더 귀찮은 일이다.

먹고 싶지 않은 이유도 얘기해야 되고, 먹고 싶지 않다는 표정도 지어야 한다.

그것보다는 그냥 입을 벌려 과자를 넣고 다시 엎드리는 편이 훨씬 편하다.

어쩌면 입에 넣는 과자가 맛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간식 같은 걸 싸와본 적이 없는데 친구들은 과자를 잔뜩 싸와서 자주 나를 먹인다.

그럴 때면 저 친구들은 나를 위해서 과자를 싸 오는 건지 나한테 과자를 먹이는 게 재밌어서 과자를 싸 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게 그건가.


과자가 닿은 혀에 단맛이 힐끗 감돌다 녹아 사라진다.

달다.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책상 위에 엎는다.

친구들은 ‘자는 나를 깨워 과자 먹이기’가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내 앞자리, 옆자리에 둘러앉아 수다를 떤다.


옆반 남자애가 옆반 여자애한테 고백을 했다더라.

학원차에서 큰 소리로 얘기를 해서 옆에 있는 친구들이 다 들었다더라.

여자애 얼굴이 빨개졌다더라.

여자애도 그 남자애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건 아니다 뭐 그런 이야기들로 시끄럽다.

시끄럽다, 정말.


큰 소리로 떠들던 친구 중에 한 명이 내게 묻는다.

“현수야, 너는 좋아하는 남자애 없어? 현수 좋아하는 애도 분명 있을 거 같은데.”

“없어. 남자애들 관심 없어.”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우리 반에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다.

하지만 뭐 친구들한테 떠벌릴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냥 뭐 다른 애들보다 좀 더 쳐다보게 되는 그런 정도지.

그래도 좋아하는 애가 없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 맞을 거다.

그러든가 말든가 어차피 들킬 일 같은 건 없다.

나는 거짓말을 굉장히 잘하니까.


근데 뭐 그런들 내가 지금 남자친구를 사귀겠어 뭘 하겠어.

사귀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것도 아닌 거 같고.

남자친구를 사귀는 건 결혼할 수 있는 나이에 하고 싶다.

결혼할 나이에 남자친구를 사귀고 그때 결혼할 거다.


가끔 결혼생활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그런 가족.

상냥한 엄마와 자상한 아빠에 아들 하나, 딸 하나.

결혼하고 싶은 이상형도 있다.

일단, 아빠 같은 남자랑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다.

목소리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는 끔찍하다.


내 이상형은 엄마 같이 고운 사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않을, 세상이 두쪽이나도, 나 때문에 못된 가시가 손에 돋아도 나를 떠나지 않을 그런 사람.

혹여 내가 미워지더라도 절대 내 손을 놓지 않을 그런 고운 사람이랑 결혼할 거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