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차 - 마지막 단식일
15일차 마지막 단식일
몸무게 66.6kg, 체지방율 15.6%
(몸무게 7.6kg, 체지방 4.9% 감소)
금요일이다.
오늘 하루만 견디면 내일은 먹을 수 있다.
당장 보통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곡기가 입으로 들어온다.
누나들에게 미리 보식 만드는 법을 물어보고 머리속에서 시뮬레이션 해 두었다.
보식은 미숫가루 같은 선식인데, 물에 타서 먹는 게 아니라 죽처럼 끓여서 먹어야한다.
별것 아니지만 그것만 먹어도 살 것 같이 행복감이 느껴진다고 하니 무척 기대가 되었다.
전부터 나를 알던 사람이 봤을때는, 지금의 나는 아픈사람 그 자체이다.
얼굴은 반쪽이 되었고 쾡하니 허여멀건 하다.
목이 가늘어지고 옷이 넉넉하다 못해 마치 초등학생이 학예회때 아버지 셔츠와 양복 바지를 입은 모습같다.
회사 근처를 걷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화들짝 놀라며 어디 몸이 안좋으신가 묻기도 한다.
요 몇일 사이 허리가 잘 안펴지고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다닌다.
짐작컨데, 배에서 앞으로 쏠리던 하중을 지탱하고 있던 지방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뒤에서 받치고 있던 척추가 앞으로 기울어진게 원인인 듯 싶다.
그 상태로 가방을 매니 허리가 아프고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아랫쪽 허리도 아프다. 코어 양 옆에 자리잡고 있던 러브핸들이 빠지면 코어근육에도 부담이 가는걸까?
어쨋든 얼른 보식을 하면서 근손실 회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장은 확실히 좋아졌다.
염증이 없어졌고 거북한 느낌도 사라졌다.
다만 아직까지는 바로 누워서 잘때 위산이 역류하는 느낌이다.
피부 트러블이 사라졌다.
얼굴, 특히 T존의 모공들마다 알알이 박혀있던 피지가 줄어들었다.
하루종일 얼굴에 번들거리던 유분이 사라지고 피부톤이 맑아졌다.
몸이 가볍고 머리는 더 가볍다.
정신이 맑고 또렷하며 잡 두통이 사라졌다.
스트레스가 덜하고 모든 상황이 평소 보다 더 객관적으로 보이는 느낌이다.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단식원 같은 강제적 환경에서 단식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장기간의 단식을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의 실수나 실패없이 모든 유혹을 이겨냈다.
그리고 지난 15일간 단 하루의 휴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내 자신이 독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자신이 자랑스럽다.
어릴때는 견뎌내는 것이 큰 일이었다.
견딜 이유가 없는 어린 시절, 자유로운 시간들 속 간혹 참아낼 것을 요구받는 순간들이 있었다.
4-50분의 수업을 견뎌내고, 목욕탕에서 때를 불리려 뜨거운 시간을 견뎌내고,
시험시간의 긴장과 중압감을 견뎌내고, 엎드려뻣쳐 벌서는 시간을 견뎌내고..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 직장생활을 해보니
매 순간순간을 견뎌내야 했고, 그 수많은 인고의 시간 끝에 간혹 자유를 만날 수 있게 되더라.
그렇게 견디는 삶에 인 박혀 무감해 졌을때 15일 단식이라는 강도높은 태스크를 만났다.
그래도 성실히 견뎌온 삶의 관성이 15일의 단식을 수월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아 고마웠다.
오늘 하루는 시간이 참 더디게 가긴 했다.
단식 첫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금요일이었다.
15일이 언제 끝나나 싶었는데 이윽고 그날이 왔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몇몇 동료들이 말을 걸었다.
이제 드실 수 있는거세요? 가장 먹고싶으신 음식이 뭐에요?
아니요.. 앞으로 15일간은 보식을 해야해서 죽만 먹어야합니다..
아.. (말잇못)
집에 도착하니 와이프가 수고했다며 안아주었다.
위로가 되었다.
나는 정말 수고했다.
오늘은 일찍 잠들 생각이다.
그래야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보식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단식 마지막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