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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Mar 30. 2024

항암제가 남긴 것

오랜만의 철렁

일주일 출장을 다녀왔다.

세면대에, 구내염에 쓰는 가글이 뜯겨 있길래

누가 입병이 났나, 했다.


출장을 간 동안

바로 이튿날 부터 나는 엄청난 피로감에 시달렸는데

시차때문도,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오래 앉아있던 탓에 휘어진 허리 때문도 아니었다.


새벽 3시반에 큰 아이 담임 선생님께 걸려온 전화로

아이에게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고 다시 청하는 잠이

올리가 만무하였다.


무슨 일이길래 그럴까 막연한 걱정은

돌림노래를 부르며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내 마음 같지 않은 한국의 모든 일들이

스트레스로 다가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새롭게 피어나는 봄 꽃 말고는

모두가 불안하고 심난하여 좋을 것이 없는

- 특히 초등생 아이를 둔 워킹맘에게는-

3월에 꼭 출장을 나왔어야만 했을까.


그렇게 한국에도, 출장지에도 어디에도 진득히 마음 두지 못하고 허둥지둥 돌아온 출장길이었다.



- 누가 입병이 났어요?

- 응 은우가 아프다고 하네.


핸드폰 조명을 켜고 아이의 입동굴을 비춰보니

윗 어금니쪽 잇몸이 비정상적으로 심하게 부어있었다.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니니

이물감때문에 불편하고 혹시라도 잇몸이 씹힐 때 아픈 것 같았다.


- 내일 소아치과 가볼께요. 일요일인데 여는 곳이 있으려나...


신도시에 살며 좋은 것 중의 하나는 병원이 많다는 것이다. 거기에 주말에도 진료를 보는 병원이, 어디보자 소아과 내과 그리고 치과도 있구나.


- 저희 병원에 처음 오셔서 엑스레이 한 번 찍어볼게요.

- 네.



새로 개원한 대형 병원들처럼

대기 공간은 쾌적하고, 소아치과 대기실에는 소소한 장난감들도 많이 있었다.


- 어머니, 일단 은우 잇몸은 어금니가 나오려고 해서 부어있는 것 같아요. 통증이나 발열 있는 경우 다시 한 번 데리고 오세요.

- 아, 네~


염증이나 다른 이상은 없었다.


- 그런데 어머니, 은우 영구치가 많이 없는 거..알고 계신가요?

- 네?

- 여기 엑스레이 사진 보시면, 7번 8번, 3번 이쪽이 다 없어요.


해골바가지 필름이 스크린에 뜨고

유치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어른 이빨들, 즉 영구치의 형상이 군데 군데 보였다.

그 사이 사이에 마우스로 번호를 써나가며

원장은 이야기를 했다.


- 이 연령대에는 영구치가 생성되어있어야 하는데

아이같은 경우는 영구치가 반이상 없어서요...


- 선생님, 은우가 어렸을때 항암치료를 했는데요

혹시 그 영향이 있는건가요?


- 아....네. 그럼 그 때문일 것 같습니다. 치아가 생성되어야하는 시기에 치료를 한 경우는 이렇게 될 수 있어요.


- 그래도 앞으로 나지 않을까요?


- 치료한 친구들은 대부분 영구치가 없어서 어린 나이부터 임플란트나 다른 치료를 하게 되요.


실로 오랜만에, 몸 속을 쓰라리게 긁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심장이 작게 철렁, 하였다.

입 속에서 탁구공만한 뜨거운 것이 입천장을 통해 눈으로 흘러나올 것 같았다.



- 유치 관리가 중요해요.

   영구치가 없는데 유치가 금방 썩거나 빠져버리면

  고생할 수 있으니까 딱딱하고 질긴 것은 피하시구요.  

  치아도 수명이 있어서 오래 쓰려면 조심해야 해요.

  그리고 양치 잘 해주시고, 불소 들어간 가글도

  있으니까 매일 가글도 해주세요.


- 네, 네...저, 그럼...온 김에 불소 도포 해주세요.

- 네, 한시간동안 물 음식 못드세요.

- 알겠습니다...


털레털레, 투덜투덜 걷고 있던 길 가에

옆 골목에서 나타난 괴한에게

통수를 가격 당한 기분이 이럴까?


너무 아프고

너무 황당하고

너무 화가 난다.



나는 내내 무엇을 투덜거리고 있던 걸까.

잠을 잘 못잔 것? 출장을 기어이 보낸 회사?

내가 해달란 대로 안해주는 남편? 등교를 거부한 큰 아이?


사치고 호사였구나.


도대체 항암제란 것은 얼마나 독하기에

평생 아이가 써야할 치아까지 나지 못하게

아이의 몸을 전쟁 후 폐허처럼 망가뜨려 놓은 건가.



천근만근한 마음을 질질 끌고 진료실에서 나와

대기실에서 불소가 들어간 가글과 고불소 치약을 샀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 아니야, 아니야,

- 지금 내 호르몬 수치를 생각해보자. 마법기간 곧 시작이야.

- 지금 내가 시차적응도 못했잖아.

- 과민한 반응일수도 있어.


애써 마음을 잡아본다.

곧 도착한 동생의 메시지가 뜯겨나간 마음 표피를 마데카솔처럼 치료해준다.


' 언니 우리 회사에도 유치로 사는 사람 있어. 그리고 유리 친구 중에도 벌써 임플란트한 애 있어. 생각보다 그런 사람 많으니까 괜찮아.'



그래. 맞다.

드라마는 접어두자.

자꾸 비극적인 스토리로 몰아가지 말자.

 

아이는 잘 뛰어놀고

출장에서 돌아온 엄마를 수시로 끌어안는다.


- 엄마, 나 엄마 너무 보고싶었어.

- 나아도오-


양팔 가득 아이들을 끌어안는다.

리뷰가 가장 좋은 가글을 주문해놨다.

휴대용 스틱도 주문했다.



늘,

할 수 있는 걸 하자.


할 수 없는 것들,

나의 현실이 아닌 것들,

의미없는 생각에 잠겨있지는 말자.



오늘도 힘겹게,

감정과 이야기의 늪에서

나를 건져냈다.


건지고

건지고

또 건지고



- 은우야, 치카하자!!!



열심히 열심히

아이의 작은 단추같은 이를 닦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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