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진짜인 것
- 원장님,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상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어색하지만 정중한 두호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두호님은 이제 70을 갓 넘긴 노년기의 남자환자로
오래전부터 아내의 일로 나를 찾아왔었다.
- 사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 똑같아요. 계속 방에만 누워있습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요.
어제는 제가 너무 걱정이 되어서 숨은 쉬고 있는지 코 밑에 손을 대봤다니까요.
- 두 분이 서로 대화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 아휴, 대화요? 글쎄요... 저번에 아이들이 칠순잔치 해준다고 했을 때니까...
- 선생님, 그건 8개월 전 아닌가요?
- 예, 예. 그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네.
8개월 동안 한마디도 안하는 부부라니.
두호님의 아내는 오리온 중독이 심한 상태였다.
젊은 시절에 못다한 그녀의 모든 꿈을 오리온에서 실현시키느라
현실에는 돌아올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꿈을 살고 있는 동안,
모든 경제적 부담은 그녀의 남편, 두호씨가 짊어져야 했다.
그렇게 살아온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 선생님은 괜찮으신가요?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을텐데요.
이렇게 오랫동안 접속하시려면요.
- 힘들죠. 네, 힘들어요... 제대로 된 밥한끼 사먹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지금 집도 내놔야 할 것 같아요.
오리온에서 날아오는 명세서를 더 이상 감당하기가 벅차네요.
- 집까지 파신다구요? 비용 부담이 얼마나 되시길래...
- 아휴, 이 여자가 글쎄 오리온에서 뭘 그렇게 많이 사대는지...
거기는 다 가짜라는데, 그렇게 살게 많은가봐요. 또 얼마나 비싼지...
오리온에 접속해 본 적이 없는 두호씨로서는
실제로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것을 사는데 그 많은 돈을 쓰는 아내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두호씨도 볼 수 있도록 실물이 있다면
이렇게 속절없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은 아닐텐데.
- 저는요, 원장님, 어떻게하면 와이프가 돌아올지 알고 싶습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저렇게 누워만 있으면요, 저렇게 환상 속에서만 머물고 싶어하면요,
나중에는 몸도 망가지고 정신도 제정신이 아닐 것 같아요.
돈을 많이 쓴 건 지나간 일이니, 저는 이제 와이프를 다시 찾고 싶은 겁니다.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 선생님, 선생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쉽게 그 세상에서 떠나오시지는 못할 거에요. 그 곳에 사모님이 원하는 모든게 다 있으니까요.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구요. 워낙에 하고 싶은것, 되고 싶은게 많은 분이셨잖아요.
- 방법이 없는 겁니까?
- 사모님 스스로 이곳이 가짜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전에는 어려우실 거에요.
축 처진 두호님의 어깨가 문밖으로 사라진다.
창 밖으로 이미 져버린 해의 마지막 붉은 빛이 어두운 하늘을 밝히고 있다.
나는 오리온에 가지 않은지 세 달이 되어가고 있다.
지후가 보고 싶고 민준씨가 있는 그 집이 주는 아늑함이 그리워
여러번 니보 수트를 입으려고 했지만,
동시에 그 날에 내가 느낀 생경함, 서늘함이 생생하게 살아나
수트를 다시 드레스룸 안에 넣어놓게 했다.
내가 가장 강하게 애착을 느끼는 것들이
언제든 재설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아프면서도, 무섭고 소름이 끼쳤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더 충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탓할 수 없고,
누구의 품에서도 울 수 없는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유일한 삶의 낙이었던 지후를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고통.
나의 삶은 지고 있다.
서서히 어둠 속으로 잠겨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둑해진 상담실 안에서 완전히 깜깜해진 하늘을 보다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울과 슬픔도 극심한 허기를 이기지는 못하는 것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집에 가서 할 일이 없는 저녁이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해장국이 먹고 싶다.
뜨끈하고 시원한, 마법의 국물이 먹고 싶다.
오랫동안 진짜 솥에서 끓여낸, 그런 국물을 먹은 적이 도대체 언제인가?
해장국맛 국물, 해장시럽이 아니라
진짜 선지에서, 내장에서, 우거지에서, 콩나물에서 우러난 맛.
그 얼큰한 국물.
- 거기가 어디였지?
몇 년 만의 식당 방문이라, 가게 이름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해장국 맛집, 으로 검색해도 그곳이 아니다.
하지만 난 오늘
그 해장국을
꼭
먹어야겠다.
큰 결심을 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라락, 다라락, 다라락, 다라락.
- 어....여보세요?
- 어.....여보. 나야.
- 어어....어.......왠일이야? 무슨...일 있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5년만에 첫 통화다.
남편이 당황할만도 할 것이다.
- 물어볼게 있어서 전화했어.
- 응...뭔데?
- 그....우리 옛날에 자주 갔던 해장국집 있잖아, 선지랑 콩나물 많이 주던 데.
- 아, 응. 거기.
- 거기 이름이 뭐였지?
- 아....거기 이름?
- 오늘 거기를 꼭 가야겠는데......하나도 생각이 안나네. 위치도, 이름도.
- 그러게.. 내가 연락처를 한번 볼게. 예전에 예약하느라고 전화한 적있어.
그런데 아직 하는지 모르겠다.
- 아...그러네. 요즘 세상에 해장국집은 잘 안가겠지?
- 잠깐만..........있다. 중앙해장.
- 아!!! 맞다 맞다... 그 이름이다. 고마워.
- 응...그래. 맛있게 먹어.
- ....응.
5년만의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해장국집의 이름을 묻고 답하는 것으로.
주말 아침이면 우리 부부는 꼭 그 해장국집으로 달려가 주말을 시작했다.
불금을 보낸 다음날 아침 들이키는 국물은 정말 최고였다.
그 모든 걱정 시름을 싹 씻어주는 마스터의 맛이랄까.
오늘 저녁, 그 국물을 마시고
나의 오랜 심난함을 싹 씻어내려야겠다.
네비게이션으로 중앙해장을 찍고 달렸다.
생각보다 멀지않은 곳에 있었고, 무엇보다,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벌써 밤 9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사람이 바글바글 했고
심지어 웨이팅까지 있었다.
- 이 시간에 웨이팅이라니. 맛집은 영원하구나.
내가 수많은 시간을 오리온에서 울고 웃는 동안에도
중앙해장은 이 많은 사람들에게 해장국을 끓여 그들의 지친 속을 달래주고 있었던 것이다.
배에서는 꾸르륵 소리가 나고 있다.
- 아, 배고픈데.....얼마나 걸리지.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식사가 아니라 술을 한잔 하는 테이블이 절대적으로 많은 것이 보였다.
해장국을 안주로 술을 마시는 나라. 생각할 수록 대단하다.
술마시는 사람이 많으니 금방 자리가 날 것 같지는 않고
기다리기에는 너무 배가 고파 포기하기로 했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 여보! 여보!!!
고개를 돌려 사람들과 해장국 김으로 가득찬 식당안을 바라본다.
바글 바글한 사람들 사이로
두 팔을 번쩍 하늘로 치켜들고 나에게 힘껏 손을 흔들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 해장국 둘이요.
남편이 주문을 함과 거의 동시에 부글부글 끓는 해장국이
하나씩 놓아진다.
구수하고 꾸릿한 냄새가 코 점막을 자극하자
침샘에서 침이 왈칵 나온다.
참지 못하고 숟가락을 들어 황급히 입에 넣으려는 찰나
남편이 팔을 탁, 잡는다.
- 입 데, 천천히 먹어.
아, 이 사람.
이런 사람이었다.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
- 응.
입으로 후후 몇 번 분 후
후루룩, 숟가락의 국물을 넘겨본다.
이거다.
이 맛이다.
이건 진짜 음식이다.
텅텅 빈 나의 뱃 속과
텅텅 빈 나의 마음 속을 어루만져 주는
이 따끈하고 시원한 국물.
입안에 가득 퍼지는 깊은 풍미가
코를 통해 머릿속까지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국물을 떠 넣었다.
남편은 선지를 조금 잘라내
국물과 함께 입에 떠 넣었다.
그렇게 우리는 5년만에
해장국을 함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