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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Oct 14. 2021

너희의 명랑을 사랑해

사고는 너희 몫, 처리는 우리 몫


‘북북북….’


새벽 4시, 옆에 누운 삼월의 숨소리마저도 고요해진 시간. 알 수 없는 소음이 연속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멈출 줄 알았던 괴상한 소리는 쉬지 않고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매트를 긁는 것 같기도, 책을 찢는 것 같기도 했다. 섬뜩한 기운에 목덜미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감았던 눈을 뜨고 거실로 발을 옮겼다. 검은 눈동자가 선연했다.


“망구야!”


이윽고 내가 소리를 내자 시꺼먼 형체가 후다닥 어딘가로 모습을 감췄다. 자리에는 갈기갈기 찢긴 휴지조각이 수북했다. 최소한의 조명을 켜고 어지럽혀진 자리를 정돈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후로도 같은 현상이 한번  반복되었으며 나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있었다.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고양이들이 대체로 조용한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망구 (록이라 짓고 망구라 부른다.)는 나머지 세 마리보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확실히 기운이 넘친다. 물론 솔, 풀, 택이 기운이 달린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들은 집에 있는 사물을 무던히 넘길 줄 알며 가구로 인식했으나 망구는 아니다. 새로운 물건이 나타나면 코부터 들이댄다. 강아지들에게 산책이 필수이듯 고양이들에게는 사냥 놀이가 필요하다. 야생의 습성을 유지하면서 스트레스 해소와 운동까지 할 수 있는 사냥 놀이 역시 인간의 체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네 마리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 나와 삼월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집이 넓었다면 낚싯대를 들고뛰기만 해도 그들을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협소한 거실과 방을 힘껏 뛰어봐야 이웃에게 미안해지기만 할 뿐, 녀석들의 힘을 빼놓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다 보니 저들 나름대로 비축된 체력을 사용하기 위한 요령이 생긴 듯한데, 두 마리가 짝을 이뤄 행하는 추격전이나 나 홀로 질주가 그 예시다. 망구에게는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휴지 뜯기다. 두루마리 하나 덜렁 나와 있으면 고양이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우리 집은 원래 휴지는 30개짜리를 구매해 거실 한 구석에 두고 필요시 꺼내 쓰곤 했다. 지금은 옷장 안으로 위치를 변경하는 바람에 자연스레 망구의 은밀한 취미도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이럴 때는 ‘내 탓이오’를 외치는 게 가장 마음 편하다. 애초에, 하필 그 자리에 물건을 꺼내 둔 우리 탓이라고.


하루 종일 붙들고 귀찮게 굴면 밤에 기력이 없어 뻗어 자는 게 고양이거늘, 필히 원인은 출근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의 흥미진진하고 다사다난한 시간은 과거이자 현재 진행형이다. 그중 사이즈가 꽤 큰 사건들을 추려보자면, 가장 먼저 2018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솔과 지내던 원룸 계약 기간도 슬 마무리가 되어 가던 때였다. 한 달 후 방을 빼야 하는데, 오밤중에 솔이 벽을 짚고 점프를 하다가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던 약 20-25인치로 예상되는 티브이를 넘어트리는 바람에 모니터 자체가 아예 박살이 나서 나올 때 티브이 값 25만 원까지 물어주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25만 원을 날려버리고 나는 천안을 떠나왔다. 어차피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라지만…. 다시생각해도너무하네.


그다음은 2020년,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벌어진 일이다. 택과 다소 까탈스러운 두 고양이(솔, 풀)의 합사가 원만히 이루어진 뒤에는 세 마리가 동시에 뛰어다니는 날이 잦았다. 일명 우다다. 4킬로를 훌쩍 넘은 녀석들이 제 무게는 신경도 안 쓰고 나 잡아 봐라를 시전 하면 집안이 소란스럽고 산만해진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입는 피해라고 한다면 고양이들에게 배를 짓밟히는 정도였다. 얌전히 숙면을 취하고 있는데 4킬로짜리 쌀 포대가 배 위로 떨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어느 날은 택이 얌전히 자고 있는 나를 밟고 지나간 적이 있다. 택은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기함을 하기 때문에 발톱 손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런 놈이 하필 내 얼굴을 밟아 버린 거다. 안면에 묵직한 무게감이 닿자마자 내가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놀란 택이 후다닥 달려 나가면서 내 이마와 콧잔등에 빨간 줄이 세 개나 그어졌다. 그 와중에 잠에 취한 삼월은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했을 뿐. 너무 놀라고 따가워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는데, 상황을 목격한 솔이 택에게 달려가 마치 나무라듯 펀치를 연타로 날리는 걸 보고 은근한 감동과 어이를 상실해 웃고 말았지만 나는 며칠 동안 얼굴에 메디폼을 붙이고 다녀야만 했다.


이 두 사건의 경우 우리의 잘못이라고 하기에 몹시 애매하고 고양이를 탓하기에도 썩 석연치 않다. 걔들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닐 테니 허탈한 추억 정도로 치부할 수밖에.  


외에도 깜빡 잊고 넣어두지 않은 화장실 모래를 뜯어 온 바닥을 모래사장으로 만든 일, 갑자기 식탁 위로 뛰어들어 먹고 있던 콩국수를 엎은 일…. 가뜩이나 완벽하지 않은 인간 둘이 사는 집에 말괄량이들이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니 말 그대로 바람 잘 날이 없다. 나는 이런 요란함이 달갑다. 뒷정리는 오롯이 우리의 책임이지만, 먼 훗날에 꺼내어 웃을 수 있는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걸 어찌 거북해할 수 있으랴. 고양이를 기르는 삶이란 내 뜻을 거슬러도 기꺼워 마지않으며 차라리 귀여운 아우성들이 영영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채워진다. 이토록 애정이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이들의 명랑을 사랑한다.


그래도 얘들아, 사고 스케일을 조금 줄여볼 생각은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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