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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Nov 30. 2021

포기는 어려운 게 아니라

 우리는 마땅히 포기하며 살아야 한다



고양이들도 계절을 탈까. 솔은 유독 급변하는 계절에 약하다. 이전부터 그랬다. 습한 여름에는 피부병을, 겨울에는 감기를 달고 산다. 피부가 예민하고 면역력이 약한 게 꼭 나를 닮았다. 물려준 것도 아닌데 미안할 따름이다.


거제도에 가기로  당일  아침, 아이 귀에 커다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분명히 전날 밤만 해도 말짱하던  끄트머리에 단단하고 제법  딱지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붙어 있었다. 이게 뭐지. 만지면 훌렁 벗겨져 피라도 볼까 싶어 살펴만 보았다. 손이 닿자 예민한 귀가 까딱거렸다. 방치하면   듯싶어 아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고 이동장에 아이를 넣었다. 빠져나오려 틈을 노리는 머리를 가볍게 누르고 지퍼를 닫았다. 들어보니  무거웠다. 목소리가  아이들은 자존감이 높다고 했던가. 요즘 들어 부쩍 목소리가 커져서, 묵직한 이동장을 등에 짊어지고 문밖을 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피스텔 로비를 벗어나는 내내 아이는 크게도 울었다. 새로  이동장은 어깨 끈이 달려 배낭처럼   있는 제품이었는데, 물건의 무게가 은근히 나가 병원으로 가는 동안 지게꾼마냥 구부정한 자세로 경보를 했다. 병원이 가까워 행이었다.


 “화농성 피부염이네요. 이건 딱지가 아니고 고름이에요. 하룻밤 사이에도 생길 수 있고요.”

 “원인은요?”

 “계속 긁어서 상처에 염증이 생겼거나, 다묘 가정의 경우 놀다가 그랬을 수도 있어요. 오늘 주사 맞고, 약 먹고 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연고도 드릴 텐데, 피부에 얇게 발라 주셔야 해요. 긁지 않게 넥카라를 해주면 더 좋아요.”


솔은 주사를 맞으면서도 하악질을 했다. 자신이 언짢은 티를 맹렬하게 냈다. 연고와 알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연신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차라리 말이라도 통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본래 그날 저녁은 친구가 집에 들러 아이들을 잠시 봐주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병원에 가 있는 동안 삼월은 집 청소를 하고 있었다. 한층 깔끔해진 집안에, 허탈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어깨가 떨어질 듯이 뻐근해 서둘러 가방을 내려놓았다. 솔은 낯선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동생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소파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거제도에 가기로 한 일은 전부터 계획을 했고 약속이 되어 있어 고민이 되었다. 삼월은 어차피 하루 동안만 자리를 비우는 것이니 가기 전에 약을 먹이고, 다음 날 일찍 돌아오자고 했다. 나는 쉬이 답을 하지 못 했다. 딱지가 떨어져 불긋한 귀 끝을 쫑긋거리는 솔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갈 수는 있겠는데…. 내가 가서 즐겁게 놀지 못할 것 같아.”


삼월을 달래 보내고 나는 집에 남았다. 어떤 걸 택하든 미안함의 대상만 달라질 뿐, 미안하다는 감정은 그대로일 게 뻔했다. 한 사람이 빠져나간 집안은 급격한 고요로 공허했다.


[생명을 돌보고, 생명을 키우며, 생명과 함께 한다는 건 언제나 변수로 가득하고 즐거운 계획을 내려놓아야 하는 일이 빈번하단다. 그런 돌봄과 희생으로 너도 삼월이도, 그리고 나도 지금 여기 있는 것이지.]


삼월의 어머니가 보내신 메시지를 읽었다. 다정한 문장. 거가 대교를 사이에  어른의 배려가 포말처럼 뭉글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변수로 인해 계획이 수정되었으나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진료비를 계산하던 때부터 어디에도 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병의 전조가 아닌 약만 먹으면 금방 낫는 질병이란 사실에 안도했을 뿐이다. 고양이를 데려온 순간을 기점으로 인생의 계획표는 차츰 바뀌었다. 대부분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장기간 해외여행을 포기했고, 깔끔한 미니멀리즘 인테리어도 포기했다. 억울하진 않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든 것이며 버려야 하는 값보다 얻는 값이  크니 손해는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솔이  소리로 울며 바닥 여기저기 토를 했다. 병원에 다녀와 스트레스를 받은 찰나에 약까지 먹었으니 속이 좋지 않았을 터였다. 멍하니 벽을 보고  있는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을 비우지 은 게 잘한 일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에도 솔은 병원에 다녀왔다. 이틀 전부터 재채기를 하더니 그날 아침은 나를 보자마자 칭얼거리는 톤으로 ‘우엥’ 하고 울었기 때문에 나는 곧장 그 애를 안아 들었다. 이 주 연달아 같은 아이가 병원에 온 게 조금 머쓱하기도 했다. 그날은 어쩐지 아이가 기운이 없어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대기만 하고 큰 반항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콧물이 약간 있는 것 말고는 심각하지 않다며 의사 선생님은 분무 치료를 권했다. 앞, 뒤가 훤히 뚫린 투명한 박스 안에서 아이는 허옇게 뿜어져 나오는 습기가 무서워 벽에 바짝 붙어 울었다. 고양이들은 원래 다 이렇게 약하고 가여운지. 까맣고 깊은 눈동자로 바깥의 나를 보는 얼굴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서 내도록 앞을 지켰다. 돌봄이란 본디 아이의 자그마한 상처 하나만 보아도 하늘이 무너진 세상을 떠올리며 병원으로 내달리는 것일까.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닌, 하물며 어린 짐승을 보고도 이런 마음을 품는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보는 부모 심정은 어떨지 미처 헤아릴 수 없다. ‘고양이 때문에 무엇을 포기했느냐.’라는 질문보다 ‘고양이 덕분에 무엇을 얻었느냐’라는 질문에 답 하기가 쉽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던 것들은 안 해도 살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그로써 얻은 것들은 이제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것들이니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 포기라는 말은 배추 셀 때나 쓰라더니. 살면서 포기해야 할 게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괜찮다. 한참이나 남은 먼 미래에 고양이들과의 삶을 포기해야 할 순간이 아니라면 뭐든 다 괜찮다.





넥카라 한 솔
기계가 무서운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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