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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Dec 15. 2021

애정을 표현하는 각자의 방식

믿음의 증거들



솔과 풀, 망구의 경우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아. 정정한다. 솔과 망구는 사람을 좋아한다. 풀이는 우리만 좋아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알 사람은 알 거다. 이 셋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각자 다르다. 성격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으려나. 퇴근을 하고 돌아가 현관문을 열면 네 마리, 혹은 세 마리가 앞을 지키고 있다. 도어록 소리가 들리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달려 나오는 것이다. 가끔 잠에 취해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반기는 아이들도 있다. 잘 있었냐는 새삼스러운 인사를 던지면 아이들이 대답이라도 하는 양 입을 모아 합창을 한다. 어떤 날은 놀랍게도 각자의 높낮이로 울어대서 화음처럼, 하나의 노래처럼 들릴 때도 있다. 


그중 가장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풀이다. 풀은 나보다 삼월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혼자 집에 있을 때보다 삼월과 같이 있을 때 유독 말이 많다. 도대체 저 아이는 무슨 말이 저렇게 많을까 궁금해서 한때 유행하던 고양이 번역기를 사용한 적이 있다. 대부분 ‘엄마!’, ‘아파요!’, ‘나 여기 있어요!’, ‘사랑해요!’라고 해석되는 경우가 다분했으며 여기서 ‘아파요’는 실제로 아픈 게 아니었다. 자기 딴엔 엄살을 부리면서 우리의 관심을 사려고 했던 건 아닐까 싶다. 번역기가 없이 들으면 다 거기서 거기처럼 들리지만 말이다. 풀은 쭙쭙이와 꾹꾹이를 동시에 한다. 여기서 쭙쭙이란 아기 고양이가 어미젖을 빠는 행위로 우리 아이는 주로 애착 담요를 빨아 댄다. (하도 빨아서 구멍도 났다.) 꾹꾹이는 젖이 더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앞 발로 주변을 꾹꾹 누르는 행동이다. 보통 고양이가 안정을 찾고 싶을 때, 혹은 편안할 때 한다고들 하는데 우리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한다. 그것도 혼자 가서 하는 게 아니다. 꼭 우리를 부른다. ‘먀아-’ 같은 달콤한 소리 보단 ‘먀아악!’이라고 크게 소리를 친다. 사람으로 치면 그 흐름이 짜증을 낼 때와 비슷하다. 우리가 항상 말을 곱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들어주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대답을 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담요 옆에 앉아야 한다. 엉덩이도 두드려줘야 한다. 만족스러워진 아이가 벌러덩 누워 카펫을 긁다가 담요 위로 올라가 빨래를 다지듯 담요를 물고 빤다. 자그맣고 하얀 두 발이 땀나도록 축축한 이불을 눌러대고 잔잔하게 고롱고롱 소리가 들린다. 그럴 때도 계속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혹여 그렇게 관심을 돌려놓고 다른 아이를 본다면, 멈추고 다시 운다. 고양이는 기르기 쉽다고 한 사람은 누굴까. 생명을 기르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명심해야 한다. 하물며 피고 지며 정적인 식물마저도. 최근에 안 사실인데 고양이들이 자주 울거나 하는 부정적인 행동에 일일이 동조를 해주면 분리불안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라도 아기 공주님의 비위는 적당히 맞춰줘야 할 듯싶다. 


풀이 직접 말을 해 인간들을 불러 모으는 타입이라면, 망구는 다르다. 우리 집에서 과묵한 타입에 속하는 막내는 인간의 그림자를 자처한다. 화장실을 갈 때도, 바닥에 누울 때도, 요가를 할 때도 말없이 곁을 지킨다. 간혹 ‘야아-’ 하고 울기도 한다. 우리의 안부는 이마 박치기. 일명 헤드번팅으로 시작한다. 고양이의 애정 표현 중 이마를 부딪히고 뺨을 부비는 행동이 있다. 퇴근하고 망구를 만나면 눈높이를 맞추고 이마를 갖다 대 준다. 그럼 망구가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단단하고 작은 머리를 부딪힌다. 그리고 쪽쪽 소리를 내면 입술에 뺨을 비빈다. 너무 좋으면 살짝 깨물기도 해서 조심해야 한다. 이 과정은 우리 사이에 약속처럼 작용해서 그냥 지나가면 서운할 정도다. 망구는 잘 때 꼭 나와 삼월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넓게 몸을 늘리고 잔다. 대체 세로로 누워 자는 침대에 왜 혼자 가로로 누워 자는지. 자리가 부족할 때는 침대 가장자리, 우리의 다리 사이에서 잠을 청한다. 어제는 내 팔과 옆구리 사이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내 팔을 베고 잤고, 손에 쥐가 나서 뒤척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팔이 따뜻했다.


솔은 우아한 자태로 나타난다. 긴 꼬리가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일렁인다. 그 애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며 떼를 쓰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다가와 무작정 몸을 붙여오지도 않는다. 솔은 은근하다. 다른 곳에 시선이 가 있으면 뒤로 다가와 괜히 내 등에 대고 기지개를 켠다. 조막만 한 발 두 개가 내 등을 약하게 누른다. 그 작은 터치 자체가 자신이 곁에 있음을 알리는 것이고, 동시에 말을 거는 것이다. 그래도 보지 않으면 팔을 두어 번 건드린다. 이럴 때는 꼭 사람 같아서 웃음이 난다. 발 하나로 팔을 톡톡. 어디선가 ‘저기요’ 하는 말이 들릴 것 같다. 그럼 나는 소파 빈자리를 솔이 그랬듯 손바닥으로 톡톡 친다. 이리 와. 아이가 말을 이해한 듯 그 자리로 건너와 빙글 돌며 엉덩이를 들이댄다. 나는 작고 부드러운 엉덩이를 두드린다. 천장을 향해 길게 뻗은 꼬리가 잠자리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린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솔은 내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난 보던 것을 멈추고 아예 몸을 돌려 그 애와 시선을 나눈다. 겨울을 맞아 더욱 보송해진 볼을 엄지로 느긋하게 문지르면 솔이 혀를 내민다. 혓바닥에 달린 돌기가 피부를 쓸며 서걱서걱 소리를 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아이는 자신의 몸처럼 나를 정성스레 핥는다. 그 묘한 쓰다듬은 받을수록 따갑다. 그런데도 차마 애정이 어린 사포질을 말릴 수 없다. 그러다 잠이 든 적도 있다. 그들의 표현은 이토록 따스하고 안온하다.


말 대신 행동으로 온전히 마음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도 오류가 출력된다. 축적된 오해가 손 쓸 수 없이 불어나 관계가 끊어진다. 그렇게 끊어진 관계는 다시 붙거나 그 상태 그대로 흘러가버린다. 반면 고양이들은 서슴없다. 그들의 세계에는 계산이 없다. 여과되지 않은 표현들이 자유롭게 부유하며 심지어 용서는 신속하다. 그들에겐 믿음이 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 때로는 그것이 오만하다. 그럼에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우리도 믿음이 있다. 영영 그 믿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는 믿음. 형체 없는 믿음이 우리를 견고하게 만든다. 우리와 그들은 그렇게 우리만의 세계를 가꾸어 나갈 것이다. 우리가 손을 내밀면, 그들은 당연하게 뺨을 갖다 댈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당연함이 당연시될 것이다. 




*택도 우리를 믿고 사랑할 것이다. .........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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