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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Jun 20. 2022

기록: 문경, 불멍

힐링캠프라 쓰고 우대캠프라 읽는다




지난 주말 ‘불멍’이라는 것을 처음 해봤다. 불을 보며 멍하니 있기. 요즘 각광받고 있는 일종의 취미생활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을 멈추지 않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 사람들이 하나의 취미로 ‘멍 때리기’를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힐링’이란 키워드로 그에 맞는 취미를 찾는 이들이 많았다면 ‘힐링’에서 곁가지로 뻗어 나온 게 ‘멍’은 아닐까 싶다. 시대의 트렌드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의해 변화한다. 현재 우리는 무자극적인 사고가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일명 ‘힐링캠프’라는 타이틀로 진행된 이번 여행은 꽤 흡족했다. 멤버는 나와 삼월, 내 동생, 베리 삼자매 중 첫째, 둘째. 이들도 지칭할 수 있는 가명을 지어줘야 할 것 같아 각각 철, 라라, 미미 라고 칭하겠다. 라라는 나의 대학 동기이며 첫 직장을 함께 다녔다. 근무환경이나 업무, 사람들 모두 만만치 않은 곳이었기에 우리끼리의 의리가 굉장히 강했다. 나라 살림이 힘들수록 국민들이 단합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해야 하나. 중간에 내가 먼저 퇴사를 하는 바람에 이렇게 오랜 시간 연이 이어질 줄 꿈에도 몰랐다. 사람 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일종의 랜덤 게임 같다고 해야 할까. 어릴 적의 내가 ‘먼 미래에도 내 곁에 남아있을 친구’로 꼽은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알 수 없고 어떤 생각이나 기대조차 없던 이들이 지금의 내게 남았다. 아이러니다. 그중 라라는 사업 수완이 좋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한 곳에 머무르고 안정을 추구하는 나와 달리 모험심과 개척 정신이 강한 인물이라 나로서는 배울 점이 상당하다. 그를 따라 부산에 온 것이 내 생애 유일한 모험이라 한다면 그 선택으로 인해 많은 것을 얻었다. 이후에 내게 찾아올지도 모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도 덤으로. (허나 애초에 도전을 주저하며 사는 인간이라 다음 모험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한편 철과 미미는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이었다. 이 둘의 만남이 완성될 수 있던 데에는 큐피드 삼월의 공이 컸다. 철에게 미미를 소개해 주면 어떻겠느냐 내게 제안한 것도, 이 둘이 소통의 오해로 뜸을 들일 때 힌트를 넌지시 던진 것도 삼월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리하여 거듭난 애정의 형태가 오랜 시간 곱게 다듬어지길 바란다.



다녀온 곳은 문경의 용추계곡. 부산에서 차로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할 수 있었다. 운전으로 인한 고단함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계곡으로 향하는 길에 펼쳐진 한적하고 푸른 경치가 피로를 잊게 했다. 민박집과 식당을 동시에 운영하는 사장님 내외의 오리백숙은 또 어찌나 맛있던지. 때마침 추적추적 비가 내려서 야외 테이블에서 빗소리를 듣는 운치도 누릴 수 있었다. 10분 정도지만 계곡 물에 몸도 담갔던 터라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먹는 백숙은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었다. 살코기가 연하고 부드러워서 죽까지 살뜰히 흡입할 수밖에 없었다. 불멍은 숙소에서 철이 만든 떡볶이와 감자전을 야식 겸 해 먹고 난 후 이루어졌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능숙한 캠퍼인 철이 구비한 화로대에 장작을 쌓고 토치로 불을 쏘자 금방 불씨가 살아났다. 불을 두고 둥글게 둘러앉은 건 학생 시절 수련회 이후로 처음이었다. 사실, 그때 엄마 생각을 하며 눈물을 훔쳤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컴컴한 밤에 장작불을 놓고 미지근해진 청하를 홀짝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끝없이 타오르는 불길에 이따금 시린 발을 녹이며, 뜬금없이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이대는 바람에 돌아가며 노래도 불렀다. 타닥타닥. 마른나무들의 아우성과 무선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재즈, 공백을 채우는 대화. 라라가 부산을 떠나기 전 내가 그녀에게 선물한 책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내가 먼저 읽어본 책이 아니고 SNS에서 우연히 본 구절이 마음에 남아 구매해 건넨 책이었는데, 내가 본 구절은 그 책에 없었다는 말을 듣고 꽤 난감했다. -지금 보니 이슬아 작가가 낸 책이 아니라 작가가 구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수필에 포함된 글이었던 듯하다. -


 "책에 이런 말이 있었어. 무언가를 궁금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움직이게 되잖아. 호기심은 사랑의 시작이니까. 난 그제야 내 호기심의 이유를 알았어. 나는 사랑이 많아서 궁금한 것도 많았던 거야."


그 순간 그 애가 얼마나 사랑스러워 보였는지, 구태여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사랑이 많은 사람들은 참 신기하다. 특유의 다정은 어디서 생겨날까. 그들의 마음속에 넓은 연못이 있는 건 아닐까. 사랑이 퐁퐁 솟아오르는 연못. 그곳엔 연분홍 아잘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표현에 인색한 나에게 흘러왔다. 사랑. 사랑을 말하기란 어려운 일인가. 혀끝에서 몇 번이고 거르고 거르다 보면 남는 건 몇 개의 자음과 모음뿐이어서 끝내 삼키고 마는. 내게 있어 사랑이란 단어뿐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일 자체가 그랬다. 미안해. 고마워. 이러한 별거 없는 고백들에 나의 온 자존심을 내건 적도 있다. 뱉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때마침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요. 간지럼이 그렇듯이 낯간지러운 말도 참으면 안 된다. 그 어색한 부끄러움이 사랑을 윤활하게 만든다. 대낮에 해도 되고 일평생 해도 되고 꽃다발 없이 해도 되고 밥을 먹으면서 해도 되고 술 먹지 않고 해도 되고 귓불에 대고 해도 된다. 어설프고 무뚝뚝하게 해도 문제없다. 하고 나면 잠깐 화끈거리고 뜨거워질 뿐 생명에 지장이 없다."


미미가 보드라운 음성으로 문단을 읽어 내렸다. 하나의 책을 읽더라도 각자 기억하고 싶거나 공감하는 내용은 다를 것이다. 이제와 고백건대, 나는 삼월이 읽은 책을 훑어보는 걸 좋아한다. 그 애가 펜으로 성의 없이 그어놓은 문장들을 읽다 보면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문장에 왜 줄을 그었는지 유추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글자를 삼키는 형광색의, 혹은 검은 직선들은 읽는 이를 해석하는 데 큰 힌트를 준다. 미미가 읽은 문장들도 미미다웠다. 잔잔하지만 당돌한 그 애라면 그 내용에 충분히 공감했을 것이라고(그녀에 대해 아주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예상하는 바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발설과 동시에 내 숨이 꼴딱 끊어져 죽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토록 굳세게 입을 닫으려 했을까.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유영하기 위해서는 낯간지러운 말을 과감히 뱉을 용기도 필요한 거 같다.


대화를 하면서도 틈틈이 장작을 넣어 불을 유지시켜야 했는데, 번거로운 일은 철과 미미가 도맡아 해서 크게 힘을 쓰거나 귀찮은 일도 없었다. 힐링캠프라 쓰고 우대캠프라 읽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렇게 흘러간 대화들은 봄밤처럼 따뜻하고 나긋나긋했다. 밤공기에 우리의 언어가 하염없이 휘발했고, 자리는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정리되었다. 마지막 불씨가 천천히 사그라들 때, 그들 모두 말없이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즈음 하늘에 별이 밝았다. 목이 뒤로 푹 꺾이도록 별을 관찰하고 있으니 철이 편히 별을 보라며 어떤 장비를 펼쳐 주었다. 그 위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한 하늘에 반짝거리는 별의 수를 헤아리기만 해도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너무 피곤했기 때문. 이불이 절실했다. 힐링도 체력이 있어야 하는 거다. 안 그러면 평소의 나처럼 주말에 내도록 침대를 지키는 수가 있다.


그날의 새벽은 정제된 평화에 가까웠다. 내 인생에 이렇게 낭만적인 순간이 있었던가. 꽤 자주 안부가 궁금한 이들과 나눠 가진 밤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 여행지는 어디라고?




짧은 반성문: 삼월이 불멍 장비를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취미는 네 돈으로 하라며 톡 쏘아붙였다. 집에서도 사과를 했지마는,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적는다. 유난히 쪼달리는 6월이라 내 통장도, 마음도, 싸가지도 궁핍해졌나 보다. 장비는 7월에 함께 알아보자.




계곡



막걸리와 오리백숙


철(취사병 출신)이 만든 파떡볶이와 감자전. 또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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