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되려면 불가(佛家)의 개념처럼 억겁 시간의 우연과 필연이 겹치고 설켜져야 비로소 맺게 되는 결과 이리라.
한 송이 가을 국화꽃을 피워 내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다잖은가? 수십억 인구 중 그와, 그녀와 아니 그 꼬마 친구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은 그래서 신기하다 못해 신성(?)하기까지 하다.(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아닙니다. 대단합니다.)
요즘처럼 남을 신뢰하기 쉽지 않은, 불신이 팽배한 세상에서 아무리 사는 아파트가 같고 라인까지 동일해서 함께 오르게 되는 엘리베이터 안 일지라도 여전히 허물어 뜨리긴 어렵고 말고이다.먼저 인사하기는.
한데 이 꼬마 친구는 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게 벌써 서너 번은 되었으니 이미 구면이다. 처음 만났는 데도 엄마 손을 꼭 잡은 그 아이는 밝게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어린이 집 선생님을 통해 배웠을까나?'
엉겁결에 받은 기분 좋은 선물에 고마워 답례를 한다. "안녕! 우리 친구도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아요!" 엄마 아빠가, 어린이집 선생님이 가르쳐 준 데로 이렇게 저렇게 재는 일 없이 실천에 옮기는 순수가 도대체 어른인 내 곁은 언제 떠났을까? 조금 지나긴 했어도 새해 복까지 덤으로 받게 되다니.
내 머릿속엔 온통 소위 어른의 '체면이라는 꿈적도 않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세게 박혔던지. 게다가 가만히 있으면 2등이라도 하는 데 괜히 나서서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잖냐고 입 꽉 다물고 근엄(?)하게 시선 둘 곳 없어 엉뚱한 데나 두리번거리고 있는 어설픈 행색이었잖은가.
두 번째 만남은 첫 번째보다는 훨씬 부드러웠고 아는 체까지 자연스레 할 수 있었으니 어른인 내가 아이에게 배운 접근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계의 눈초리는 봄눈 녹듯 그새 사르르 녹아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 안녕! 또 만났네"
하지만 이번 역시 순수하고 맑은, 복잡하게 이해득실 계산하지 않는 꼬마 친구가 먼저였다. '참! 고치기 쉽지 않은 고약한 습관이라니.'어른이랍시고.
그래도 세 번째 만남부터는 녀석을 먼저 발견한 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괜히 내가 더 기분이 좋은 까닭을 심리학적으로는 무슨 현상이라 부르는지? 알고 싶다.
"안녕! 또 만났네. 반가워"
"안녕하세요!"
수줍은 듯 엄마 손 더 꼭 잡으며 예쁘게 대꾸하는 녀석에게 부끄럽지만 한 수 배우게 되었는데 이게 어디인가? 순수를 잃어버린 지 까마득해 고치기 쉽지 않은 데도, 회복의 기회를 선물처럼 받았으니 웬 횡재던가? 그래도 부끄러울 뿐임은 부인하기 어렵고 말고다.
도무지 '부끄러울 뿐'인 것들을 어쩌자고 쓰기 시작했을까? 그것도 번호까지 붙여 가면서 말이다. 안톤 슈낙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는 비교 불가할 만큼 많을 이 작업을 어떤 성인(聖人)의 '참회록'처럼 써 내려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