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

by 영영

물을 틀었다.

한 번에 틀지 않는다.

찬물부터.

금속이 흐르고, 파이프가 으르렁거리고, 욕조는 아직 조용하다.

김이 오르기 시작한다.

공기보다 느린 증기.

증기보다 느린 내 몸.


욕실은 노랗다.

조명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하얀 벽이 노랗고, 타일 틈도 노랗고, 내 피부마저 누렇게 번진다.

조용한 황달 같은 공간.

바디워시 병이 욕조 끝에 비스듬히 놓여 있다.

입구엔 말라붙은 거품 자국.

반쯤 말라, 반쯤 굳은 노란빛이

매달려 있다.

떨어지지 않는다.

계속,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나를 천천히 벗긴다.

표면을 하나씩 벗긴다.

말을 벗기고, 어깨를 벗기고, 오늘을 벗기고,

마지막으로 무게를 벗긴다.

무게는 늘 마지막까지 버틴다.


욕조에 들어간다.

오른발부터.

물은 뜨겁다.

생각보다 뜨겁다.

피부가 놀라고, 근육이 움찔하고, 나는 가만히 있다.

가만히 있는 것으로 저항한다.

천천히 몸을 낮춘다.

천천히가 아니라

사실은 아주 느리게,

거의 가라앉듯.

허벅지가 잠기고,

배가 잠기고,

가슴 아래로 물이 넘는다.

심장이 움찔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움찔한 채, 가만히 있다.


몸이 물에 녹아든다.

정확히는, 물이 몸에 스며든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나인지

모호해지고

불분명해지고

사라진다.


머리를 젖힌다.

머리카락이 물 위에 풀어진다.

귀에 물이 찬다.

그 순간,

‘쿵—’

‘쿵—’

심장 소리가 들린다.

밖은 멀어지고, 안은 가까워진다.

세상이 줄어들고, 내가 커진다.

아니,

내가 작아지고, 심장만 커진다.

내가 나였던 적이 있었을까?

내가 나이기 전엔 뭐였지?


양수.

양수.

양수.


나는 엄마의 뱃속에 있었다.

있었을 것이다.

기억은 없지만,

감각은 있다.

그때 들었던 심장 소리와 지금 이 심장 소리가 닮았다.

익숙한 불안,

익숙한 고요.

물속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감싼다.

나는 떠 있다.

나는 가라앉는다.

떠 있는 채로 가라앉는다.


나는 내가 되기 전으로 돌아간다.

몸도 이름도 없던 시절.

기대도 설명도 없던 시절.

사랑을 받기 전,

사랑을 요구하지 않던 시절.

나는 그때로 돌아간다.

돌아간다기보다

그때로 흘러간다.


바디워시 병이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병 입구에 매달린 노란 거품이

아직도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기로 결심한 것처럼,

버티고 있다.

기울었는데도,

무게를 알 텐데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게 나 같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

아직 다 살아보지 못한 나.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나는 물속에서 유영한다.

유영하지 않아도 유영하는 상태.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나는 떠 있다.

의지하지 않아도 나는 흘러간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태어나고 싶지도 않다.


그럼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지?


여기.

지금.

이 따뜻한, 말 없는 물속.

나를 판단하지 않는,

이 익명의 액체 안.

이 안에서,

나는 숨을 참고,

심장을 듣는다.


유영을 하자.

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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