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점 없는 문장, 울어도 된다는 허락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도서제공 #서평단 #위뷰 #위픽시리즈
우리는 정녕 우리로 존재하고, 그 이름으로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엄마 몰래 피우는 담배』를 읽는 내내 나는 이 질문을 손 안에서 굴렸다. 말로 꺼내는 순간 모양이 바뀌는 마음, 꺼내지 못해 더 커지는 마음,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가 자주 보였다.
이야기는 규리가 암 투병 중인 엄마를 돌보며 엄마 집을 오가는 동안,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하며 열린다. 편지는 죽은 이모 종순에게 온 것이고, 보낸 이는 친구 은향이다. 그 한 장이 현재의 공기를 바꾸고 과거의 시간대를 다시 배열한다. 편지가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자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조금씩 어긋난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그 어긋남은 더 또렷해진다. 거대한 이야기는 아닐지 몰라도, 틈은 충분히 크다.
이 책을 읽으며 내게 오래 남은 장면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46쪽, 유리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뇐 이야기였기에 담백하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도 엄마가 하루에 스쿼트를 삼백 개씩 한다는 부분에서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라고 고백하는 대목. 아픔은 늘 그 자체의 이름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엉뚱한 지점에서, 몸의 메모리에 닿을 때 무너진다. 책의 유리처럼 나도 그랬다. 자주 되뇌어 사소할 줄 알았던 말에서 우리는 쉬이 무너져 내린다.
책을 넘기기도 전에 같은 페이지에서 또 하나의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여기에서는 울고 싶을 때 울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해요. 난 적어도 이 안에서 척을 안 해요. 나답게 지내요.” 울어도 된다는 허락은, 의외로 어른에게 늘 늦게 도착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척”을 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아프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잘 버티는 척. 누군가의 고통을 돌보는 동안 나의 고통을 ‘관리’하는 법은 금방 익숙해지는데, 정작 울음은 서툴다. 이 책은 그 서툼을 부끄러움으로 몰지 않는다.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조용히 건넨다. 늦게 도착한 허락이라도, 도착하는 순간 여전히 유효하다.
임솔아 작가님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다. 감정을 과장해 말하지 않기에, 독자는 스스로 표정과 숨을 채워 넣게 된다. 설명이 걷힌 자리마다 여백이 흐르고, 그 여백이 마음을 건드린다. 그래서 이 책은 짧지만 무겁다. 페이지는 가볍게 넘어가는데, 장면은 오래 남는다. 작가는 “어떤 문장은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잔인하게도 희망적으로 들릴 수 있다”라고 말한다. 방점을 찍지 않으려는 태도, 매정함과 사랑을 동시에 품으려는 태도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독자는 끝내 결론을 받지 못한 채, 자기 안에서 결론을 미루게 된다. 그리고 그 유예가 잔향이 된다.
한 장면을 지나면 내 자리가 자꾸 바뀐다. 편지를 펼칠 때는 규리의 눈으로, 연락이 끊긴 사람의 소식을 들을 때는 은향의 빈자리를 따라간다. 동일시가 자리를 옮길수록 내 안의 취약함이 더 잘 보인다. 흔들림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감각이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몇 번이나 내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불러낸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불러낼 수 없는 지점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름을 불러도 닿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 남는 것이 있다면 냄새 같은 것이다. 담배 연기는 흩어지지만 냄새는 남는다. 문장은 옅어져도 냄새는 남고, 나는 다시 그 방 앞에 선다. 그때마다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에서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지? 정답은 없다. 없다는 사실이 나를 가만히 앉게 한다.
간혹 우리는 짧은 책을 가벼운 책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엄마 몰래 피우는 담배』, 그리고 이 책이 속한 시리즈인 위픽 시리즈는 짧아서 더 멀리 간다. 여백이 넓을수록 독자의 머릿속에서 이야기는 증폭되고, 책장을 덮은 뒤에야 소설이 시작되는 느낌이 온다. 내가 감당하지 못해 미뤄둔 말들이, 이 책의 문장들을 발판 삼아 조심스레 밖으로 나온다.
이 책은 작가의 말과 인터뷰까지 읽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아픔의 힘이 타인에게 스밀 때 일어나는 붕괴를 탐색하려는 태도, 방점을 일부러 찍지 않으려는 매정함과 사랑의 공존.
그 모든 것이 본문을 해설하는 대신 본문을 더 오래 살게 한다. 우리는 누구의 모습으로 이 책을 맞이할까. 아마도 읽는 동안 계속 바뀔 것이다. 그 변화가 불안할지라도, 나는 그 불안을 믿어 보기로 했다. 흔들리는 동안에만 보이는 얼굴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얼굴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이, 내게는 이 책이 가르쳐 준 가장 큰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