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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May 25. 2022

유리알 유희

The Glass Bead Game

2022년 5월 24일 화요일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존경하는 스승 음악 명인에게 묻는다. “진실이란 없는 걸까요? 진정한 궁극의 가르침이란 없는 걸까요?”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답한다. “진리는 분명 있네. 그러나 자네가 바라는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그것만 있으면 지혜로워지는 가르침'이란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 하네. 신성은 개념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안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나는 이 부분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특히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라는 부분을 조용히 되뇌었다. 그러자 ‘진리’ 대신 ‘사랑' '치유' '이해' '공감’이라는 단어를 넣어 문장을 완성하는 놀이에 빠져들었다. 예문은 아래와 같다. 


(사랑)은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치유)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이해)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공감)은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놀라운 것은 위의 어느 단어로 문장을 완성해도,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고자 했던 문맥의 흐름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았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학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첫째: 경청

둘째: 상호 존중

셋째: 자기 관리 

넷째: 유연한 끈기

다섯째: 실천하는 책임감

여섯 번째: 순수한 경외심

일곱 번째: 맑고 깊은 사유

여덟 번째: 너그러운 믿음

아홉 번째: 사랑을 위한 용기

열 번째: 수용


스승의 건강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전갈을 받고 크네히트는 음악 명인을 찾아뵙는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날들을 자연에 머물며 음악과 명상으로 일구어가고 있었다. 크네히트는 6개월 만에 마주하게 된 스승 곁에 앉아 쉼 없이 지저귄다. 자신의 고충과 깨달음에 대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번뇌에 대하여, 크네히트는 계속해서 말을 쏟아낸다. 그리고 크네히트가 한참 말을 걸고 질문을 해도 스승은 한결같이 온화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크네히트가 이 숭고한 침묵을 감당하기 힘들어하고 있을 무렵, 마침내 스승은 제자에게 짧은 한마디를 건넨다. “You are tiring yourself, Joseph.” 그리고는 자신의 가냘픈 손을 사랑하는 제자의 팔 위에 살며시 올려놓는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영혼은 고요의 강물과 하나가 되어 흐른다. 지친 크네히트의 영혼을 감싸 안아준 스승의 침묵은 사랑과 신뢰 그리고 인내가 담긴 풍요로운 침묵이었다. 


1946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된 헤르만 헤세의 마지막 소설, 작가의 12년이라는 세월이 담겨있는 <유리알 유희>는 그 여운이 깊은 작품이다. 실제로 책을 덮고 나서 밤새 뒤척이게 만들었고,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가슴이 아렸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기에 <유리알 유희>는 헤르만 헤세의 창작 세계를 아끼는 진지한 독자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책이다. 반면 서두르지 말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는 그날이 찾아올 때까지 아끼고 아꼈다가 읽으셨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만큼의 기다림이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명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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