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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Jul 30. 2022

본질과 그림자

Carl Jung

2022년 7월 29일 금요일


코로나는 나에게 우연이면서도 운명 같은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의미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여읜 후, 애도의 파도를 넘는 스톰의 곁을 지킬 수 있었던 점, 랄라가 대학 입학과 자취를 시작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점, 그리고 나에게 찾아온 독서의 풍년이었다. 다독(多讀)을 했다는 의미의 풍년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소화할 수 있는 풍요로운 시간을 가졌다는 의미의 풍년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실행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타인과의 접촉이 최소화되었고, 그 대신 산과 바다와 사막에서 시간을 보내는 호사를 누렸다. 그렇게 나는 고립의 삶을 만끽했다. 너무도 감미롭고 충만한 경험이었다.


이제 나의 달력은 또다시 여러 일정으로 채워지고 있다. 잠시 궤도를 이탈했던 일과 배움이라는 내 삶의 구성요소들도 서서히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아마도 가을 무렵에는 제법 본연의 질서를 되찾지 않을까 싶다. 가족과 친구와 사랑을 나누고, 일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자연과 교감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고, 영성을 돌보며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태어난 특권을 성의 있게 사용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에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모두 소중한 내 삶의 일부이다. 즉 나와 타인과의 관계, 나와 사회와의 관계, 나와 자연과의 관계, 나와 영혼과의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부재한 삶은 나에게 무의미하다.


“Where love rules, there is no will to power; and where power predominates, there is love lacking. The one is the shadow of the other.” - Carl Jung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일이 직업인 나에게, '인간관계에서 유심히 살펴봐야 할 점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생길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조용히 Carl Jung (1875 - 1961)이 남긴 글의 흔적을 따라가며 시간을 보낸다. 힘에 대한 욕망,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 관계를 지배하고 싶은 욕심에 대해, 융은 때로는 거대한 추상화처럼 때로는 정교한 만다라처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헤어진 이후로 융은 고독하고 혼돈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건 융 스스로가 자발적 은둔자의 삶을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위한 물리적/심리적 안전 기지를 마련하지 못했다면,  Black Book도 Red Book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공간을 사랑했고, 끊임없이 돌탑을 쌓았고, 아침에는 글을 쓰고, 언덕길을 산책했으며, 몇몇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그리고 융은 요즘 한국에서 유행 중인 Myers-Briggs Type Indicator(MBTI)의 기초가 된 Psychological Types (1921)를 저술했다. 


책과 인터뷰 자료를 통해 만나본 칼 융은 직관과 통찰력을 겸비한 위대한 심리학자였고, 노력형 예술가였으며, 사색을 즐기는 내향적 사람이었다. 그는 상실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아파했고, 그로부터 치유의 길을 모색해 나갔다. 꿈은 그에게 인생의 나침반이었으며, 고독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융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융의 다방면으로 뻗은 관심의 안테나가 여러 주제에 마음을 사로잡힌 듯 보일 수 있지만, 그의 모든 관심은 한 곳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융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웅장한 교향곡을 듣고 있는 기분이다. 융의 끈기 융의 상상력 융의 민감성 융의 상처 융의 혼돈 융의 화해의 흔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조금 더 너 자신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것이야 말로 본질로 향하는 길이라고 융이 우리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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