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는 배움
2022년 10월 19일 수요일
수요일이면 이런 문자로 안부를 묻는 친구가 있다. "How's your hump day?" 그 친구 덕분에 미국에서는 한 주의 중간에 놓인 수요일을 '낙타의 혹'에 빗대어 이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수요일의 별칭이 있는지 궁금하다. 언어에는 배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외국어를 매일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 살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단어와의 만남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내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어디서 공부 또는 일을 하고,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단어들과 만나게 된다.
랄라를 임신하고 산부인과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야 했을 때, 나는 임산부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하자 이번에는 완전 신세계의 단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서서히 아기 엄마의 언어 세상에 파묻혀버렸다. 그래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처음 몇 달간은 진짜 머리에서 쥐가 났다. 엄마가 아기를 대할 때에는 의성어나 의태어를 많이 쓰고, 대부분 짧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나의 뇌도 단조롭고 다소 과장된 발성을 하는 화법에 주파수가 맞춰서 있었던 같다. 물론 이것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지, 그 당시에는 강의를 듣고 오면 왜 두통이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리치료사 면허를 취득하고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언어장벽에 부딪혔다. 그것은 바로 십 대들의 은어, 신조어, 비속어, 통신 용어라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놨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랄라와 친구들의 꾸준한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나는 정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십 대들의 언어는 사전을 보고 공부한다거나 책을 읽어서 습득되는 게 아닌 아주 독특한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문화 활동과 사회적 교류의 영역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상황과 문맥에 맞는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다방면의 관심사를 물어보고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중 언어 가정을 대상으로 가족치료를 하는 동안에는 통역사의 역할도 병행해야 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Martin Heidegger (1889 - 1976)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상대의 처지와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이 넓고 깊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노력하지 않으면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누구를 가르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재촉하고 다그친다고 속성으로 풀 수 있는 인생의 과제도 아니다. 그래서 타인의 '존재의 집'을 들여다보기 전에, 우리는 나 자신의 '존재의 집'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언어와 존재에 대한 탐구는 모국어와 외국어의 범주를 떠나 끝이 없는 배움의 과정이다.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기도 하고 동시에 남을 알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와 남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우리라는 한 울타리에서 새 집을 짓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와 나를 정확히 구분하기 위해 더 높고 더 두터운 담장을 집과 집 사이에 쌓아 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다양한 언어와 존재가 만나 우리는 누군가의 가족이 되기도 하고 벗이 되기도 하고 스승이 되기도 한다.
하이데거의 생각 - 언어 - 존재로 이어지는 사유의 세계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영문본 <Letter on Humanism>의 일부를 첨부해본다.
To accomplish means to unfold something into the fullness of its essence, to lead it forth into this fullness. Therefore only what already is can really be accomplished. But what "is" above all is being. Thinking accomplishes the relations of being to the essence of the human being. It does not make or cause the relation. Thinking brings this relation to being solely as something handed over to thought itself from being. Such offering consists in the fact that in thinking being comes to language.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In its home human beings dwell. Those who think and those who create with words are the guardians of this home. Their guardianship accomplishes the manifestation of being insofar as they bring this manifestation to language and preserve it in language through their say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