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움

미니멀리즘

by Rainsonata

2019년 1월 29일


이병위사(以病爲師)를 풀어 말하면 “병을 스승으로 삼아라”는 뜻이다. 어느 선지식의 말씀에 나는 몸이 아프면 드러누워 ‘이병위사’를 되뇌는 버릇이 생겼다. 덕분에 심신이 아플수록 입은 다물어야 통증이 완화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작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이번에는 내 몸이 아닌 우리 집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집 몸살은 누수가 원인이었다. 정체불명의 물은 싱크대를 망가뜨렸고, 그 물은 무서운 속도로 아래로 스며들어 주방의 마룻바닥을 활처럼 휘어놓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식탁이 놓인 곳으로까지 번져 들어왔다. 급기야 요리나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서면 축축함과 악취 때문에 1층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나는 곧바로 우리 집 욕실 공사를 맡아주었던 분께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이미 큰 공사를 맡고 있어서, 바로 부엌 공사를 시작할 수 없으니 12월 말까지 기다려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그 후에 몇 번 더 부탁을 드렸고, 담당자는 언제까지 공사를 끝낼지 확답은 줄 수 없지만, 시간이 될 때마다 찾아가서 부엌 공사를 조금씩 하는 조건이어도 괜찮다면 일을 맡겠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일을 시작해 준다는 담당자가 참으로 고마웠고, 더디더라도 지금의 카오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모든 일에 순서가 있듯이, 부엌 공사도 하나부터 열까지 순서에 맞게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내려진 과제는 현재 부엌에 있는 싱크대, 수납장, 저장고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어 공사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 놓아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부엌 공사의 여정은 약 두 달간 이어졌고, 드디어 새해를 맞아 우리 집 주방은 깔끔하고 본질에 충실한 효율적인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병위사’의 가르침이 반드시 사람의 몸에 깃든 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부엌이 앓는 모습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우리 집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주방을 통째로 드러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자, 나는 부엌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에 집중하게 되었다. 정갈히 음식을 만들고 치우고,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손님이 오면 편안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는 곳. 그렇게 부엌의 의미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나니, 새로운 주방에 어떤 물건을 들여놓을 것인가에 대한 결정 또한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우선 나는 버려야 할 물건과 계속 사용할 수 있는 물건,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물건, 아직은 버리거나 남과 나누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물건, 이렇게 세 분류로 살림살이를 나누었고, 선별이 끝나면 바로 처분하거나, 필요한 곳으로 보내거나, 적당한 장소에 정리해 놓았다.


지난해 봄, 군더더기 없는 삶에 대한 글을 남긴 기억이 있다. 그 무렵 나는 물건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몸의 군살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비워가는 연습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된 크고 작은 ‘비움’의 연습을 통해 나는 비워낼수록 충만해지는 삶의 기쁨과, ‘비움’ 속에 '채움'이 있고 채워질 때 자연스럽게 비울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서서히 내 주변의 물건들뿐만 아니라 잡다한 생각들과 뒤엉킨 인간관계도 자연스럽게 정돈되어 가기 시작했고, 삶의 우선순위도 질서를 찾았다.


지금 해야 하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하는 말, 손을 내밀어야 할 때와 뻗은 손을 거두어 드려야 할 때, 그렇게 나와 가족 사이, 나와 타인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만들어졌다. ‘비움’과 함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그러자 ‘쉼’이 일상 속에 뿌리를 내렸다. 물건을 선별하고 주변 정리를 하는 동안, 이렇게 좋은 ‘비움’을 왜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준비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충분히'를 알아차린 후에야 비로소 '비움'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과 밖 모든 영역에서 비움의 실천은 지속되고 있다.

keyword
이전 17화언어와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