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사
잔인하지만 따뜻한, 아빠와의 마지막 인사
오전 5시쯤 눈이 떠졌다. 엄마와 별말 없이 씻고, 필요한 물건을 간단하게 챙겨 친정을 나섰다. 집에 들러 남편의 부모님께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전하고 엄마, 남편과 함께 아빠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과 이어진 병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장례식장 근처 주민센터에서 장례사님이 요청한 서류도 발급받았다. 자연스럽게 커피를 사서 들고 병원 주차장과 이어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아빠는 이 세상에 없는데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아빠의 세상은 무너졌지만 남은 사람들의 세상은 여전하다. 나는 서글펐다가 괜찮았다가를 반복하며 나와 비슷한 상실감을 느낄 언니가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전 10시 즈음 장례식장 화면에 아빠의 사진이 떴다. 언니와 내가 고심해서 고른 사진이었다. 나는 은은한 웃음의 사진을 골랐지만 언니는 활짝 웃는 아빠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고 했다. 멀리에서라도 의견을 보태고 싶을지 모르는 언니의 최종 선택을 따랐다.
빈소 안에는 영정사진도 마련돼 있었다. 오른쪽과 왼쪽에는 검은 줄이 그어져 있고, 아빠의 이름 앞에는 "故"라는 한자가 붙었다.
믿을 수가 없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 한자를 수도 없이 봤지만 우리 아빠 이름 앞에 새겨질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적어도 우리에게 10년, 혹은 20년이 더 남았을 거라 믿었다.
아빠의 흑색종암 재발 소식을 듣고도 그랬다.
뇌전증이 함께 와서 뇌의 붓기가 잘 가라앉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아빠와 이렇게 빨리 이별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빠, 나는 이제 준비가 됐어요, 편한 마음으로 떠나셨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을 속으로만 삭이며 견디던 순간이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11시가 되기 전부터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엄마의 가족과 친척들이 광양에서도 왔고, 너무 오래간만이라 얼굴을 한 번에 알아보기 힘든 사촌들도 왔다. 어렸을 때는 자주 만나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함께 뛰어놀았던 사촌들이었지만 각자 자신의 삶을 살면서 소원해진 친척들도 조문 행렬에 합류했다.
나 역시 소중한 모든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려고 했다. 어느 시점에는 자주 만나고 친했지만 소원해진 친구들에게도 부고 안내를 보냈다. 누구에게까지 이 소식을 알려야 할지 깊이 고민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나고 보고 싶은 사람은 바로 이 순간 떠오를 거라는 내 촉을 믿었다.
아빠 장례식장에 온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사의 인사도 전하고 싶었지만 조문객이 많아진 시간에는 그것조차 버거웠다. 아빠와 엄마를 이어줬다는 추억 이야기를 꺼내는 아빠의 먼 친척 분이 아빠의 젊었던 시절을 얘기할 때에는 나도 옆에서 펑펑 울었다. 친한 친구가 이 시점에 나타나면 나는 어쩔 줄을 몰라 대성통곡했다. 항아리에 든 국화를 꺼내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 놓고 가만히 인사를 하는 사람들 옆에서는 나도 조용히 눈을 감고 아빠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 바로 갈게”
오후 6시쯤 언니 가족이 공항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빠의 장례식 첫날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기다리던 언니가 왔고, 많은 친구들과 친척, 지인들이 아빠의 마지막 길을 외롭지 않게 지켜줬다. 마지막까지 남아준 사람들과는 11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감사했다.
언니와 형부는 11시가 되기 전 형부의 어머니댁으로 갔고, 엄마와 삼촌들과 이모, 엄마의 절친 이모는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엄마와 함께 엄마집으로 향했다.
12시쯤, 텅 빈 빈소에 남편과 단 둘이 남아 마지막 정리를 하고 나니, 남은 자리가 모두 슬픔과 공허함으로 채워졌다. 나는 당시의 감정을 그대로 남기고 싶어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날은 정신이 몽롱해져서 이제와 기억을 끄집어내려 하니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하다. 내가 기억을 못 할까 봐 브런치에 글을 적었지. 얼른 브런치에 적었던 그날의 글을 펼쳐본다.
장례식 둘째 날의 가장 큰 일은 입관이다. 아빠는 장례사님들 덕분에 말끔한 얼굴을 하고, 수의까지 잘 차려입고 반듯하게 누워계셨다.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날이니까. 슬프고 눈물이 나도 최대한 아빠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에는 최대한 하고 싶었던 말을 잘 전하려고 노력했다.
내 아빠로 40년 넘게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성실하게 잘 살아줘서 너무 감사했다고,
살가운 딸이 아니었어서 미안했다고,
사랑한다고,
아빠는 가족들에게 충분히 사랑받았으니 이제 아프지 말고 편안하게 잠드셨으면 좋겠다고,
정성스럽게 염이 끝나고, 아빠가 관 속으로 들어갔다.
언니가 관에 아빠의 이름을 적었다.
이렇게 입관 절차가 모두 마무리됐다.
시간은 또다시 우리를 빈소로 데려다 놓는다. 둘째 날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잘도 흘러간다. 또 저녁이 오고, 아침도 온다. 그렇게 발인 날 아침도 왔다. 빈소를 정리하고, 아빠의 관을 따라 리무진에 올랐다. 리무진 뒤로 아빠의 마지막 길을 함께해 줄 사람들이 탄 버스가 따라온다. 화장터 도착했는데도 아빠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아빠의 관이 화로에 들어갈 순서가 될 때까지 대기실에서 가족, 친지, 부모님의 지인들과 기다린다.
"우리 아빠, 행복했을까?"
"가족끼리 같이 살면서, 어렸을 때 좋았지 뭐"
고모의 둘째 아들은 아빠보다 다섯 살 정도 어리다. 할머니가 아빠를 마흔이 넘어 낳았고, 고모는 첫째라 아빠보다 스무 살은 많았기 때문이다. 분명 어린 시절 다 같이 모여 살며 아빠에게도 친구 같은 조카가 되어줬을 사람이었다. 내게도 인정 많고, 마음 여리고, 따뜻한 오빠였다. 오빠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의 나이와 외관을 가졌어도 그랬다.
"뭐가 그렇게 좋았어?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아빠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싫지 않았어?"
"옛날엔 다 그랬지 뭐. 며느리랑 시어머니가 아이를 같이 낳아서 며느리가 시동생한테도 젖을 먹이고 그랬어"
"웩. 그게 뭐야. 끔직해"
아빠는 몇 시간 뒤 한 줌의 가루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터였다. 이제 내게는 아무런 얘기도 해 줄 수 없다. 내가 아빠를 불러도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을 터였다. 이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아빠의 과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어야 한다. 내가 아빠를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는지도 당최 모를 일이라 누구한테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빠, 안녕,
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