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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성장러 김양 Jul 13. 2024

다시, 주택 분양 업무

시공회사에서도 시행사와 같은 일을 한다고요?


부동산 컨설팅 업무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해서 결과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제 적성에는 잘 맞았어요.

하지만 당시 미국 대학원 지원을 마친 상태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컨설팅 회사에서 사측과 연봉 협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1월 말, 과감하게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미국 대학원 합격 소식은 듣지도 못한 상태였지만 만약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면 충분히 쉬는 것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래도 미국 대학원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이렇게 몇 달을 수입 없이 놀아도 괜찮을까? 걱정이 됐다가,

왔다 갔다는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와중에 “호반건설”의 경력사원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고요.

저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고, 2월 말에 미국 대학원 합격 소식과 함께 호반건설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하냐는 말에 쉽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최대한 입사일을 미뤄달라고 요청했어요.

3월 중순, 미국 대학원 입학을 반 이상 포기한 상태에서 호반건설에 입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물론 나머지 반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 두었지만요.


호반건설 분양팀에서 담당했던 일은 결과적으로 신영 분양관리팀에서 했던 일과 유사했습니다. 입주자 모집공고, 분양 계약서 작성 및 수분양자 관리 차원에서 그랬어요. 추가된 업무가 있다면 주간, 월간 단위로 분양 현황을 보고하는 일이었는데 해당 보고서 작성이 분양 현장과 분양 예정 현장, 미분양 현장 등을 한눈에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업무를 할 때 현장 하나하나에만 집중하는 마인드가 강했는데 어느새 회사에서 진행하는 전체 프로젝트를 보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나무만 보다 숲도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우리 회사에서 이렇게나 많은 물량의 주택 사업을 진행하고 있구나, 하는 자부심도 생겼어요.  




당시 호반건설은 판교에 아브뉴프랑을 성공적으로 오픈하고 임대형으로 상업시설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리테일팀도 따로 있었어요. 현재 판교 아브뉴프랑은 분양형 상가로 전환되었고, 판교에 현대백화점이 들어오면서 예전에 비해 인기가 많이 시들해졌습니다. 임대형 상가는 하나의 임대인이 원하는 브랜드를 넣을 수 있어 임대인의 의도대로 상가 컨셉을 만들어갈 수 있기에 초기 브랜드 감이 좋았어요. 판교에서 거주하거나 근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브뉴프랑에서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할 정도였죠. 당시 판교에는 현대백화점도 입점하기 전이라 아파트 가구수 대비 리테일 비중이 낮은 편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분양형 상가는 개별로 분양받은 다수의 임대인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임차인을 단지 컨셉과 상관없이 입점시키기 때문에 전체 조화가 깨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아브뉴프랑은 초기에 호반건설이 하나의 임대인이었다가 분양형 상가로 전환하면서 이런 단지 전체의 컨셉이 깨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호반건설에서 신영에서 하던 일과 비슷한 일을 맡았지만 직급, 급여, 근무 환경 등의 조건에서 모두 만족했습니다. 특히 당시 CEO님의 사업추진능력을 진심으로  본받고 싶었어요. 신입/경력사원 교육 때 CEO님이 강연을 하셨는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부분에서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아파트 평면을 입주민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분양 방식 역시 회사와 수분양자가 윈윈 할 수 있는 장기임대 형태로 도입한 현장까지 있었어요.

광교의 호반가든하임은 전체 남향 혹은 남동향으로 배치하고, 선호도가 낮은 1층의 평면을 복층으로 특화하는 등 어떻게 하면 분양성을 높일 수 있는지 까지, 사업을 할 때 큰 틀에서 구상하고 계획을 실제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유능한 분이셨죠.

대부분의 시공사는 모든 현장에 충실하지만 특히 심혈을 기울이는 현장이 있습니다. 당시 호반에서는 광교호반가든하임이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광교의 타운하우스를 떠올릴 때마다 CEO님이 이 현장에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진심을 떠올립니다. 제가 광교에 살게 된다면 가장 거주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고요.


저는 호반건설을 더 다니고 싶었습니다. 능력 있는 리더가 있는 집단에서 일을 더 배우고 싶었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가 계속 직장을 다니면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제 발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가장 큰 기회비용은 해외살이와 석사학위였는데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미국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준비했던 GRE, 토플, 학업 계획서와 추천서를 받으러 다녔던 일까지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죠.

저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면 안정적이고 편한 일보다 수고와 실패가 따를지 언정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보다 겪어보고 나서 하는 후회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결정해야 되는 시점이 왔을 때 과감하게 “미국 대학원”을 선택했어요.

회사에 퇴직 의사를 밝히고 나니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CEO께서 00씨를 좋게 보셨는지 1년만 더 다니면 재단에서 장학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준다고 하는데 생각해 보겠어요? 원한다면 더 다니는 1년 동안 원하는 부서로 이동시켜 주신대요”

“네?”


너무 솔깃한 제안이었어요. 저는 개발팀이나 상업팀에서 꼭 한 번 근무해보고 싶었거든요. 부모님 도움 없이 제가 벌어 놓은 돈으로 유학을 할 생각이었기에 재정적인 지원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오히려 두 팔 벌려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엎드려 반겨야 할 일이었죠. 학비와 생활비 걱정에 대학원을 지원할 때에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국립학교에만 지원했고, 그중에서 가장 상위권 학교의 입학을 결정한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1년을 더 기다리기에 제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요. 겨우 서른이었는데도 말이죠. 당시에는 그 나이가 어찌나 많게 느껴지던지요. 이미 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전달한 상황이라 내년에 가야 한다면 다시 지원 절차를 밟아야 했고, 재합격도 보장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감사 의사를 전달하고 거절했는데 지금이라면 다소 뻔뻔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지금 지원해 주시면 안 되나요? 학업을 마치고 꼭 호반으로 복귀하겠습니다. 그때 더 잘 써먹으실 수 있도록 더 성장해서 오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어렸고, 경험이 부족했고, 협상능력은 더더욱 갖추지 못한 풋내기였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황금같이 찾아온 재정적 지원을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 버렸어요. 경영진이 협상 테이블을 잘 차려 주셨는데도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을 냅다 주워 먹지 못한 거죠. 유학시절 내내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이 순간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미국 대학원 관련 추가 설명

미국 대학원은 학업을 안정적으로 마칠 수 있는 재정적 지원과 학교에 기여하는 기부금 입학도 장려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만약 국가나 기업에서 재정적으로 지원해 준다는 보장이 있다면 이를 학업계획서에 포함시켜 자신을 어필할 기회로 삼을 수 있어요.

“나는 재정적 지원을 받을 만큼 능력이 있다”

“나는 안정적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이니까요.

혹시 미국 대학원에 지원할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 대학원에 지원할 때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고, 한국에 다시 돌아올 계획이라면 한국에서도 유명한 아이비리그 사립학교에 지원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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