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에게 내가 뱉은 첫 베트남 어이다. 나는 그때 생판 남인 택시 기사 앞에서 필사적으로 나의 절대음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기사는 한숨만 쉬며 “머라하노?”(아마도 이런 말이었겠지.)라고 말하듯 찡그리며 짜증을 낼 뿐이었다. 베트남어가 6개의 성조가 있다는 걸 책으로만 조금 끄적댄 나였다. 그렇게 나의 베트남어는 와르르 무너졌다.
그날 나와 아이들은 새로 찾은 영어 어학원에 레벨 테스트를 받으러 가기로 했다. 그날은 학원 원어민 선생님의 시간이 여의치 않아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겨우 예약을 했다. 그런데 우리는 택시를 탄 채로 길을 잃고 만 것이다. 분명히 호텔 리셉션에서 불러준 콜택시였고 나는 출발 전부터 구글 맵에 있는 주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사의 잘못인지 나의 어두운 길눈 때문인지 전혀 모르는 4차선 대로에서 우린 갇혀버렸다. 분명 낮에 학원까지 답사를 끝냈다. 걸어서 1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기사가 가는 길을 잠자코 가다간 호떠이를 벗어나 하노이의 반대편까지 달릴 기세였다. 다급해진 나는 스톱을 외쳤다. 아무리 영어를 못하는 기사라도 이건 알아듣겠지. 그리고 여긴 아니라고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려는데, 정말 영어는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기다려 달라는 말인 쪄어chờ(끝을 내려 발음)를 말한다는 게, 성조가 틀렸는지 통하지 않았다. 기사는 화를 내듯 뒷좌석을 돌아봤다. 그러자 나의 절대 음감을 총동원해 온갖 억양에 대입하기 시작했다. “개 chó 시장 chợ 주세요 cho! 주세요 cho! 주세요 cho.” 만 반복하는 꼴이었다. 나는 베트남어의 6개의 성조를 쪼개고 쪼개 없는 성조까지 더해 12개로 만들 기세였다. cho(쪼)라고 다 같은 cho(쪼)가 아니었다. 성조가 있다는 것만 알고 정확한 발음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여러 버전으로 시도를 했다. 택시 기사는 그저 얼른 우리를 내려주고 떠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기가 차다는 듯 손짓으로 당장 내리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급기야 화를 내며 문을 열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아이들과 잡고 있던 양손에서 강한 압이 느껴졌다.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 내 손을 터질 듯이 꽉 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대로 더 타고 있어도 분위기만 더 험악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아이들과 택시에서 내려야 했다. 내리고 보니 우리는 4차선 대로 중앙에 있었다. 그렇게 그 택시는 매정하게 아이 둘 딸린 아줌마를 길 위에 버리고 가버렸다.
베트남어에는 무려6개의 성조가 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러다 하노이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체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베트남의 도로는 아직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곳도 많고 가로수가 한국처럼 촘촘하게 있지도 않다. 따라서 길 위에 보행자는 우리뿐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쌩쌩 달리는 차들과 오토바이들뿐이었다.
“쭌이 쩡이, 걱정하지 마.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라 치안이 좋다네. 엄마만 믿고 따라온 나. 분명히 낮에는 걸어서도 왔거든. 그니까 금방 도착할끼라. 엄마 믿제?”
“맞다, 엄마. 엄마가 걸어서 갈 정도면 가깝지. 밤이라서 안 보이는 거다.”
나는 이성을 잃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주절주절 말을 하고 있었다. 딱히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허공에다 대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상태를 감지했을까. 아들 쭌이는 톤을 높이며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맞장구를 쳤다. 그런 반면 만 일곱 살에 난데없는 공포를 겪게 된 쩡이는 겁에 질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숨을 죽인 채, 나의 손을 있는 힘껏 꼭 잡고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4차선의 도로를 걷다 보니 길 옆으로 계단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계단을 내려가니 다행히 제대로 된 인도가 있었다. 아이들과 나는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벗어나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로수가 없기는 인도도 마찬가지였다. 건물들을 따라선 길은 끝없는 암흑이었다. 한 번씩 삐걱거리는 문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소리가 우리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헨델과 그레텔이 숲 속을 헤맬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한참을 걷다 보니 ‘끼익’ 하고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백발의 할머니가 나왔다. “엄마, 겁나.” 쩡이의 숨죽인 한마디. 쭌이도 이번에는 말이 없었다. 나는 애써 시선을 떨군 채,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영어학원이라고 해서 데스크 직원이 모두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계속 설명에 설명을 더한 끝에 어렵게 영어가 가능한 직원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택시 기사가 우리를 길 위에 내려주고 갔는데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노라고. 그러자 직원은 다급한 목소리로 그 자리에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10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서 하얀 소형차가 비상등을 깜박이며 오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 달려오는 그 차에서 아폴로 직원의 명찰과 유니폼을 입은 남자 직원이 내렸다. 쭌이와 쩡이는 마치 백마를 타고 달려온 기사를 본 듯 기뻐했다. 나 또한 하마터면 얼싸안고 우는 추태를 부릴 뻔했다. 나는 차에 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놓은 두 손은 땀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렇게 한밤의 공포 택시는 베트남어를 향한 나의 학구열에 불을 짚였다. 나는 그 뒤로 다시는 우리 아이들을 겁에 떨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베트남어를 조금만 할 수 있었다면 아이들이 공포에 떠는 일은 없었었겠지.'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집에서 왕복 1시간은 족히 걸리는 베트남어 어학원으로 달려갔다.
사실 내가 그때 Grab Taxi만 알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다. 그랩 택시의 존재 또한 몇 주 뒤 한 티파티에 갔다가 만난 한국인들에게 들은 것이다. 우버와 같다고 볼 수 있는 그랩 택시는 앱만 다운로드하면 간단하게 이용 가능하다. 목적지만 입력하면 내 위치에서 가까운 곳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응답을 준다. 그리고 차종과 번호가 포함된 기사의 프로필이 나에게 전송되어 오면 기사가 픽업을 오기만 기다렸다가 승차하면 끝이다. 고로 베트남어를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 나는 베트남어 연습을 위해 택시 기사들과 대화를 아주 많이 했지만, 보통 기사들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영어를 잘하는 기사는 아주 드물고 오히려 외국인 승객들은 조용하게 목적지까지 향하길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랩 택시는 앱으로 간단하게 사용이 가능하다.
나와 아이들을 4차선에 버리고 간 택시 기사는 손에 꼽힐 정도로 매우 드물고 야박한 경우다. 나는 하노이에서 좋은 택시를 경험한 적도 꽤 많다.
한 번은 내가 '프랑스 문화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랩 택시의 앱에 목적지를 프랑스 문화원으로 입력했다. 기사는 나를 보고 "Bonjour."(봉쥬흐; 안녕하세요.) 하며 불어로 말을 거는 게 아닌가. 그는 프랑스는 아니지만 프랑코포니(Franchphonie ; 프랑스어를 모국어나 행정 언어로 쓰는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기구)의 한 나라인 세네갈에서 3년을 일하고 왔다고 했다. 베트남어나 영어가 아닌 제3 국의 언어인 불어로 대화를 하자니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는 내가 프랑스 문화원으로 향하는 손님인 걸 알고 내심 반가워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20여 분의 시간을 불어로 대화했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나보다 먼저 내려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Au revoir."(오 흐브아; 잘 가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났다. 왠지 기차여행을 다녀온 듯 설렘 가득한 하루였다.
어디 그뿐인가. 부산에서도 듣지 못한 감미로운 케이 팝을 선물해 준 택시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부산에서 나를 보러 와준 친언니와 함께였다. 아이들은 남편이 봐주고 단둘이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렇게 탄 그랩 택시는 우리가 타자 바로 케이 팝을 틀어주었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어느 가게에서나 들을 수 있는 블랙핑크나 방탄소년단이 아니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아주 감미로운 음악이었다. 언니와 나는 네이버를 동원해 그 노래의 제목을 알아내려 했다. 언니와 나는 서로 번갈아가며 스피커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기사의 기대치 못한 음악 선물에 감동한 우리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우리에게 수줍은 미소만 지은 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아직도 언니와 나는 그날의 택시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 기억 속에 그날 무슨 호텔에서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는 이미 희미해져 버렸다. 하지만 그날 택시에서의 시간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물론 하노이 택시는 운이 나쁘면 길 위의 롤러코스터와 함께 임신 초기의 입덧 증상까지 덤으로 주기도 한다. 심지어 미세먼지 지수가 최악인 날에도 창문을 활짝 열고 가는 기사도 더러 있다. 그! 래! 서! 나는 베트남어를 배웠고 기사들이 어떻게 하면 나를 더 조심해 주는지 배웠다. 베트남어를 몰라도 손을 코에 갖다 댄다던가 어깨를 으쓱거리는 등의 간단한 제스처만으로도 무례하지 않게 뜻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도 그동안 내가 하노이 택시를 타며 익힌 노하우라면 노하우다. 무엇이든 경험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하노이로 온 이상 당신은 택시 기사가 없이는 이동할 수가 없다. 하노이는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는 운전자와 오토바이가 대부분 아니 90프로 이상이기에 외국인들은 운전은 엄두도 못 낸다. 목숨 걸고 운전할 용기가 있는 자가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