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평생 밥 먹고 산 나에게 피카소는 넘사벽을 넘어 경외의 대상이다. 돈이 된다 싶으면 똑같은 스타일의 그림으로 평생을 우려먹는 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나 역시 20년을 똑같은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았다.) 그는 끊임없는 혁신을 거치고 거쳐 마지막 순간까지 새로움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고자 애쓰던 사람이다. 쉽지 않다를 넘어 피카소라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겁 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해 온 그의 작품들에는 미술사에 길이 기억될 명작들이 수두룩하다. 또한 피카소를 생각하면 마티스와의 경쟁 구도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 천재에게도 신경이 쓰이는 라이벌이 있었다니 재미있기도 했다.
나는 피카소를 혁신의 아이콘으로는 존경했지만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비켜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울해지고 심각해지고 되려 행복했던 내 마음이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아서다. 그리고 싶은 것은 뭐든지 너무나 잘 그리는 대가의 솜씨였지만 슬픔과 좌절, 비통함, 괴기스러움, 등등이 난무했다. 화가 역시 그렇게 뒤틀린 사람인 줄 알았다. 특히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던 점을 그의 여성 편력이 대신 말해주는 듯해서 기분이 언짢았다.
고백컨데 파리의 국립 피카소 미술관에서 한 점의 작품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가 얼마나 전쟁을 싫어했던 평화주의자였다는 점 또한 간과했었다. 이번 방문에서 그에 대하여 조금 더 알게 되었고 그림도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괜한 오해는 무지에서 나온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값진 시간이었다
미슬관을 들어서면 젤 아래층의 특별 전시실을 제외하고 그림들은 이층부터 전시되어 있었다. 특이했던 점은 작품 세계가 연대별/사조별로 정리되었다는 점. 역시 예술가의 이름이 붙은 곳이어서 그런지 한두 점 전시해 놓은 일반 미술관 과는 달리 컬렉션이 방대해서 가능한 듯했다. 약 오천 점이 전시되어 있었고 아카이브까지 합하면 약 일만 점 정도를 소장하고 있다 한다.
한층 한층 올라갈수록 새로운 세계가 나타났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이게 끝인가 싶으면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갔던 이상한 세상 같았다. 그중 많은 작품들은 내가 직접 보았던 뉴욕 모마나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엘에이 LACMA 등을 포함한 여러 미술관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연상시켰다. 약간의 변형을 가미한 다른 버전들.
어디서 본 것과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수도 없이 많은 작품을 끝도 없이 보다 갑자기 한 곳에 이르렀을 때 가슴이 “쿵!” 하며 내려앉았다.
“한국전쟁의 학살“
난 오팔 년 생으로 군부독재시대에 자랐다. 박통이 내가 다섯 살 때 대통령이 되어 대학교 삼 학년 때까지 권좌에 있었으니 어느 정도는 군부 독재에 세뇌도 되었던 불행한 세대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어렸을 적에 피카소의 전시회를 한국에서 열려고 했으나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작가가 1973년에 타계를 했으니 아마도 내가 중학생 때였으리라. 이유는 피카소에겐 아래의 그림을 선보이는 것이 한국 전시의 전제 조건이었는데 군부독재 정부에서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당시 내 생각은 “당대 최고의 화가인 피카소라는 사람이 나쁜 공산당 아닌가?“ 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뇌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치가 떨린다. (이 그림은 코비드 기간 중이었던 2021년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으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되었다.)
“이 그림이 여기 있었구나!”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돌아 나왔다. 가슴이 메었다. 그림의 주제가 내 나라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라더니 정말이네. 화폭 안에 벌거벗은 채로 엄마 뒤에 반쯤 숨은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남 같지 않았다.
피카소의 오만점이 넘는 방대한 컬렉션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게르니카”라고들 한다. 이는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과 파시즘 이태리의 폭격으로 파괴된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있는 도시 게르니카의 처절했던 모습을 피카소가 거대한 화폭에 큐비즘과 초현실주의적 화풍으로 담은 대작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반전작품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런 사실을 미술사 시간에 다 배웠음에도 어째서인지 그가 유명한 반전화가라는 점을 마음에 새기지 못했다. 어쩌면 작품을 실제로 보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를 처음부터 좋지 않은 보았던 선입감 때문일까? 게르니카 이후, 한국전쟁을 모티브로 해서 민간인 학살장면을 그렸다는 것도 그 그림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도 책이나 인터넷으로 본 적은 있었지만 막상 내 눈앞에 있는 그림은 너무나 다르게 보였다. 화가가 얼마나 전쟁을 혐오하는지 그의 날 것 같은 감정이 확실히 전해져 왔다.
그제야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비둘기 시리즈가 생각났다. 리토그래프로 제작된 올리브 이파리를 입에 문 비둘기는 195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평화옹호주의자 협회의 이벤트의 포스터 제작을 위해 기증한 작품이었다 한다. 또한 이 비둘기는 젊었을 때는 으르렁거리던 라이벌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둘도 없는 친구로 남았던 마티스를 상징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티스는 나이가 들어 이혼을 하고 아이들도 장성해서 집을 떠나고 혼자되었을 적에 프랑스 남부 니스 근처의 아파트에 살며 적적함을 달래려고 작업실에서 이국적인 비둘기들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대작이며 커미션으로 수주한 벤스의 교회당 컷아웃 작품을 만들게 되면서 원래의 화실을 싹 다 치워야 했는데 이때 그의 귀한 비둘기들을 피카소에게 주었다 한다. 비둘기가 피카소의 그림에 등장하게 되는 연유이기도 하다.
피카소와 마티스의 라이벌 관계는 미술사에서도 유명하다. 그러나 젊었을 땐 그렇게도 서로를 질투했던 두 대가가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형제이상으로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위의 오른쪽과 아래 그림은 마티스가 죽고 나서 피키소가 그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화풍을 따라 그린 작품들로 특히 두 마리의 비둘기가 창문 앞 난간에 앉아 있는 장면은 둘의 우정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피카소의 그 많은 어둡고, 우울하고, 뒤틀리고, 심술굿은 그림들 중에서 비둘기 시리즈는 왜 그렇게 행복하고 아름다왔는지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전시회를 보고 나오는 길에 북스토어에 들려 피카소의 비둘기가 그려진 마그넷을 하나 샀다. 어릴 적 닫힌 마음으로 평가했던 피카소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어 기뻤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평화주의자였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마티스의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였다.
이제부터는 존경하는 혁신의 아이콘으로만이 아니라 대가로서의 그의 그림도 조금은 더 좋아할 것 같다.
추신: 뮤지엄에서 보았던 피카소가 마티스를 추모하며 그렸던 그림. 그들의 라이벌 관계만 알고 깊은 우정을 모르고 보았을 때라 깜짝 놀랐다. 이 글을 쓰면서 두 대가의 브로멘스에 대하여 알게 되어 기쁘다. 비둘기 스토리까지 더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