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는 나이가 가늠 안 되는 매력이 철철 넘치는 프렌치우먼이었다. 마크는 며칠 전 우연한 모임에서 C를 첨 만났는데 그녀의 얼굴과 자태가 너무 맘에 들어 다짜고짜 우리와 같이 사진작업을 하겠냐고 했더니 원래 직업이 모델이라고 했다면서 우리에게 씩 웃으며 그녀를 소개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영어가 유창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아마도 다른 친구들도 그런 생각을 할 듯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제부터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크와 사진을 찍을 때는 일종의 정해진 규칙이 있다. 우선 모든 사진 촬영의 진행은 마크의 프로듀서인 세이지가 맡는다. 서른 살이 갓 넘은 그녀는 벌써 십여 년 경력의 프로듀서로 마크와 찰떡궁합을 맞추고 있다. 그녀는 모델섭외부터 시작해 모델의 의상, 장소, 시간등을 마크와 협의한 후 보통 일주일 전쯤 우리에게 전체 워크숍의 일정과 함께 이멜을 보내준다. 그 후, 모든 것은 그녀가 보낸 이멜에 적힌 일정에 맞추어 진행되는데 그중 모델 촬영은 시간과 장소만 알고 있을 뿐 참가자들은 누가 모델인지 뭘 입고 나오는지,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날씨가 어떤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채로 촬영에 참가한다. 이유는 상업 사진의 경우 유명한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패션 사진사들이 사전 지식 없이 현장에 투입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정작 마크나 세이지도 촬영직전까지는 확인할 수 없는 변수가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내 경험상 오라클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할적에도 우리가 섭외해 놓은 사진사들에게 무슨 사진을 위해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찍을 테니 장비 다 갖추고 준비하고 나오라고는 하지만 확실하게 임원들이나 모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또는 얼마의 시간이 허락될지는 촬영을 주도하는 우리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연감(annual report) 디자인의 모든 것을 책임진 아트디렉터였지만 레리 앨리슨 오라클 CEO의 포트레이트 사진을 찍으려 모든 것을 준비하고 그의 집 앞까지 갔을 때 그의 변덕 때문에 하염없이 기다리다 결국은 캔슬되어 사진사 팀과 함께 다 엎고 돌아온 적도 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게다가 그 촬영을 위해서 한국에서의 휴가까지 하루 반납하고 일찍 돌아왔다면? 그러고도 아무 소득 없이 단지 사장인 래리가 사진을 찍기 싫어한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면? 실리콘 벨리의 유명한 심술쟁이는 (one of the two famous grouches.- 당시 래리 엘리슨의 별칭으로 다른 하나는 그의 절친이었던 애플의 스티브 잡스였다. 다 끼리끼리 논다.) 나름 이유가 있는 별명이었으니까. 그런데 하물며 계약에 의해 일하는 사진사는 프로젝트에서 거의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마크의 패션 워크숍들은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전제로 하여 사진사들을 훈련시키는데 보통 모델이 입고 나오는 옷한벌당 5분에서 많아야 7-8분 정도의 슈팅 시간을 할애해 주고 진행인 프로듀서가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가면서 허락된 시간 안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는 연습을 한다. 결국, 워크숍에 몇 번 참석하고 나면 서로가 굳이 누구를 찍을지 그들이 무슨 옷을 입고 나올지, 장소가 어딘지 등은 아예 물어보지도 않는다. 알 수도 없고 알아봤자 더 나은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라서 임기응변에 능통할 정도의 계속적인 훈련을 받을 수밖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음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대학에서 동양화를 첨 배울 때 똑같은 난초를 천장 이천장 그렸던 것과 비슷한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첨에는 무지 긴장이 되었으나 이년 반쯤 지나니 이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정도가 되어간다. 훈련의 덕이다.
이번 경우는 패션사진이 아닌 아트사진을 찍는 것이어서 시간은 좀 넉넉하겠지만 (그래봤자 씬당 15분이 최선이다.) 역시 모든 것은 그때 가서 보고 그곳의 상황에 맞추어서 임기응변식으로 헤쳐나가는 걸로 알고들 있었다. 나는 인물 사진을 찍는 거라 라이카 M11 흑백카메라와* 50미리 1.2F의 녹틸러스 렌즈**로 찍겠다는 것만 정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가방엔 여분의 배터리를 하나 넣고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섰다. 이번 목표는 파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인물 사진 몇 장 건지는 것이다라고만 생각하면서…
A: 벵돔 플레이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스퀘어란 별명이 있다. 굳이 가보지 않아도 (구글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광장의 가운데는 나폴레옹 시대에 건립된 청동으로 만든 컬럼이 서있고 주위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보석 브랜드 샵들과 시계점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물론 샤넬과 디오르도 보석 부분만 따로 떼어서 이곳에 입점해 있고 파리에서 가장 비싼 호텔 중 하나인 리츠파리 (Ritz Paris)도 있는 것을 보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장소가 맞는 듯했다.
인상적인 것은 원래 이곳이 정부의 관청이 있었던 곳을 비싼 명품사들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라 호텔 리츠 바로 옆에는 현재도 프랑스의 사법부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너른 광장 같은 스퀘어 곳곳에는 비싼 물건을 쇼핑하러 온 호주머니가 두둑한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까만 리무진 차량들이 꽤 많이 주차하여 있었고 가끔씩 커다란 리무진 버스들이 높고 기다란 원통형의 조각들이 가득 새겨진 초록색의 칼럼 근처에 핸드폰을 손에 쥔 세계 곳곳에서 온 호기심 가득한 관광객들을 뱉어내곤 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매서운 초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C와의 촬영에 몰입했다. 나는 D 다음인 두 번째로 찍기로 하고 그가 촬영하는 동안 근처로 로케이션 헌팅을 다녔다.
“무얼 배경으로 해서 찍으면 좀 더 새로울까?”
이 문장은 나에겐 일종의 만트라 같다. 다른 사진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항상 이번은 지난번과 뭔가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언제 어디서 갑자기 지겨움이 몰려와 사진 찍기를 그만둘 수 있다는 공포가 있다. 나의 본성이 같은 것의 반복을 제일 못 견뎌한다는 것을 사진을 찍으면서 첨으로 알아냈고 그 후론 조심하는 편이다. 혹시라도 디자인 같이 지난 사오십 년간 똑같은 방법으로 해오다 지겨움의 병에 걸려 고만두는 상황에 또 부딪치고 싶지 않다.
벵돔 스퀘어에서 여기저기를 물색하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빠르게 가로등 곁을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가며 그들의 모습을 스냅으로 찍었다. 다시 보니 괜찮은 구도 같았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C에게 방금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주고 이런 식으로 한번 해보자고 권했다. 그리곤 추워 보이는 그녀에게 커다란 코트를 입힌 채로 내 모자까지 벗어서 씌우고 가로등을 배경으로 여러 번 왔다 갔다를 반복한 끝에 아래편 오른쪽에 있는 사진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세계유수의 주얼리 제품들의 집합지인 그 비싼 광장에서 그 모든 번쩍거림을 빼고 가로등만을 배경으로 택한 나는 이것이 가장 파리다운 모습이라 생각했을까?
바로 전날 디오르/린드버그 사진전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진에서 모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았다. 특히 인물사진은 순간의 포착도 매우 중요하지만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도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사진사는 그들을 어떤 식으로 대하여야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렌즈에 담을 수 있을까 자세히 집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엔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임했다면 이젠 차근차근 정리를 해보는 시기가 된듯했다. 예를 들면 다들 고만고만한 원석이란 생각을 너머 그들 각각의 개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든지, 과연 내가 그런 눈이 있을까? 아니 그보다 그런 원석을 마주할 만한 기회라도 있을까? 그 이전에 내가 원하는 모습이란 무엇일까? 등등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모델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이 년 반 만에 일어난 일이다.
결론은 짧은 시간을 같이 하는 사이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 신뢰감이 성립되어야 자연스럽고 맘에 드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델 입장에서 믿음이 안 가는 상대에게 자기 몸을 어떻게 찍을 줄 알고 함부로 내어줄 수 있겠는가.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그들이 가진 숨겨진 탈랜트를 나 같은 초짜가 발견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서로 진심으로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생각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생각한다. 내 앞에 있는 무명의 C와 린드버그가 신인으로 발굴해서 슈퍼모델이 된 신디 크로포드를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앞의 그녀도 모델을 직업으로 삼은 전문인답게 초겨울의 제법 추운 날씨라 두꺼운 코트를 입었어도 속에는 시트루의 속살이 보이는 홑겹 블라우스만 입고 많이 추었을 텐데도 코트를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촬영에 진심이었다. 이만하면 그녀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한번 잘해보자 “ 속으로 되뇌었다.
B: 튈르리 공원으로
벵돔에서 두 시간쯤 보내면서 한 사람당 모델과 두 번씩의 촬영을 한 후 우리는 리볼리 길을 (Rue de Rovoli) 가로질러 튈르리 공원으로 향했다. 작년에도 그곳에서 딱 요맘때 다른 모델과 촬영을 했었는데 그때처럼 루브르가 가까운 남쪽이 아니라 이번엔 반대편인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회전목마로 향했다. 늦은 오후로 들어서며 주위는 벌써 어둑해 오기 시작하고 기온이 떨어지는지 훨씬 더 춥게 느껴졌다. 다행히 세이지와 호텔 방에 들어가서 다음 씬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온 C는 개버딘 바바리코트 안에 훨씬 따뜻한 옷을 입고 나타나 덜 추워 보였다. 안심이 되었다.
나는 모노크롬 카메라로 촬영할 때는 사진사들이 흔히 말하는 매직아워인 여명의 순간보다 좀 더 어두운 시간에 찍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까만 바탕에는 칼라사진의 경우도 어느 색이든 훨씬 빛이 나기 때문에 그리고 흑백 사진일 경우는 바탕색과의 대비가 확연히 보여 훨씬 강한 느낌을 주니까. 그날은 모노크롬 카메라에 녹티 렌즈를 끼워 놓은 상태라 F1.2가 맥시멈인 조리개를 완전히 열어놓고 (wide open이라 한다) ISO도 1600까지 올려서 웬만큼 어두워도 주위의 광선을 이용하여 스트로보 없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도록 세팅을 하였다.
빠르게 어두워지는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바로옆의 회전목마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해 보기로 하고 C에겐 내 렌즈를 보지 말고 목마를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라 주문했다. 역시 프로라 그녀의 얼굴은 모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놓기 시작한다. 마치 어렸을 적에 가족들과 목마 타던 때가 생각나는 듯 어렴풋한 미소까지 떠올리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몇 컷을 찍고는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했다.
나: “너 참 잘한다. 아름답다. 고맙다.”
C: “네가 여기서 회전목마를 바라보며 생각하라고 했잖아? 난 그렇게 했을 뿐이야.”
와우! 보통의 모델들은 똑같은 주문을 했더라도 그런 모습이 나오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었다. 갑자기 이 친구랑 다음에 파리에 오면 같이 한번 더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사진은 회전목마 앞에 있던 아르누보 스타일의 벤치이다. 마치 에펠탑의 아름다운 곡선을 보듯 연철로 만들어진 벤치의 프레임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더욱이 벤치에서 의자로 쓰이는 나무까지도 칼같이 똑바른 직선이 아닌 약간의 휘어진 듯한 느슨한 모습이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이 촬영하는 틈새에 벤치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선이 참 이쁘네. 마치 우리나라 치마저고리의 간결하나 우아한 선 같구나.”라는 생각을 하다 갑자기 이걸 찍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집어 들고 보고 있던 벤치의 모습을 한 장 찍었다.
나에겐 이 사진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파리의 모습” 같았다.
다시 내 차례가 돌아와서 C를 벤치에 앉게 한 후 몸을 돌려 팔을 나무등판 위에 얹고 고개를 살짝 기대어 보라 하였다. 위의 왼쪽 사진이다. 사람이 없을 땐 파리만의 차분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빈 의자의 모습이었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기대어 앉으니 고즈넉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녀의 매력적인 표정이 화면을 채운다. 고개를 돌려 찬란한 불빛을 번쩍거리며 돌아가는 회전목마의 모습을 찍어 보았다. 오른쪽 사진이다.
도합 네 시간 남짓의 초겨울 오후의 촬영을 마무리할 때쯤 주위는 깜깜한 밤으로 변해있었다. 사진을 후루룩 돌려보니 마음에 드는 이미지들이 몇 장 보인다. 내 나름의 감성이 묻어 나온 듯 보여 마음속에선 “이거면 되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상업사진작가와 예술 사진가가 느끼는 만족도의 접점은 확실히 다르다. 나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맘대로 찍을 수 있는 예술 사진 작업이 정말 좋다. 여기에는 더 이상 사진을 찍겠다 말겠다 하는 예전의 보스인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도 없고 나보고 이사진을 이렇게 저렇게 찍으라 간섭하는 클라이언트도 없고 누구한테 돈 받고 찍는 것이 아니라 부담 없고 내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고, 사진사라 마음이 너무나 편하다. 그리고 모델과 같이하는 협업이라 훨씬 재미있다. 한마디로 사진 찍을 때가 젤 행복하다. 감사하다.
주:
* 디지털카메라는 흑백만 전용으로 찍는 모노크롬용 사진기가 있다. 칼러로 찍어 흑백을 만드는 것보다 화소가 훨씬 높아 흑백사진을 찍고 싶을 때는 이 바디를 이용한다. 필름의 퀄리티와 똑같지는 않지만 프린트를 했을 때 아주 크게 뽑지 않을 경우 거의 비슷한 이미지가 나온다.
** 보통의 카메라는 조리개가 F3.5 정도에서 시작하는데 라이카의 녹틸럭스 (Noctilux) 렌즈군은 내가 쓰는 F1.2에서부터 1.0, 0.9와 같이 아주 심도가 낮은 렌즈로 50mm, 75mm 정도가 있다. F1.2로 일 미터 거리에서 사람 얼굴을 찍는다면 오른쪽눈 망막에 초점이 맞으면 바로 위에 있는 눈썹은 초점이 안 맞는다. 그러므로 이 렌즈는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기보다 사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하여 포커싱을 어디에 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좀 다른 종류의 렌즈다. 어쩌면 사람의 눈과 같이 보고 싶은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나머지는 다 흐리게 만드는 내 눈동자와 비슷해서 좋아한다..
위의 사진들 모두 이와 같은 세팅에 F1.2 와이드오픈으로 찍었다.